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김준엽

광래 2011. 6. 8. 09:00

 

 

김준엽 그는 누구인가!!! 

 

1920년 8월 26일 평안북도 강계군 시종읍에서 부유한 사업가 집안의 4남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신의주동중을 졸업 후 일본 게이오대학 동양사학과에 입학한다.

 

2학년 때 학병 강제징집으로 학교를 중퇴한다.

 

1944년 일본군의 학병으로 징병되었으나 일본군을 탈출(학병탈출 1호)하여 장준하 등과 6000리 길을 걸어 중경(重慶) 임시정부에 합류했다. 

 

그는 일본군을 탈출한 최초의 학도병이었다. 

 

중국유격대에 참가, 항일운동을 전개했고 중경 한국임시정부에 참가했으며 광복군  (이청천 장군 부관, 이범석 장군 부관)으로 활동했다.


일본 패망 후 귀국을 미룬 채 중국국립중앙대학 대학원에서 중국사를 연구하면서 남경의 동방어문전문학교에서 한국어를 가르쳤다.

 

1949년 귀국한 김 전 총장은 고려대에서 아세아문제연구소와 중국학회 등을 조직, 중국학 연구와 독립운동사 연구의 기반을 닦았다.

 

당시 그로부터 배운 양통방(楊通方) 전 북경대 교수 등 제자들은 중국 내 한국학의 주류로 성장했으며, 1992년 한·중 수교 때도 기여했다.

 

또한 1960∼70년대 (제 16, 17, 29차)에는 UN총회에 한국대표로 참가했다.


1982년 고대 총장에 취임한 그는 전두환 정권의 압력으로 2년8개월 만에 강제 사퇴하게 된다.


이때 고대 학생들이 한 달 동안 '총장 사퇴 결사반대' 시위를 벌였는데 김 전 총장은 "평생 많은 훈장을 받았지만 그때 학생들의 시위를 최고의 훈장으로 여긴다"고 밝히기도 했다.

그의 학자로서의 '꼿꼿함'은 정치의 탁류(濁流)에 한 번도 몸 담그지 않은 데서 드러난다.

 

그는 자서전 '장정(長征)' 4권에서

▲1948년 이범석 장군의 영입 제의

▲1960년 장면 내각의 주일대사 제의

▲5·16 이후 김종필의 공화당 사무총장 제의

▲1974년 박정희 대통령의 통일원장관 제의 등을 물리친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특히 1988년 1월 초 궁정동 안가에서 노태우 대통령 당선자(당시)로부터 국무총리직을 제안받는 자리에서 5가지 이유를 들어 고사한 일화는 유명하다.

 

그는

첫째, 노 당선자를 그동안 두 번 만났지만 잘 모르고

둘째, 새 헌법에 따라 전두환씨가 국정자문회의 의장을 맡게 되는데 총칼로 정권을 장악하고

        많은 사람을 괴롭힌 그에게 내 머리가 100개 있어도 숙일 수 없고

셋째, 지난 대선에서 야당 후보자에게 투표한 내가 총리가 되면 야당을 지지한 66%

         국민의 뜻에 따라야 하는데 그 뜻을 이루기 어렵고

넷째, 민주주의를 외치다 투옥된 많은 학생들이 아직도 감옥에 있는데

         그 스승이라는 자가 총리가 될 수 없으며

다섯째, 지식인들이 벼슬이라면 굽실굽실하는 풍토를 고치기 위해 나 하나만이라도 그렇지 않다는

           증명을 보여야 한다"며 노 당선자의 이해를 구했다고 한다.

 

대학 총장 자리를 출세의 징검다리쯤으로 여기는 일부 '정치 학자'들을 부끄럽게 만들고, 돈과 권력을 향해 부나비처럼 뛰어드는 요즘 세태에 경종을 울리는 사례이다.

 

고려대 총장 퇴임 후 그는 1989년부터 다시 중국을 찾아 북경대·복단대·절강대 등에 한국학연구소 설립을 지원했다.

 

또 상해와 중경의 임정청사, 상해 윤봉길 기념비, 항주의 고려사(高麗寺) 등의 복원과 설립을 주도했다.

 

2001년 완간한 '장정' 5권에 대해 박명림 연세대 교수는 "한 공동체의 지식과 문화를 어떻게 높이는지를 보여주는 우리 시대의 전범적 행록"이라고 평했다.

 

정부에서 국민훈장모란장, 독립운동유공표창, 건국포장, 건국훈장 등을 받았1992년 '중국어언문화우의장'을 수여받았다.

 

저서로 광복군 시절부터 자신의 생애를 정리한 총 5권의 ‘장정(長征·나남 펴냄)’을 비롯해 ‘중국공산당사’(1958년) ‘한국공산주의운동사’(1967∼1976년) ‘나와 중국’(1997년) 등이 있다.

 

 

대만 국립중앙대학 대학원 수학 후 미국 하버드대학, 하와이대학, 프린스턴대학에서 객원교수로 활동했다.

 

중국 항주대학, 북경대학, 요녕대학, 복