'국민학교'를 '초등학교'로 고치기까지1)
'국민학교'에서 초등학교'까지
초등학교는 한국 교육사100년 만에 최초로 등장한 이름이다.
현대 한국 교육사는 고종의 '교육입국조서'(敎育立國詔書)가 공포된1895년 12월을 기점을 잡는데, 이 때5개의 '보통학교(普通學校)가 등장하였다.
그러나 조선이 일제에 의해 1910년 불법 강제로 합병되자, 다음 해인 '조선총독부령'에 의해 '보통학교'는 일본식 '소학교'(小學校)가 되었다.
이어 1938년에 '심상소학교'(尋常小學校)로 개칭했는데,당시『조선일보』는 이 사실을 호외로 보도한 바 있다.
호외란 비상 사전을 보도하는 형식이다.
일제는 그만큼 개칭 사실을 중요하게 여겼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시에 국제 정세는 전운이 감돌고 있었다.
1년 전인 1937년 7월에 일제는 지나사변을 일으켜 중국을 침략했고, 일제와 동맹 관계를 맺었던 히틀러의 나치스는 1939년 9월에 선전 포고도 없이 폴란드를 침공하여 제2차 세계 대전을 터뜨렸다.
따라서 '심상소학교'는 그 사이에 등장한 이름이었다.
이어 1940년에 우리는 저 치욕스런 '창씨개명'을 강요당했는데, 그날 2월11일은 일제의 4대 명절 중 하나인 기원절(記元節)이었다.
바로 이 즈음 일제 문부성은 '국민학교제'의 시행을 위해 전국의 교사들을 90시간씩 연수시키는 명령을 내린다.
물론 군사 훈련 방식이었다.
그리고 1941년 2월에 조선총독부령에 의해 '국민학교령'을 공포한다.
이것이 1996년 2월까지 55년간 우리 한국 교육사를 지배해 온 교육 기관의 명칭이었다.
그리하여 1996년 3월1일자로 '초등학교'가 되었으나, 실제로 당시 '국민학교제'에서 출생한 '애국 조회', '주번제도' 등을 비롯한 태평양 전쟁시에 내선일체(內鮮一體)와 황국신민화를 위한 각종 일제의 관행은 그대로 남아 있는 상태이다.
내가 속해 있던 '씨알교육연구회'가 교육계의 일제 잔재 청산이란 차원에서 '국민학교란 이름을 고치자는 모임'을 결성하고, 이름뿐만 아니라 그 관행도 씻어 내야 한다는 주장을 하였지만, 적지 않은 실망과 좌절만 남긴 채 겨우 이름만 고치게 되었다.
그리고 이 명칭개정 운동 과정에서 실제로 교육 현장과 사회 일각에 도사리고 있는 뿌리 깊은 구조악과 부딪혔으며, 그것이야말로 우리 자신의 또 다른 얼굴이라는 점에 주목하게 되었다.
이런 까닭으로 '국민학교'가 '초등학교'로 고쳐진 것에 대해 두 가지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국민학교'란 상징성이 제거됨으로써 그 빙산의 아랫부분인 일제 '국민학교제'의 관행을 청산시키기가 더욱 어렵도록 깊이 잠복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일제가 패망한 지 반세기가 넘도록 그 청산 작업이 이루어지지 않은 현실에서 그나마 '국민학교'라는 이름을 고친 것은 중요한 사건일 수 있다는 지적이다.
우리는 이 두가지 관점 모두가 옳다고 믿는다.
따라서 앞으로 이 부분에 대한 논의가 재발할 때 참고할 수 있는 자료를 여기에 싣는다.
왜냐하면 그 일을 처음부터 일관되게 공개적으로 사회에 호소하고 추진한 것은 우리 '씨알교육연구회'뿐인데, 일부 잘못 알려지거나 아예 알려지지 않은 부분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왜, 누가, 언제, 어떻게 이 문제에 관련되었는지를 분명하게 할 필요에서 그 전과정을 정리하고 공개하고자 한다.
이름 바꾸기 이전의 현장
초등학교란 명칭 이전에 사용된'국민학교'가 누가, 왜, 어떻게, 언제부터 시행되었는지를 바로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물론 현재 대체로 60대 이상 되는 사람들은 자신이 다닌 '국민학교'가 일제 시대의 태평양전쟁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 것이다.
그러나 지난 57년간 우리나라 사람 대부분이 다니고 졸업한 이 '국민학교'가 '내선일체'와 '황국신민화'를 세뇌시키기 위해서 일제 파시즘 내각이 4년간 비밀 회의에서 제조한 '국민학교제'의 유산이란 것을 아는 이는 별로 없을 것이다.2)
왜냐하면 그 동안 이것을 연구한 학자도 없고, 가르치거나 배운 사람도 없으며, 동시에 그것은 한국 현대사나 한국 교육사 어디에도 자세히 나타나 있지 않기 때문이다.3)
그리하여 이 문제는 일부 연령층의 개인적 과거 경험으로 잔존할 뿐 해방 50년이 넘도록 사회적.교육적으로 외면당해 온 것이 사실이다.
특히 초등학교는 그 당사자였지만 이른바'국민학교제'의 유산이 행정적.도덕적 관행으로 뿌리 깊게 박혀 있는 상태여서 스스로 이 문제를 제기하기엔 어림도 없는 일로 보였다.4)
물론 초등학교란 명칭으로 개정되었다고 해서 이'국민학교제'의 관행이 아직도 사라진 것은 결코 아니다.
따라서 그 유산을 통과한 사람들이 교장, 교감으로 남아 있는 한, 앞으로도 상당 기간이 지나서야 겨우 개선될 것이다.
그 사이 교육법도 전혀 바뀌지 않았거나와, 교육자들도 이 점에 대해 당시까지 아무런 문제 제기를 하지 않았다.
개인적으로 이 문제를 제기한 일부 인사가 있기는 했지만, 오랜 세월 속에서 그들 자신도 누군가가 고쳐 주기를 기대한 정도였지 스스로 고치는 일에 나섰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것마저 교육의 본질 회복과 일제 잔재 청산을 균형 있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한 반일 감정의 대상으로 이 문제를 언급하는 것 같았다.
그러므로 똑같은 대상을 놓고 접근하는 태도에서 그들과 우리의 태도는 차이가 있었다.
그렇지만 우리도 그 사실의 인식 정도는 그들과 큰 차이가 없었다.
무엇보다도 그것에 관한 자료에 접근할 수 없었을 뿐더러, 1940년대를 경험하지 않은 우리와는 정서적으로도 거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앞서 지적한 대로 '국민학교제'의 관행이 생생하게 살아 있는 학교현장에서 그것을 알려 준 선배 교사도 전혀 없었기에, 그 이름을 고치자는 주장은 하나의 망상으로 통할 수밖에 없었다.5)
좌우간 '국민학교'는 영원할 것으로 보였고, 학교 현장이나 사회일반도 그것을 당연한 것처럼 여기던 때 이 개정 운동은 시작되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국민학교'명칭 개정 여론이 무르익자 우리는 '국민학교' 이름만 고쳐서는 안 된다고 수시로 강조했지만,6)거기서 미치지는 못했다.
그만큼 일제의 영향은 여전히 뿌리 깊게 남아 있으며, 앞으로도 지속될 것이라 본다.
바로 그 사이에 '국민학교'라는 일제의 상징이 폐기되고 '초등학교'가 태어났다.
그러므로 명칭 개정은 일제 잔재의 청산이 아니라 그 작업의 시작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명칭 개정 문재를 처음 제기한 함석헌 선생
우리가 명칭 개정을 공식적으로 사회에 처음 제기하기로 결정하고 서명 운동의 기점으로 잡은 때는 1993년 4월 19일이다.
1993년은 이른바 '문민 정부'라는 김영삼 정부가 시작된 해로, 출범한 지 두달이 미처 되지 못한 때였다.
그때 김영삼 정부는 '물태우'라는 별명을 듣던 노태우 정부와 다른 새로운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공직자 재산 공개를 비롯하여 '신한국 건설'을 내세우면서 김영삼 대통령 개인의 인기가 올라가고, 각종 개혁이 선언되고 있었다.
그렇다고 그 분위기가 곧바로 서명 운동으로 연결되었다는 뜻은 아니다.
적어도 서명 운동읭 단초는 우리 내부의 고민 끝에 나온 것으로, 구태여 옛말로 하자면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믿음밖에 다리 그 이유를 찾을 수가 없을 것이다.
그만큼 답답했다는 뜻이다.7)우리가 『조선총독부관보』에서 '국민학교'와 관련된 내용을 찾아 『씨알교육사상』에 연재할 때도 서명 운동은 전혀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국회 청원 서명 운동은 이 연재를 마치자 우리 스스로 실천 방법을 놓고 토론하면서 나온 결과였다.
따라서 각종 개혁의 추진과 사회적 기대가 우리의 서명 운동에 도움을 주었거나 고무시킨 면이 없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우리 자신의 서명운동 결정은 이런 분위기와 아무런 관계도 없었다.
실제로 교육 개혁을 선언한 교육부나 정부가 이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서명 운동이 끝나고 국회 청원이 이루어진 지 약2년이 지난 후였다.
그런데 실제로 이 문제를 공식 제기한 사람은 이보다 앞선 1987년 이었으며, 그 인물은 함석헌(咸錫憲)선생이었다.8)
그 동안 개인적을 '국민학교' 명칭을 개정해야 한다고 생각했거나 주장한 사람은 한 둘이 아니었다.9)
그렇지만 말 그대로 개인적인 것이었다.
한 번도 공식화해서 사회 문제가 된 적이 없었다.
적어도 우리가 이 문제를 제기하기 전까지도 그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함석헌 선생은 1986년 5월15일 오후 3시,대학로 흥사단 강당에서 열린 '민주교육실천협의회'창립식 자리에서 축사를 했는데, 그 축사의 내용이 바로 이 문제였다.
"국민학교란 이름을 드냥 두고서 어떻게 민족 민주 교육을 말할 수 있느냐?"
이 창립식은 그 전 해인 1985년 5월 이른바 『민중교육』지 사건10)으로 해직된 교사들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당시는 전두환 정권이 지배하던 이른바 군부 독재 시절이었고, 함 선생은 재야의 상징적 인물로 통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교육계의 민주화 세력을 자임하고 나선 이 단체가 그 분을 초청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당시 대부분 정치 사회적 발언을 하던 분위기에 아랑곳하지 않고, 선생은 오히려 교육 단계의 아랫부분을 강조하였다.
"이제 세상이 달라져서 교육의 비중도 달라지지 않으면 안 된다.
과거엔 '국민학교'보다는 중학교, 중학교보다는 '고등학교', 고등학교보다는 '대학교'라 하여 대학 교육이 가장 중요했으나, 지금은 그렇지 않다고 본다.
도리어 대학교보다 고등학료, 고등학교보다 중학교, 중학교보다 '국민학교', 그리고 그보다는 유치원 교육이 더 중요해졌다고 할 수 있다."
이런 마당에 일제 '국민학교'를 놔 두고 어떻게 민족 교육 운운할 수 있느냐는 것이 그 골자였다.
그런데 당시 전두환 군사 독재 정권에 대항하면서 민족 교육, 민주 교육을 강조하던 교사들에게 이런 축사는 별로 인기가 없었다.
정치적 억압과 비민주적 교육 현장에 저항하던 해직 교사나 현직 교사들에게 '국민학교 이름이나 고치자느 말은 지금 생각해 봐도 당시 분위기와 상당한 거리감이 있었다고 본다.
그러나 함 선생의 생각은 한국 교육사의 참다운 반성 없이 하는 교육 운동은 교육도 아니고 운동도 불가하다는 것처럼 보였다.
즉 진짜 교육은 정치적. 사회적 운동과 달리 교육 본질에 대한 인식에서 비롯되는 일이며, 그 결과 운동의 형식으로 나타날 수 있다고 보는 것 같았다.
동시에 그것은 우리가 '국민학교'명칭 개정 운동을 전개할 때 중요한 참고가 되었다.11)
사실 이 단체는 1989년에 결성된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이하 전교조의 모체가 되었는데, '국민학교'는 전교조의 운동 성격이나 방향과 관계도 없었고, 그들 또한 여기에 관심도 없었지만, 12) 결과적으로 당시 그 창립식이 하나의 심마리를 제공한 셈이었다.
아울러 함 선생의 축사 배경도 나름대로 이해하게 되었다.
그러고 나서 우리는 함 선생의 축사가 있은 지 7년 만에 서명 운동을 통해 세상에 문제를 제기하게 되었던 것이다.
함 선생이 세상을 떠난지 만4년 후의 일이용, 해방 반세기 50주년을 2년 앞에 둔 시점이었다.
명칭 개정 운동의 주체는 누구인가
이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다.
무었보다도 명칭 개정의 주체는 '씨알교육연구회'였다.
'고치자'는 모임은 그 내용이나 성격으로 보아 명칭 문제를 다루기 위해 '씨알교육연구회'의 별칭에 지나지 않는다.
참고로 '씨알교육연구회'가 이 문제를 처음 제기할 때 취지문은 다음과 같다.
버려야 할 '국민학교'
그 명칭의 시작과 목적을 알면서도 깊은 수치스러움을 못 느낀다면, 그는 진정 우리 나라 사람이 아닐 것이다.
한 마디로 군국 일본인을 만드는(황국의 도를 다르는)기초 교육이 국민학교의 목적인데, 저번에 늙어 죽은 일왕 히로히토(裕仁)가 1941년 2월 28일 내린 '칙령 제148호'(국민학교령)과 1941년 3월25일 내린 '칙령 제254호'(조선교육령개정)가 이를테면 법적 근거라는 것이다.
우리의 땅고 주권을 빼앗기고도 미처 손대지 않았던 이름을 1940년 2월 이른바 '창씨 개명'한 1년 후, 다시 일본인을 일본인답게 정신 무장시키기 위하여, 다른 말로 하면 전쟁 준비를 위하여 만든 의무 교육 제도의 명칭이 '국민학교'가 생긴 역사적 배경일 것이다.
물론 이것은 그 까닭의 가장 가까운 데만 가리키는 말이다.
거슬러 올라가면 무엇보바도 나라를 빼앗은 그들보다 빼앗긴 우리가 문제 아닐까?
해방이 오자 땅을 찾거나 자기 가족의 이름들은 다시 우리식으로 고쳐 쓰면서도, 어째서 반세기가 다가오는 지금까지 이 낡은 시대의 쓰레기를 못 버리고 있을까?
도대체 그 숱한 교육관련 법이란 것들을 고쳤으면서도 이 더러운 식민지 시절의 이름을 못 버리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 일본마저 전쟁에 패한 뒤 없애버린 이름이 '국민학교'아니냐.
........(중략)......
비록 한자말이라 해도 '초등'(初等)이 학습 단계를 두고느 옳은 말이다.
그토록 따라가자고 외쳐 대는 저 선진국9결국은 잘못된 사고 방식에서 나온 말이지만)에서도 '초등'이라 했지 '국민'은 없다.
좀더 엄숙하게 말하자면 '국민학교'가 있는 한, 일본의 국국주의 정신이 상징적으로 살아 있는 식민지는 아직도 지속되고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단지 그 이름 하나만을 고치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누가 이 이름을 버리고 새 이름을 지을 건가....
□참고로 '국민학교'에 관련된『조선총독부관보』제4254호(1941년3월31일자)를 싣는다.
그러나 밑바닥 사람인 우리는 현실적.법적으로 이 문제를 다룰 만한 자리에 있지 못하다.
그래도 관심만은 끝까지 버리지 않은 체 이 명칭 고치자는 일에 부족하나마 작은 정성을 드리고자 한다.
--씨알교육을 배우는 모임13)
아울러 해당 『조선총독부관보』를 복사해 싣고, 그 다음 쪽에다 그것을 한글로 옮겼다.14)
그 뒤에 실은 내용은 다음과 같다.
(1)히로히토의 칙령 148호(국민학교 명칭의 유래와 목적, 1941년 2월28일): 『씨알교육』1호
(2)국민학교 규정9조선총독부의 국민학교 시행령.일본과 다름, 1941년 3월 31일):『씨알교육』2호
(3)히로히토 칙령269호9조선청년특별 연성령, 1942년 10월1일):『씨알교육』3호
위 내용을 3회 연재한 후에 우리는 국회 청원 서명 운동을 하기로 결정했는데, 그것은 정말 어려운 고민 끝에 태어났다.
우리들 내부의견도 일치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만 그즈음(1993년 4월 전후)에 '국민학교' 명칭을 고쳐야 한다는 독자 토고가 일부 일간지『한겨례신문』,『한국일보』)에 실렸는데, 그것이 조금 우리으 시선을 끌었다.
우리는 1993년 4월19일을 기해 서명 운동을 시작하였다.
특히 그 대상은 먼저 '국민학교'에 재직중인 현직 교사로 정했다.
당사자들이 외면한다는 것은 언어도단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 전에 우리는 서명 운동의 주체, 방법, 예상, 목적에 대해 격론을 벌인 결과, 우리 자신이 서명 운동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결정을 하기에 이르렀다.15)
방법은 현직 교사를 대상으로 하되 일반의 참여를 허용하기로 하였다.
성공과 실패 따위에 좌우되지 말고 우리 교사의 양심과 의지에 따르자고 하였다.
또 처음부터 끝까지 '씨알에 들아가는 태도' 즉 씨알교육'의 자리에서 벗어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새삼 다짐하는 이야기를 교환했다.
말하자면 이'국민학교'명칭 개정 문제는 '씨알교육'의 연장에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한 것이다.
그리고 이 몇칭의 폐기는 그 자체만으로 고립적이어서는 안 되며, 마땅히 타분야의 일제 잔재 청산 운동과 동일선상에서 전개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왜냐하면 일제 잔재란 교육계에만 특별히 남아 있는 것도 아니며, 도 빙산의 일각으로 보이는 명칭 역시 보이지 않는 그 아랫부분의 실체를 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 대하여 우리가 무기로 삼았던 것은 단지 현장 교사의 양심과 확고한 의지뿐이었다.16)
말하자면 맨손말고는 아무 것도 없었다는 뜻이다.17)
그때 우리가 기대했던 것은 여기에 관심을 보인 양심적인 교사들과 사회으 공기(公器)노릇을 하는 언론밖에 없었다.
우리의 서명 작업의 1차 대상자를『씨알교육사상』독자로 정하였다.
약 120여 명쯤 되었는데, 이들의 서명을 받는 데도 2개월이 더 걸렸다.18)
왜냐하면 교사느 공무원 신분인데 과연 집단 운동에 해당하는 명칭 개정 운동에 서명을 해도 되느지 불안하게 여겼던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처음엔 1~2주일이면 충분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과연 예상보다 오래 걸렸다.
물론 서명한 교사들도 모두 확신에 찼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마지못해 한 사람도, 내용을 잘 모른 채 그저 가볍게 생각한 사람도 포함되었을 것이다.
좌우간 우리는 그 서명 숫자를 발판으로 이른바 '국민학교란 이름을 고치자는 모임을 결성하였다.
1993년 6월24일 오후 6시, 경희대 입구에 있는 '반민족문제연구소'(현재 '민족문제연구소'로 개칭, 소장 김봉우)에서 '고치자'19)가 결성되었다.
결과적으로 그것은 '국민학교'가 '초등학교'로 고쳐지는 데 결정적인 기능을 한 것이 사실이지만 결코 순조롭지만은 않았다.
그 출발 과정과 참여 인사들이 행태에 대해서 좀더 구체적으로 밝힐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우선 그 모임의 주축은 '씨알교육연구회'였다.
여러가지 사회 형편과 현실을 고려하여 우리는 될수록 많은 사람이 참여하기를 바랐다.
이에 따라 우리 모임의 대표였던 김남식을 비롯하여 현직 교사로는 신중찬, 유근, 그리고 필자인 내가 자리를 같이했고, 처음으로 이오덕(아동문학가),남기범(개인사업),박창희(한국외국어대 교수),정재도가 새로 참여하였다.
이들은 모두 고문이 되었다.
이오덕은 김남식이 연락했고, 남기범은 그들과 관계가 있었다.
박창희는 반민족문제연구소 소장 김봉우 씨로부터 소개받아 그날 처음으로 대면하였다.20)
이오덕을 제외하고는 그들과 초면이었으며, 그들끼리도 초면이었다.
하여간 이 날 발기 모임에서 우리 '씨알교육연구회'가 중심이 되어 '고치자'가 이루어지고 대표와 간사가 선출되었다.21)
그리고 이틀 후인 1993년 6월26일자『한겨레신문』에 그 발기 취지와 관련된 기사가 5단 박스 기사로 나가면서 해방 후 처음르로 이 문제가 교육계와 사회 일반에 알려지게 되었다.
서명 운동에서 국회 청원까지
우리 스스로도 언론이 그렇게 다루어 줄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자신감이 생기기도 했다.
이 『한겨레신문』의 기사22)가 나가기 전에 우리는『조선일보』(1993년 5월22일자, 김남식 명의로)에 독자 투고를 하였다.
1993년 6월24일 모임 결성부터 10월26일 국회 청원 직후까지 4개월간 일간지에 24회,방송(TV포함)9회,그리고 그 후에도 김숙희 교육부장관이 명칭 개정을 약속하던 1995년 2월 9일 까지 일간지를 포함하여 시사. 교육 주간지와 월간지에 약30회가 보도되었다.23)이런 언론의 힘을 얻어 서명 작업은 예상 밖으로 순조로웠다고 할 수 있다.24)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일반인의 경우에 하는 말이다.
정작 문제의 당사자격인 초등학교에선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비웃음과 냉소가 대부분이었다.
그런 현상을 뒷받침하는 증거는 초등학교로 고쳐졌음에도 불구하고 일제 황민화 교육의 관행들이 아직 그대로 남아 있는 데서 확인할 수 있다.
교육 관련자들의 외면과 의혹의 시선 속에서 우리는 일반 사회 단체의 협조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 형편에서 '함석헌선생기념사업회'(이사장 장기려 박사)의 격려는 정신적으로 정말 커다란 힘이 되었다.25)
반대로 그것은 역시 우리를 실망시키기도 하였다.
일제 잔재를 청산한다는 역사적 명분과 민족 의식을 가르쳐야 하는 학교 현장에서 우리의호소는 모기 소리처럼 작은 것이었다.
물론 민족 민주 운동을 하는 단체도 많았지만, 그들의 관점에서 이 문제는 관심을 끌 만한 것이 되지 못하였다.
그만큼 '국민학교'라는 명칭이 폐기되리라고 확신한 사람은 거의없었다.
단지 폐기되어야만 한다고 확신했을 뿐이다.
그 생각 하나만이 우리가 가진 사회적 밑천의 전부였다.
이런 까닭으로 주변에서 볼 때는 우리의 일이 무모해 보였을 것이며, 또 별난 행위를 한당고 여겼을 것이다.
우리 모임의 고문을 맡았던 박창희 교수의 언행도 그런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었다고 본다.
그는 서명 운동 자체를 반대하였다.
어리석은 일이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십 수 차례나 서명 운동 중단을 강요했는데, 이를 일언지하에 거절하자 우리에게 "무식하다"고 비난을 서슴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우리의 행동을 사회 현실을 모르는 철부지 행동쯤으로 여겼고, 그것이 이른바 '국민학교'교사의 수준이라고 간주했던 것 같았다.
얼핏 생각하면 거기에도 일리가 있다고 본다.
그러나 왜 '국민학교'명칭을 폐기시켜야 하는가에 대한 우리의태도는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너무 확고했기 때문에, 서명 운동의실패나 성공 따위에 크게 좌우될 이유가 없었다.
따라서 설사 우리가 현실을 모르는 무식꾼이 라면 무식한 대로, 수준이 낮으면 낮은 대로 끝까지 일관하자는 약속을 수시로 확인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박창희교수의 태도는 우리의의심을 사기에 충분한 것이었고, 그 불순성이야말로 자신의 무식을 드러내는 지식인의 허위 의식이 아니었나 여겨졌던 것이다.26)
그러나 우리는 그런 일에 개의치 않기로 하였다.
그래서 꾸준히 사람을 접촉하면서 서명을 받아 나갔다.
일부 기자들은 가두 캠페인을 제안하기도 했으나 그런 행위에 대해 우리는 분명하게 거절하였다.
무슨 구호를 외치는 일로 해결하지 말자는 태도 때문이었다.
따라서 우리가 서명 운동 때 한 일은 단순하였다.
단지 10월12일 서울 교육대학교 교정에서 약 3시간 동안 500명의 서명을 받은 것이 고작이었다.
장차 초등학교 교사가 될 학생들에겐 관계가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에 앞서 우리는 9월23일 한글회관에서 '국민학교 이름은 고쳐야 한다'는 주제로 강연회를 개최하였다.27)그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강만길(고려대학교 교수, 한국사):「한국현대사와 국민학교」
김남식('국민학교란 이름을 고치자'모임 대표):「고백,내가 저지른 친일행위」
박재순(한신대학교 교수, 신학):「씨알교육을 말한다」
대강당을 가득 메운 참석자들의 심금을 울렸던 이 강연회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학술적으로나 경험으로나 이 분들의 말씀은 지금도 서명 운동의 백미였다고 믿고 있다.28) 특히「씨알교육을 말한다」는 명칭 개정과 상관없이 보이지만 그렇지 않았다.
명칭 개정 실천 운동도 어디까지나 씨알 교육 사상의 연장선에서 이루어진다는 점 때문이었다.
우리 스스로도 그 점을 수없이 강조한바 있다.
그러나 문제는 국회였다.
국회 청원은 청원법에 의해 국회의원이 대신 청원을 하는 것인데, 우리 같은 교사는 국회의원을 알 리가 없었으므로, '국민학교'명칭 개정을 청원해 줄 소개 의원이 있을 턱이 없었다.
그래서 고민 끝에 국회 교육위원회 여당 간사인 김인영 의원(경기 수원)과 접촉하기란 정말 어려웠다.
김 아무개라는 그의 비서만 연락이 가능했다.
이 김 아무개라는 자가 김인영 의원의 의정 활동을 거의 관리 하는 것 같았다.
나는 김인영 의원과 면담하기 위해 그 비서와 먼저 접촉을 해야 했다.
그런데 그 비서의 대답은 너무 뜻밖이었다.
"국민학교 선생이 건방지게 함부로 국회의원을 만나려고 하느냐?"29)
우리는 아연했다.
이에 앞서 두 사람은 몇 번에 걸쳐 '국민학교'명칭 문제에 대해 대화를 나눈 후였다.
더구나 김인영 의원은 이미 국정 감사 기간중에 이 문제를 거론하고 있었다.
" '국민학교'란 이름이 일제 잔재인데 교육감은 그런 것을 알고나 있느냐?"는 것이 김의원의 주된 질문 요지였다.30) 우리는 이런 사실이『경기일보』에 1면 톱으로 실렸다는 이야기를 다른 신문 기자한테 들었기 때문에, 오히려 접촉이 쉬울 줄 알았는데, 그게 잘못이라면 잘못이었다.
우리는 할 수 없이 야당의 장영달 의원(전북 완주)에게 갔다.
사정을 이야기하자 적극 동의한다면서도 "국회 교육위원회는 여야가 없다"면서 , 먼저 여당 의원의 동의를 구하라고 요구하였다.
우리는 그 제의를 받고 다시 김인영 의원을 접촉하려 했지마나, 김 아무개 비서는 그 청원건에 대해 딴소리31)를 하고 있었다.
그래서 다시 장영달 의원에게 갔다.
소개 의원이 될 것인가 말 것인가를 분명히 하라고 했다.
마침내 장영달 의원이 김인영 의원실에 확인 전화를 하고 나서야 청원 의원이 되겠다고 약속해 주었다.
장영달, 홍기훈, 박지원, 김원웅 의원이 우리으 서명 청원에 서명한 분들이다.
그 밖에도 국회 여야 의원(실) 거의 전부에게 우리 의견과 '국민학교'라는 명칭을 왜 고쳐야 하는지에 관한 자료를 전달 한 바 있다.
모두들 "훌륭한 일을 하고 있다"고 칭찬 일색이었으나,그것이 상투적인 인사치레인지 또는 진실한 태도에서 나온 것인지는 지금도 알 수가 없다.
우리는 그렇게 20여 일쯤 지체하면서 실망과 분노를 삼킨 끝에 마침내 1993년 10월 26일 오후 4시쯤 국회에 정식 청원하기에 이르렀다.
이 날은 특별히 안중근 의사의 이등박문(伊藤博文)사살 84주년과 유신의 심장이 멎은 날을 기념하여 김남식 대표를 포함하여 모두 5천 181명의 이름으로 청원하였다.
그 당시 거의 모든 언론이 이 사실을 보도했고33) 김남식 대표의 특별 인터뷰를 실은 일부 기사도 있었다.
일제 잔재 청산의 상징과 김남식 대표의 속죄 행위가 조용히 감동을 전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실천 행위가 일치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또 일부 언론은우리가 서명자들에게 조사한, '국민학교'를 대신하는 새 이름도 자세히 소개하였다.34)
이렇게 해서 언론에 의해 이 사실이 널리 알려지자, 다음날인 10월27일 오후에 김인영 의원의 비서인 김 아무개로부터 연락이 왔다.
김인영 의원이 만나자고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12월 초에 우리는 장영달 의원과 함께 김인영 의원을 그의 사무실에서 만났다.35)
물론 면담에 앞서 우리는 김 아무개 비서의 행위에 대하여 김인영의원의 사과를 먼저 받았다.
김인영 의원의 질문은 간단했다.
"나는 국회 활동에 뚜렸한 것이 없다"면서 이 명칭 문제를 자기의 국회 업적과 관련시켰으면 하는데 도와 달라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기로 하고 모든 절차는 김인영의원에게 일임하게 되었다.
그 자리에서 장영달 의운도 적극 동의하고 있었으며, 우리 역시 이 문제가 국회에서 원만히 처리되기를 희망했기 때문에 상당한 불쾌감을 지녔으면서도 다른 도리가 없었다.36)
우리는 국회의원의 태만인지 직무 유기인지를 곰곰이 되씹으면서 어떤 배신감을 선물로 받은 것 같았다.
그리하여 우여곡절 끝에 이미 서명 청원한 것을 1993년 12월 14일에 김인영 의원을 대표로 수정하여재청원하게 되었다.
즉 장영달의원을 소개 의원으로 한 10월 26일의 청원을 취소하고, 그 대신 김의원을 소개 의원으로 교체하기 위해 새로 청원하는 형식이었다.
물론 절차상의 모든 문제는 여야 간사가 합의한 상태였다.
내용은 별것 아닌 것 같지만 우리 국회가 어떠한지, 국회의원이 어떤 행태를 보이는지에 대해 부분적으로나마 생생하게 경험할 수 있었다.
'죽 쒀서 개를 준' 사연
우리가 청원한 '국민학교'명칭 개정 문제에 대해 당시 오병문 교육부장관은 긍정적이었다고 들었다.
그는 "내 지임중에 이 '국민학교'이름만은 확실히 고치겠다"고 말했다는 것이다.37) 그런데 그해 가을에 청와대 보고에서 이 문제를 거론했지만,김영삼 대통령의무응답 때문에 결말이 나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만약 이 때 결정이 되었다면 그후에 이오덕, 박창희의 몰상식한 행위도 없었을 것이며, 좀더 적극적으로 일제 '국민학교제'의 관행이 청산될 수도 있었다고 본다.
왜냐하면 그 주체인 우리가 제기한 문제들에 대해 개정운동의 혼선과 분쟁에 휘말리지 않고 분명하고 강력한 발언권을 행사할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고치자'를 제외한 다른 모임에선 이런 자료와 관행에 대해 전혀 무지한 상태였으며, 단지 이름만 고치면 만사가 다 해결된다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그리하여 1994년 1월5일,국회 배중섭 전문위원은 '청원소심사위원회'가 개최되면 우선 이 명칭 문제를 심사하게 될 것이라고 우리 모임의 김남식 대표에게 정식 통보하였다.
물론 그 사이에 여러차례 국회사무처와 연락이 이루어졌고, 그 업무는 김남식 대표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러나 내각 개편에 따라 새로 교체된 김숙희 장관은 다음 달에 "개정 반대 여론도 적지 않으며, 지금은 황국 신민을 교육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명칭 개정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고 이 문제에 대해 분명하게 반대하는 발언을 하게 된다.
이 명칭 개정 불가 발언 이후 1년간 우리 '씨알교육연구회'도 갈등을 겪으면서 이 운동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를 갖는 분위기가 일시적으로 나타나기도 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이 기간에 '국민학교'명칭 문제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는 계기를 맞게 되었다.
특히 친일 문제 전문가인 『중앙일보』정운현 기자는 『원안준거 국민학교의 실천적 해설』(東京,1940년 5월)이란 책을 우리에게 제공했는데, 그것을 우리 말로 옮긴 것도 이 때였다.38) 이 책의 저자는 '국민학교 연구회'로 되어 있는데, 당시 '국민학교제'의 진행 과정이 자세히 나와 있었다.39)
그런데 이 무렵 박창희가 중심이 된 모임도 서명 운동에 나섰다.
스스로 "무식한 짓"이라고 규정한 서명 운동을 한다는 것이었다.40)
거기에 이른바 우리 나라의 명망가들이 등장하게 된다.
우리는 이부분과 관련된 이야기에 대해 불순하게 여기므로 여기서는 생략하고자 한다.41)
다만 우리는 1994년 1년간 『일제황민화교육과 국민학교』란 일본 책을 옮기면서 '순국선열유족회'가 발행하는 월간지 『순국』에다 이 '국민학교제'의내용을 일부 연재하고 있었다.
그런데 해를 넘긴 1995년 1월에 갑자기 김숙희 교육부장관고 토론하자는 연락이 왔다.
초청자는 국회에 청원한 대표들이었다.
그 사이에 박창희와 부산의'극일운동시민연합회'회장인 황백현42) 이 국회에 청원을 한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2월9일에 교육부 대회의실에서 김숙희 장관고 함께 약 2시간 동안 토론을 갖게 되었다.
참석자는 김남식, 이치석, 박창희, 황백현과 김숙희 장관을 비롯한 교육부의고위 관리들이었다.43) 이 자리에서 장관은 명칭 개정을 천명했는데, 그것이 나중에 『한국일보』에 1면 톱으로 보도되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그 기사 내용은 엉터리였다.44) 더구나 박창희는 황백현에게 "국민학교 교사가 무식해서 무엇을 알겠느냐?"면서 자기와 황백현 둘만 참석하는 것이 좋겠다고 제의한 바 있다.45) 우리는 그 후에 "죽쒀서 개 준"격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한국일보』가 정직하게 보도하지 않은 이유가 있다면 짐작건대 이성은의 오빠인 편집국장 이성주가자신의 동생을 위해 진실을 왜곡했다는 것 이외는 여지가 없다고 생각한다.
좌우간 그 후에 수 차례 회의가 교육부 관리의 사회로 진행되었는데, 아울러 이성은(이화여대 교수), 박인주(월드리서치 사장)가 박창희 모임 사람으로, 민주당 지역구 위원장(거창)한 사람이 황백현 모임 사람으로 여기에 참석하였다.
우리는 그대로였다.
문제는 학술 연구비 형식으로 교육부가 제공하겠다는 비용에 대해 앞의 두 모임이 서로 다투었다는 사실이다.
박창희는 1억5천만원을, 황백현은 2천500만 원을 요구했다.
우리 '씨알교육연구회'는 비용에 대해 전혀 요구하지 않기로 하였다.
한편 교육부의 홍보를 돕기 위해 협의회를 조직하기로 했는데, 그 대표로 김남식을 선정한 후에 총무 자리를 놓고 박창희측과 황백현측이 약 3시간을 다투었으나 결론이 나지 않아 우리가 자리를 박차고 나온 적이 있었다.
아마 교육부 지원비를 서로 많이 차지하려는 속셈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 후에 자리를 이화여대 이성은 연구실로 옮기면서 회의가 계속되었지만, 이번에는 박창희측의 이성은이 김남식 대표를 박창희로 교체해야 한다고 억지를 쓰게 되었다.46)
그러나 수 차례 회의에서 '씨알교육연구회'의 일관된 의지로 그 억지가 통하지 않자, 결국 우리의 의견대로 김남식 대표가 통합 모임의 상임 대표로 최종 확정되기에 이르렀다.
이 때 공동 대표로는 윤택중 전 교육부장관, YMCA회장,서영훈 경실련 이사장, 황백현, 박창희 등이었으며, 그 운영위원장에 이성은,부위원장에 이치석, 박인주가 결정되었고, 언론과 학계, 정계 관련자 등이 위원이 되었다.
이것이 1995년 4월1일, 흥사단 강당에서 발족한 '국민학교명칭개정 전국협의회'조직이었다.
이 날 연사로 한상범(국대, 법학)교수 등을 선정하고 행사 진행에 관한 모든 협의는 주로 나의 의견을 따랐다.
그런데 우리는 곧 여기서 탈퇴하기로 결심하고 말았다.
그 까닭은 이렇다.
이 4월 1일 의 행사를 위하여 처음엔 박창희, 이성은이 한국외국어대학교와 이화여자대학교 학생들을 동원하겠다고 자청하였다.
그러나 학생 동원이 불가하다면서 갑자기 초등 교사를 동원해 달라고 요구하는 것이었다.
물론 우리는 일언지하에 거부하였다.
그럴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이성은은 정말 어처구니가 없는 제안을 하였다.
박창희와 이성은이 제안한 것은 100만 원 사용에 대한 동의였다.
그런데 그 100만 원은 행사장에 동원하기 위핸 '태평양 유족회'부녀자100명의 점심값이라는 것이었다.
지방에서 버스로 동원한다고 했다.
우리가 이에 격분하자 그럼 50만 원으로 할인해 볼 테니 그것이라도 허락해 달라는 것이었다.
너무 한심했다.
그것이 '전국협의회'를 조직하고 나중에 교육부의 협조로 KBS TV 범 11시 종합 뉴스 시간에 나와서 명칭 개정을 역설한 이성은의 본모습이었다.47)
우리는 더 이상 생각할 여지가 없었다.
맨 처음의 순수한 의지가 완전히 훼손된 것을 안타까워할 뿐이었다.
1986년 5월 15일의 함석헌 선생 유지가 처참하게 망가지고, 3천 명의 현직 교사와 교육대학의 예비 교사들이 서명하여 5천 181명의 이름으로 1993년 10월26일 국회에 청원할 때의 그 순수한 정성이 무너지던 순간이었다.
끝끝내 우리의 자존심을 짓밟으려는 파렴치한 지식인들의 행태에 대해 이제 깨끗이 정리하기로 하였다.
"우리 이름을 허락 없이 함부로 쓰면 가만 두지 않겠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이 '국민학교'명칭 개정은 남의 일이 된 것이다.'협의회'에는 교육부 관리가 참석하였고, 언론에는 마치 명칭 개정 모임이 새삼 처음인 것처럼 보도되었다.48) 우리 언론의 현주소가 어디에 있는지 알 만하였다. 그 얼마 후 5월『한국일보』엔 명칭 개정 공청회'가 열렸다면서 몇몇 인사의 발언이 소개되었다.
그 중에 하나가 당시 서성옥(서울가동초등학교 교장) 전국초등교육자협의회 회장의 발언이었다.
"명칭 개정 문제는 초등 교사들이 나서야 한다."
우리는 웃었다.
아니 슬펐다.
그는 우리가 서명 운동을 할 때 중부 교육청 교육장이었는데, 그 서명 운동을 주동하던 내가 중부교육청 소속의 학교에 근무하면서 몇 차례 조사를 받은 바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협의회는 그 후에 별다른 활동이 없다가 돌연 박창희의 구속으로 물의를 빚었으며, 김숙희 장관도 얼마 후 국방대학원 강연 내용 때문에 사퇴하고 박영식 연세대학교 교수로 교체되었다.
박영식 장관은 1995년 8월13일 '국민학교'개정을 공식 선언하였고, 이어 취임한 안병영 교육부장관이 1996년 3월1일자로 '초등학교'명칭 개정을 시행하였다.
즉 '초등학교'로 개칭될 때까지 오병문, 김숙희, 박영식, 안병영 등 4명의 교육부장관을 거친 것이다.
'국민학교' 사라졌지만
그리하여 이제 '국민학교'는 한국 교육사에서 사라졌다.
아니 1996년 3월1일부터 우리 나라 모든 학교으 문패에서 영원히 사라지고 말았다.
명칭 개정이 이루어진 후에 박창희는 북한 노동당에 입당한 혐으로 국가보안법에 걸려 구속되었다가 1998년 3월 특별사면으로 풀려났다.
그는 검찰에서 무기징역을 구형받았지만, 이 명칭 개정에 헌신했다는 이유로 정상이 참작되어 징역 3년이 선고된 바 있었다.
그러나 이 문제로 주번 제도와 애국 조회가 펄펄 살아 숨쉬는 현장에 있다.
그때 우리가 왜 그 이름을 고치자고 열을 냈는지 모르 만큼 지나간 일이 되었다.
솔직히 '국민학교'가 '초등학교'로 되었지만 남의 일로 여겨질 뿐이다.
상을 바라고 한 일도 아니고, 돈이나 시간이 많아서 한 일도 아니었다.
단지 아이들에게 일제가 남긴 '국민학교'란 이름으로는 공부를 시켜서도 안되고 졸업시켜서도 안 된다는 생각뿐이었다.
1)이글은 초등학교 개명을 위한 서명 운동 초기에 커다란 격려를 아끼지 않으셨던 한신 대학교 교수 김경재 박사님이 그 과정을 기록해 두어야 한다는 충고에 따라 쓴 것이다.
그 과정을 지켜보신 김경재 박사님은 이 일을 추진하는 우리를 보고 "돌격대 같았다"고 회상하신 바 있다.
그러나 게으름과 관련 자료의 분실, 시간부족, 서술 방법의 미숙 때문에 충실한 기록이 되지 못해 읽는 분들에게 송구스럽다.
아울러 초기에 순수한 마음으로 동참해 주신 3천 명의 현직 교사들을 비롯한 5천 181명의 모든 서명자 여러분들께 다시 한 번 감사 드린다.
2)'국민학교제'는 1937년 12월 10일에 일왕 히로히토에 의해 설치된 '교육심의회'(칙령 제221호, 교육심의회 관제, 1937.5.25.)의 작품이다.
이 회의는 1941년 10월 13일 해산될 때까지 모두 3년 11개월간 총회→특별위원회→정리위원회→내각총리의 순으로 진행되었는데, 실제로는 거꾸로 히로히토의 명에 의해서 내각총리→정리위원회→특별위원회→총회의 순으로 심의가 이루어졌다.
물론 비밀 회의였다.
이 때 총회 14회, 특별위원회와 정리위원회 230회, 자문에 대한 답신 17건, 그 밖에 건의와 요강 4건을 제출하고 막을 내렸다.
그 결과 1940년 1원 일제 문부성이 '국민학교제'를 공포하고 다음해인 1941년 2월 '칙령 제148호'로 공폼한 것이 이른바 '국민학교령'이란 것이다.
최근에 '국민학교'명칭 개정 과정에서 알려진 근거란 것도 바로 이 칙령뿐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빙산의 일각이었을 뿐이다.
이 심의위원회는 위원장을 포함하여 무두 66명으로 구성되었는데, 특정한 의제를 집중 심의하는 특별위원회 위원이 약 20~30명, 심의가 마무리되면 이를 정리하는 정리위원회 위원이 5~10명 이었다.
'교육심의회'는 1937년 1월18일~19일 이틀동안 일제 문부성이 의무 교육8년제에 따른 '소학교 교육 내용 개선에 관한 위원회'를 열어 협의한 것이 그 시초였다.
그것은 당시 문부성 장관 히라오(平生)가 11월6일 내각 회의에 제출한 '의무 교육8년제 연장안'에 따른 것이다.
그것을 오늘날 우리 말로 하자면 '세계화 교육'이라고 할 수 있다.
거기에는 "소학교 교육 전체를 통해서 황국민 정신을 일층 함양한다.
특히 수신, 국사, 지리,공민 교육에서 국체의 본의와 세계 속에서 일본의 지위를 알게 한다"(교육개혁안 제1항)고 되어있다.(이치석,「국민학교의 실체와 그 논리」,『일제황민화교육과 국민학교』,씨알교육연구회 편역,한울 1995,32~70쪽 참조).
3)일부 교육사에 히로히토의 '국민학교령'을 언급한 곳이 있기는하다.
그러나 거의 한두 줄에 지나지 않는다.
4)'국민학교제'의 유산엔 주번 제도, 애국 조회 등이 대표적이었지만, 그 밖에도 매월 학교 행사의 대부분은 이 당시부터 관해으로 굳어진 것들이다.
예를 들면, '아동 회의', '체위 측정','페품 회수' 들은 매월1일에 시행하였고, '학교 대청소', '월말 반성', '회계정리','소체육회','연수회'들은 월말에 이루어진 것들이다.
약 50여 가지가 학교 행사였는데, 대개는 교육의 본질과 관련이 없었다.(현상석,「교육 현장의 일제 잔재들」, 앞의 책,79~97쪽 참조).
5)실제로 언론에 알려지기 전에 우리가 '국민학교'라는 명칭을 고쳐야 한다고 주장할 때, 학교 현장에선 "미쳤다"거나 "좋은 이름인데 왜 고치느냐?" "쫓겨나려고 그러냐?"면서 비웃음과 냉소 이상의 시선을 받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6)'국민학교'명칭 개정을 주장할 때 우리가 가장 위험하게 생각한 것도, 일제 '국민학교'명칭만 고치면 도리어 그 관행들이 안전하게 존속할지 모른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그런 염려는 실제로 현실화되고 있다.
7)우리는 『씨알교육』둘째호(1992년 8월29일자)의 '편집후기'에서 "우리는 '국민학교'르 버릴 수 있는 방법을 전혀 몰라 답답한 마음뿐이었다"라고 써서 그때의 심정을 표현한 바 있다.
그 뒤 명칭 개정 운동을 사회에 처음 공식적으로 제기하면서 우리는 이 같은 심정을 다음과 같이 다시 한 번 토로 할 수 밖에 없었다.
"변화와 개혁의 소리가 높은 요즈음, 역사의 쓰레기인 '국민학교'를 지금도 버젓이 드러내 놓고 있는 우리 교육계의 현실이 너무 안타깝다.
우리가 『조선총독부관보』를 뒤져서 세 번에 걸쳐 연재한 '국민학교'의 기원과 그 내용들은 바로 오늘날 교육계의 양심의 현주소가 아닐까?"(같은 책,셋째호, 1993년 4월 19일자, '편집후기).
8)함석헌 선생은 1958년에 「새교육」이란 논설을 통해 이미 '국민학교'개정 문제를 제기 한 바 있다.
9)예를 들어, 민주당 정권에서 문교부장관을 지낸 윤택중 씨는 당시에 자기가 이 이름을 고쳐야 한다고 준비하다가 5.16을 맞이하여 무산되었다(「동아일보」,1995년4월)고 회고했으며, 또 아동 문학가 이오덕 씨도 『우리말 바로쓰기』에서 이 명칭 문제를 언급하였다.
그 밖에 일간지 '독자투고'란에다 개별적으로 호소한 분들도 있다.
10)『민중교육』지는 중등 교사들이 발행한 무크지였는데, 당시의 전두환 정권뿐만 아니라 군사 독재 치하의 교육 현실을 비판하고 있었다.
이들을 중심으로 '민주교육실천협의회'가 창립되고, 이어 현직 교사 중심의 YMCA중등교사협의회가 중심이 되어 1987년 10월에 '전국교사협의회'가 창립되었다.
그 후 1989년 5월에 이 단체는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을 발족시켜 오늘에 이르고 있다.
11)함석헌 선생의 축사를 나는 '씨알교육연구회'의 명칭 개정 작업으로 연결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나는 『민중교육』지 사건보다 1년 앞서 해직되었다가, 몇 명 안 되는 이웃 동료들과 함께 '씨알교육연구회'를 만들어 『씨알교육』지를 발행하고 있었는데,이 때 함 선생의 말씀을 듣고 그 첫 실천 운동의 하나로 「버려야할 국민학교」라는 글을 실었다.
이 글이 '국민학교'명칭 개정 운동의 실마리가 되었다.
이 후 '국민학교' 개정 문제와 관련된 일련의 과정에서 발표된 각종 문건들도 대부분 나의 손을 통해 나왔다.
당시 나와 함께 이 문제를 최초로 논의한 사람은 자신의 '반민족 행위'를 속죄하기 위해 지난 30년은 물론 장차 죽는 날까지도 '쓰레기를 주우며, 시대의 넝마를 주우며"살아 가겠다는 전직 교사 김남식과 현직 교사로는 권영배,신중찬,조영욱이었으며,서명 운동이 시작된 이후에 현상석이 가담하였다.
특히 김남식은 실제로 '국민학교'시대에 관한 산 증인이었기에, 이 모임의 대표로서 상징적 의미가 매우 컸다.
1996년 3월1일 교육부가 초등학교 명칭을 개정할 때까지 처음부터 이 운동에 일관한 사람은 전직 교사 김남식을 비롯하여 현직 교사로는 아쉽게도 필자인 나와 신중찬, 현상석 단 네 사람뿐이었다.
이들은 그 후 교육부가 태도를 바꾸고 소위원회가 구성되었을 때 참여하여 함께 논의한 바 있다.
12)1991년과 1992년에 전교조 초등부에 이 문제를 공식 제기했으나 완전히 외면당한 적이 있다.
그들은 "좋은 이름을 왜 고치려 하느냐?"또는 "그렇다 하더라도 그런 데 관심을 기울일 시간이 없다"고 하였지만, 그 후에 여론이 일자 서명 운동에 협조하였다.
13)우리 '씨알교육연구회'는 초기에 '씨알교육을 배우는 모임'이라고 불렀다.
14)우리가 이 명칭 개정 운동을 하는 과정에서 일본어로 된 모든 자료를 우리 말로 옮긴이는 그 대표였던 김남식이었다.
15)우리는 1993년 4월 15일 이 문제를 놓고 종각 근처의 한식집에서 격론을 벌인 바 있다.
그때 "국민학교 명칭을 왜 고쳐야 하는지 확신이 안 선다."는 의견도 있었고, 과연 개정 운동이 실효를 거둘 수 있을지도 의문 상태에 있었다.
실제로 그런 걱정은 서명 작업 초기에 각종 핀잔과 의심, 냉소, 무시, 비웃음으로 나타났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최종적으로는 우리 모두는 이 문제에 대해 끝까지 최선을 다하기로 약속하였다.
당시 참석자는 김남식, 신중찬, 이치석, 조영욱이다.
16)당시 자녀가 '국민학교'에 다니고 있던 우리는 적어도 우리 자식들이 '국민학교'이름으로 졸업장을 받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다짐했다.
17)당시에 우리 모습을 보고, 함석헌선생기념사업회 운영위원장을 맡고 계시던 김경재 (한신대 교수, 신학)박사는 "마치 돌격대 같았다"고 회고한 적이 있다.
돌아가신 안병무박사를 비롯하여 이 기념사업회 관련 인사들은 처음부터 선뜻 서명해 주셔서 우리에게 큰 격려가 된 바 있다.
18)초기 서명자 중에는 참여 동기가 여러 가지 있었지만, 그 중에서도 '씨알교육연구회'에 대한 깊은 신뢰와 애정으로 서명한 분이 적지 않았다.
이종엽(서울인왕초등학교 교감),김몽수(서울창천초등학교 교장),유근(서울전곡초등학교 주임교사)등이 그들이다.
19)이오덕은 처음에 '국민학교 이름 고치는 모임'으로 부르자고 했으나 그 의미가 명확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마치 우리가 '국민학교'이름을 마음대로 고칠 수 있는 자격이나 권한을 가진 것처럼 보인다는 것과, 또 예를 들어 '00국민학교의 00을 고친다는 뜻으로 오해될 수 있다는 점에서였다.
그래서 새삼 검토한 후에 '국민학교란 이름을 고치자는 모임'으로 정하였다.
그런데 우리가 국회 청원을 한 후, 약 한 달 만에 이오덕은 나중에 박창희와 함께 '국민학교 이름 고치는 모임'을 만들었는데, 그때 이름이 달라 서로 다른 단체라고 주장하였다.
20)'국민학교'명칭 개정 운동을 이오덕과 함께 하자고 제의한 사람은 나였다.
박창희는 사전 예고 없이 김봉우 소장이 소개하였다.
후에 내가 박창희를 두고 "세상에 이런 사람을 어떻게 소개할 수 있느냐?"고 불만을 터뜨리자, 김봉우는 "나도 그런 사람인 줄 몰랐다"고 말했다.
21)대표로 김남식이 선출되었다는 점은 여러 가지로 의미가 있었다.
그는 자칭 '민족반역자'였기 때문이다.
'국민학교'시절에 교원을 하면서 일제가 시키는 대로 학교에서 "일본어를 사용하지 않는 조선인 학생에게 벌을 주었다"는 것이 핵심이었다.
즉 한국 사람으로서 해서는 안 될 일을 했다는 것이다.
그것을 속죄하기 위해 지난 30여 년간 그는 종이 줍기를 해 오고 있다.
물론 그의 반민족 행위란 이완용 따위에 비한다면 실로 구우일모(九牛一毛)처럼 무시할 만한 일인지 모른다.
그러나 그에겐 일제 치하 교원 생활을 돌이켜 볼 때 지시에 따른 일본어 강요가 민족적 양심으로 보면 도리어 구우만한 무게를 지닌 것인지도 모른다.
따라서 일제 잔재 청산 문제가 끊임없이 제기 되는 우리 현실에서 그토록 철저하게 자신의 과거 행위를 반성하는 김남식의 자세는 앞으로도 법적인 책임 이전에 사회적. 도덕적 심판에서 하나의 시금석이 될 만한 일이라고 본다.
'씨알교육사상'의 이웃들은 그 점을 일찍부터 본받을 일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에, 그가 이 명칭 개정 모임의 상징으로서 대표가 된다는 것을 너무 자연스럽게 여기고 있었다.
그러나 그를 대표로 선출한 것에 대해 내심 불만과 거부 의사를 지닌 사람들이 있었다.
박창희가 그 대표적인 인사였는데, 그와 한마음으로 행동한 사람은 고문으로 승낙했던 남기범, 이오덕이었다.
좌우간 이 모임은 곧 분열하게 된다.
까닭은 '국민학교'교사의 사회적 신분과 김남식 개인의 참다운 겸손을 무식한 눈으로 비하해 보는 일부 지식인의 거만함 때문이었다.
가령 박창희는 "국민학교 선생이 뭘 아느냐?"는 말을 자주했고, "서명 운동은 무식한 방법이다.
김영삼 대통령을 만나는 자기 치니구에게 편지를 썻 전하는 것이 더 합리적이다"면서 수차례 강요한 적이 있었다.
일언지하에 거절하는 우리에게 그는 "어리석다"고 하였다.
한편 당시 간사로 조영욱이 임명되었으나 그 기능은 거의 수행하지 못했다.
그는 서명 운동 과정에서 장학사의 조사를 받고 학교장과 대립하다가 마치 "서명 운동을 한 것은 잘못했다"는 뜻으로 오해할 만한 사과를 하여 물의를 일으켰으며, 당시 새로 임명된 김숙희 교육부장관의 "명칭 개정불가"발언 직후91994년2월)에 스스로 이 모임과의 관계를 정리하였다.
22)『한겨레신문』에 기사 내용은 사진과 함께 나간 '특집 교육초점'으로, 현직 교사 120여명이 서명 운동에 돌입했다는 것, '발기취지문'의 내용, '국민학교란 이름을 고치자는 모임'의구성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한편 이오덕은 그 모임에 대해 불만이 많았다.
"전교조가 동원되지 않으면 안 된다", "전국민이 나서야 된다"면서, 우리 '씨알교육 연구회'가 중심이 된 이 서명 운동이 실패할 것처럼 여기는 것 같았다.
그래서인지 회의중 그를 대표로 모시자는 우리의 의견에 극력 반대했으며, 고문으로 모시는 것도 마지 못해 승낙하는 등 못마땅한 눈치가 역력하였다.
남기범, 박창희도 그 점에선 마찬가지로 보였다.
23)'씨알교육연구회'와 직접 관련된 보도와 행사들에 대해서는『일제황민화교육과 국민학교』,101쪼~103쪽 참조.
24)우리는 관련 자료를 복사한 홍보물과 함께 새 이름을 쓰도록 한 서명 용지를 돌리고 있었다.
25)반대자로는 특히 일선 학교 교장들의 반대가 심했다.
그러나 일부 교장과 교감 가운데는 여기에 적극 공감한 인사도 적지 않았다.
여기선 일일이 밝힐 수 없지만 그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 드린다.
'참교육학부모회', '정사협', '글쓰기연구회','경실련','민족미술협의회','초원봉사회','함석헌선생기념사업회', 그리고 강덕수(제주대),김치경(경희대),류인성(서울신서초등학교)그리고 전교조 해직 교사들의 수고가 많았다.
또 초기에 우리의 활동을 보도한 언론으로는 『한겨레신문』『노동자신문』,『뉴스메이커』,『한국일보』,『국민일보』,『세계일보』,『한국교육신문』,『중앙일보』,『동남일보』,『새교실』,『새교육』,등이 있었는데, 특히 시사 주간지『뉴스메이커』는 1면 톱기사로 보도하기도 하였다.
26)박창희의 언행을 몇 가지 예를 들면 이렇다.
"서명 운동은 무식한 짓이다.그것을 해서 어느 천 년에 고치려느냐?"
'김영삼 대통령의 부인이나 부친에게 사람을 놓아서 해결해야지 서명 운동은 미련한 짓이다."
"내 친구가 청와대게 가서 김영삼 대통령을 접견하는 데 그 때 가지고 갈 편지를 하나 써 다오."
이 한심한 내용들은 서명 운동을 주도했던 나에게 며칠을 두고 강요한 발언 가운데 일부이다.
물론 그는 일언지하에 거절 당하였으며, 그런 수준이 당시 '고치자'에 참여했던 이른바 고문들의 사고 방식이었다.
특히 우리가 7월 24일에 그의 연구실을 방문했을 때 건네 준 7월9일자 『중앙일보』기사를 읽자마자 몹시 불쾌한 표정을 지으면서, "나는 나대로 할 테니 여러분은 여러분대로 하라"는 결별 선언을 하였다.
그의 의식 속에는 우리 '국민학교'교사가 너무 무식해서 오직 하수인 노릇이나 할 존재로 보였던 것 같다.
27)이 날 강연회는 신중찬의 사회로 진행되었다.(그 내용에 대해서는 『일제황민화교육과 국민학교』참조바람).
『경향신문』,『세계일보』등은 김남식 대표의 인터뷰를 실었으며, 월간『우리교육』도 특집으로 다루었다.
28)김남식 대표의 「고백,내가 저지른 친일행위」는 이 강연회에서 가장 인상적인 광ㅇ경을 연출했을 것이다.
"나는 민족 반역자입니다"로 시작하는 그의 고백은 장내를 물을 끼얹은 듯 긴장감과 감동의 순간으로 쉽싸이게 하였다.
당시 '국민학교'에서 일본말을 하지 않는 아이를 야단 쳤다는 것이 전부였지만, 그는 30년이 넘도록 그 일에 대한 속죄 행위를 해 오는 터였다.
그 사실을 처음 공개적으로 엄숙하고 조용하게 밝히는 자리였다.
해방 48년 만에 나온 첫 고백이었다.
더구나 그 정도를 누가 친일 행위라고 믿는단 말인가?
일제 잔재 청산 문제를 말할 때, 이 자리보다, 아니 김남식 대표보다 더 진실되고 더 아름답게 이야기한 사람도, 할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김남식 선생이'국민학교란 이름을 고치자느 모임'의 대표였다는 사실은 그 사실 이상의 무게와 상징성을 지녔다고 하겠다.
이와 비교해 볼 때, 이오덕과 박창희는 단순함을 넘어 순수하지 못한 발언과 행동 때문에 지금도 불신감과 불쾌감을 지울 수 없다는 것이 우리의 생각이다.
돌이켜 보건대 일제 잔재 청산의 방법과 목적에 진지하게 접근하지 않고, 단지 개인의 명망이나 높이는 기회로 이용했다고 보기 때문이다.
29)그때 나와 김 아무개 비서 사이에 무척이나 거친 말이 오고갔다.
후에 우리는 김인영의원을 만날 기회가 있었다.
김 의원이 이 명칭 개정 문제를 자신의 의정 활동으로 삼고자 우리의 청원에 대한 소개 의원이 되어 주기로 했기 때문이었다.
그때 김의원은 자리에서 일어나 깊숙히 허리를 굽혀 우리에게 자기 비서의 언행이 잘못되었다고 정중히 사과를 했다.
김남식, 신중찬, 현상석이 그 자리에 함께 있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난 지금도 그 모독적인 언사만은 도저히 잊을 수 없는 일로 남게 되었다.
30)김인영 의원이 질문한 내용에 대해 그의 비서는 "근거가 있는 것이냐?고 도리어 질문 한 적이 있었다.
어이없는 일이지만, 김 의원의 질문은 우리으 서명 운동 기사를 읽고 이루어진 것인데, 그 당사자인 우리에게 사실 여부를 확인하는 것이었다.
나중에 국정 감사장에 참석했던 한 교육 관료는 우리와 접촉한 후에 이 부분과 관련된 김 의원의 질문을 듣고 속으로 웃었다고 하였다.
31)우리의 청원에 대해 김 아무개 비서는 "박창희 교수도 개명을 주장한다"고 하면서 그와 접촉하는 중이므로 우리와는 상관없다는 듯이 외면하였다.
32) 이 10월 26일은 김남식 대표의 선택,제의로 이루어졌다.
이른바 10월 유신과 박정희, 김종필의 5.16쿠데타에 대한 김남식 대표의 태도는 너무나 선명하였다.
따라서 우리는 이 제의에 즉시 전적으로 동의하였다.
당시 분위기로 보아 서명자 수를 훨씬 증대시킬 수 있었으나, 청원 날짜에 의미를 두자는 뜻에서 이 날까지만 서명을 받았다.
한 편 안병직 교수(서울대학교, 한국경제사)는 『한겨레신문』의 '더불어 생각하며'를 읽고 편지를 보내왔는데, 그 논리가 해괴하였다.
즉 '국민학교'명칭 개정에 자신도 찬성하지만,그것이 일제 잔재라는 이유라면 반대한다는 것이었다.
회신을 보내면서 서명지를 동봉했으나 그는 끝내 서명하지 않았다.
33)『동아일보』,『조선일보』,『세계일보』,『경향신문』,『한겨레신문』,『중앙일보』,『한국일보』,『문화일보』,『국민일보』,『서울신문』,『소년동아일보』,『소년조선일보』등중앙 일간지와 ,『한국교육신문』,『교원복지신문』,『뉴스메이커』,『뉴스피플』,『새교육신문』,『내일신문』,『여성신문』,『부산교대신문』,『시민의 신문』등 주간지,『새교실』,『우리교육』,『교육자료,』『반민족문제연구』,『순국』,『서울교련신문』등 월간지, 그리고 KBS, MBC, CBS, EBS, TBC등 방송이 이 사실을 보도하였다.
34)서명자 5,181명 중 1,200여 명이 53가지의 새 이름을 제시하였다.
'어린이학교'(604명,51.8%),'초등학교'(261명,22%),'소학교'(76명,6.5%)'으뜸학교'(52명, 4.5%),'기초학교'(47명,4%), '보통학교'(40명 3%),'새싹학교'(21명,1.8%),'첫걸음학교','꿈나무학교'등 기타(약 100명,6.4%)순이었다.
35)이 자리에서 김인영 의원을 만난 사람은 김남식,신중찬,이치석, 현상석이다.
36)소개 의원이 처음의 장영달 의원에서 김인영 의원으로 바뀐 것이다.
이 결과에 대해 장 의원은 적극 차넝을 넘어 그렇게 하도록 요구하는 입장에 있었다.
처음에 우리는 그런 요구에 대해 완강히 거부하였다.
그러나 그들 여야 의원들의 설득은 계속되었고,국회에 청원한 우리가 그 소개 의원의 의견을 무시하기는 정말 어려웠던 게 사실이다.
37)1995년 2월9일 김숙희 교육부장관과 토론한 이후에 이와 관련 회의가 교육부 소회의실에서 수 차례 열린 적이 있는데, 이는 이 때 서범석 과장이 나에게 들려 준 이야기였다.
사실 오병문 장관은 당시 국정 감사 기간중에 의원들의 질문에 대해 "검토하겠다"고 공식적으로 대답한 적이 있었다.
38)우리는 '국민학교'명칭 개정 서명 운동 과정에서 여러 사람의 도움을 받았다.
그 중에서도 정운현 기자의 도움이 가장 컸다.
이 『국민학교의 실천적 해설』이란 책말고도 그느 동경예술대학교 교수 장빈공(長浜功)의 저서『국민학교의 연구』도 제공했는데,우리가 일제 파시즘 체제의 교육 제도와 현행 우리나라의 교육 제도와 관행을 비교하는 데 정말 귀중한 자료였다.
이 책의 편집에 관여한 정운현 기자는 친일 문제 전문가로 『창씨개명』,『서울시내 일제유산답사기』등 많은 저서를 내놓았으며, 정기 간행물로 『친일 문제 연구』라는 무크지를 발행하고 있다.
최근엔 주간 시사지『미디어오늘』에「친일 광고 백태」라는 글을 연재하다가 『조선일보』와『동아일보』경영진의 항의와 압력을 받기도 하였다.(그 내용은 이 책에 「일제시대 친일광고,문민시대 친일문제」란 제목으로 실렸다).
39)이 책은 1940년부터 1944년까지 5년간 일본 교육계를 풍미하던 '국민학교'연구서 가운데 하나로 알려져 있다.
당시 '국민학교'관련 단행본만 약 500권이 넘었다고 한다.
우리는 이 책을 근거로 『일제황민화 교육과 국민학교』란 책을 출간하였으며,아울러 월간『순국에다 8회에 걸쳐 관련 자료를 연재하고 있었다.
40)그는 서명 운동을 시작하면서 자신의 신분을 이용하여 각계 저명 인사에게 편지를 보냈으며, 그런 명망가들이 나서지 않으면 이름이 고쳐지지 않는다고 하였다.
우리 현실을 행각할 때 일부 일리가 있다고 보지만, 그것은 우리의 서명 운동 성격과 처음부터 차이가 있었다.
또 그는 이오덕과 함께 우리의 국회 청원이 자신들의 모임('국민학교 이름 고치는 모임')을 결성(1993년 11월20일, 흥사단)하기 위한 준비 작업이었다면서 김남식 대표에게도 참여하라는 편지를 보냈고, 나에게도 연락이 왔다.
1993년11월19일 오후, 나는 박창희에게 "모든 명분과 모임의 직책은 박창희가 독점해도 좋다.다만 '국민학교'명칭 개정 운동은 힘을 합쳐서 하자" 고 제의했으나 ,박창희는 "이름을 고치기 위해 LA지부를 두었다"면서 몰상식한 말과 함께 거부하였다.
이사실을 함께 논의한 나와 신중찬이 경기도 과천으로 이오덕을 찾았는데, 이미 이오덕은 박창희와 약속한 상태였다.
따라서 박창희가 나의 제의를 거부한 것이다.
신중찬은 이오덕에게 "당신 같은 사람은 사실 만나고 싶지도 않고 만날 필요도 없으나, 김남식 대표를 생각해서 여기에 온 것이다" 라며 면박을 주었다.
이오덕은 박창희 중심의 '국민학교 이름 고치는 모임'의 발기문과 그 모임의 이름을 작성할 만큼 박창희와 일치된 행동을 보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씨알교육연구회'는 이후 서로 '국민학교'명칭 개정 운동을 한다면서 싸움하는 것처럼 여겨질까봐, 그 이상의 활동은 중단한 채 1940년 5월에 동경에서 출판된 『국민학교의 연구』를 우리 말로 옮기는 작업에 전념하게 되었다.
당시 박창희는 한국외국어대학교의 사학연구소 소장으로 재직중이었는데, 1993년 9월28일에 흥사단에서 여기에 관한공청회를 개최한 적이 있다.
자기 과목을 수강하는 대학 1학년 학생들 20여 명이 청중의 전부였다.
그때 박창희가 데려온 한 일본인은 "일본에서도 1947년에 이 명칭을 소학교라고 고쳤으니 한국에서도 고쳐야 한다"는 논조의 발언을 한 적이 있다.
참고로 박창희는 일본에서 소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를 졸업해서 그곳에서 학위를 받고 이화여대 교수르 거쳐 한국외국어대 교수로 있었다.
41)우리는『씨알교육』여섯째호에(1995년 4월19일자)에 「죽 쒀서 개 준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관련 사항을 자세하게 언급하였다.
42)당시 황백현은 부산시에서 민주당의 한 지역구 위원장을 맡고 있었다.
그의말을 빌면 자신은 박창희의 '국민학교 이름 고치는 모임'의 부위원장인데 따로 '국민학교'명칭 개정 운동을 벌이기로 했다는 것이다.
43)김숙희 장관의 사회로 진행된 이 날 회의는 교육부차관을 제외한 대부분의 실장,국장,과장 등의 고위 관리가 배석하였다.
그리고 명칭 개정의 실무 처리와 책임은 지방교육지원국장과 과장이 책임자로 내정되었다.
44)『한국일보』1995년 3월27일자 참조 이 사실은『한국일보』편집국장인 이성주와 관련이 있다.
그는 이화여대 초등교육과 교수 이성은의 오빠였다.
그리고 지금 '한국열린교육협의회'부회장을 맡고 있는 이성은 은 당시 박창희 모임의 부위원장이었다.
박창희는 그해 1월 중국 북경을 다녀온 후에 김숙희장관과의 토론에 참석했는데, 그 자리에서 있었던 일을 자신의 업적으로 만들기 위해 고의적이고 편파적으로 기사화하는데 이성은과 모의했던 것이다.
그러나 참고로 교육부 토론회에서 있었던 일을 소개하면 박창희 모임이 얼마나 한심한 집단인지를 똑바로 알 수 있을 것이다.
1995년 2월9일 오후 2시, 교육부 대회의실(교육부 장관과 10여 명의 교육부 고위 관리)에서 오간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김숙희 : 생략.(인사말과 명칭 개정에 대한 긍정적 발언을 했으나 확정적인 내용은 아니었다.)
박창희 : "국민은 좋은 말인데 '국민학교'는 잘못된 말이다.
장관과 나는 과거부터 알고 있었고, 또 우리 모임의 부회장이었지 않느냐?"
황백현 : 전국 여론 조사를 해 보니까 고쳐야 한다고 하더라.
그 비용은 교육부가 대 주는 것이 좋다.
즉 여론 조사 비용과 선전 활동비다.
우선 우리가 전국 조직을 먼저 만들어야 한다.
김남식 : 나는 죄인이다.
나는 '국민학교'이름 고치기를 주장할 자격이 없다.
그러므로 자세한 것은 여기에 있는 이치석 선생과 협의하는 것이 좋겠다."
이렇게 약 10분 가량 인사를 겸한 말들이 오간 뒤에 토론 과정은 주로 나와 교육부실.국장 사이에서 이루어졌다.
그들이 묻는 것은'국민학교'가 일제 잔재라 하더라도 과연 고칠 필요가 있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이 날 내가 제공한 약 40쪽 가량의 자료를 일고 난 후에 어느 실장은 이렇게 질문을 하였다.
교육부관리 : "지금 선생님이 제공한 이 자료가 사실입니까"
이치석 : "예,그것은 바로 일본에서 출간된 것을 옮긴 것입니다."
교육부 관리 : "언제 나온 것입니까?"
이치석 : 1940년 5월에 나온 것인데, 지금 드린 것은 그 일부입니다."
교육부 관리 : "그게 사실이라면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양측의 열띤 논쟁이 계속되었으나 박창흐는 거의 말이 없었다.
다만 황백현만은 여론조사 문재로 명칭 개정 문제가 선전 비용과 선전술에 있는 것처럼 주장할 다름이었다.
이에 결론을 내리자는 입장에서 내가 언성을 높이며 강조하였다.
이치석 : "금융실명제도 예고가 없었다.
이미 '국민학교'가 일제 잔재란 사실을 알았다면 교육ㅇ부는 즉시 시행해야 한다.
벌써 50년이 지났다.
무슨 토론을 더 이상 할 필요가 없지 않느냐?
그런 의지가 없다면 도대체 이 논의가 무슨 소용이 있느냐?"
김숙희 : '좋다. 고치겠다.
방법과 절차상 어려움이 있으니 여러분들이 도와 주었으면 좋겠다.
거기에 드는 비용은 교육부가 제공하겠다."
이 말이 결정적인 선언이었다.
약 1시간 30분간 토론이 진행되었고, 이어 약 40분간 실무자들과 의견 교환이 있었다.
여기에서 학술 연구비조로 2,000만 원을 제공하겠다는 약속과 함께 그 신청서를 받았다.
동시에 지방교육지원국장 책임 아래 모임이 만들어졌다.
나를 비롯한 신중찬, 현상석이 교육부 소회의실에서 교육부 관리가 배석한 채 박창희, 황백현과 함께 몇 차례 실무 회의를 가진 바 있다.
그런데 이것을 마치 박창희가 단독으로 장관과 담판한 것처럼 보도했던 것이다.
실제로 그 자리에서 박창희가 한 발언은 모두 5분을 채 넘지 않았을 정도였다.
45)이는 김남식이 황백현에게 들은 말이다.
46)이성은은 그의 연구실에서 수 차례 나와 격론을 벌였다.
결국 이성은,박창희,박인주,황백현측은 김남식을 전체 대표로 확정하는 데 동의하였다.
그러나 또 며칠 후에 이성은, 박인주 등은 경실련 이사장이자 전KBS사장인 서영훈을 대표로 하자면서 번복할 것을 요구하였다.
역시 나와 몇 사람이 이를 비판하며 김남식을 고집하자 그들은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
또 이성은은 공청회를 열자면서 그 심부름을 우리 모임에서 맡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다시 격론을 벌여 우리 쪽에서 공청회 무용론을 주장하며 더이상 논의 불가와 교육부 협조를 거부하자,
그들은 마지못해 자신들이 할 테니 공청회 비용이나 승인하라고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이런 일련의 회의 과정에서 박창희는 언론에 또 한 번 자기 이름으로 기사를 냈다.
3월27일자 『한국일보』기사에 대해 우리모임과 황백현측에 정식으로 사과하고, 그 재발 방지를 약속한 후였다.
47)이성은은 당시 교육부장관이 이화여대 출신이란 점을 내세워 친분을 과시한 적이 한부 번이 아니었다.
1995년3월 어느날, 우리가 세실 레스토랑에서 박창희를 포함한 인사들과 회동할 때 "나는 지금이라도 김숙희 장관과 통할 수 있다"는 등의 발언을 하며 자신과 가깝다는 말을 강조하기도 하였다.
48)우리가 교육부의 요청으로 회의에 참석했을 때였다.
교육부가 제공하겠다는 비용문제로 논의가 순조롭지 않자 우리는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순간 실무 책임자였던 서범석 과장이 맨발로 우리를 따라 나온 적이 있었다.
그때 다시 붙잡혀 참석하면서 이렇게 지적하였다.
"우리는 명칭 개정을 국회에 청원하였다.
또 장관마저 개칭하겠다고 하지 않았느냐? 따라서 교육부는 시행만 하면 된다.
어떻게 해서 국회에 청원한 우리를 교육부 하수인으로 부리려 하느냐? 매우 의심스러운 행위 같다."
그것은 국회의 김원웅 전의원(대전)이 이 문제를 강력히 제기하자, 교육부가 개정 의지가 없이 불가피하게 선택을 요구받았던 것이다.
동시에 이왕 개정해야 한다면, 이 문제를 최초로 제기한 초등 교사들보다는 저명 인사나 사회적 신분이 높은 인사들이 요구해서 해결하는 것이 모양새로는 좋았을 것이다.
즉 교육부의 봉건적 관료주의의 행태가 작용했다고 여겨진다.
따라서 박창희측의 비이성적인 작태를 알면서도 교육부는 이런 협의회를 지원했고, 결국은 비열하게도 교육부가 처음부터 이 문제를 스스로 처리한 것처럼 알리려고 했던 것 같다.
이내용은 이치석의 "어린 종달새의 죽음"에서 발췌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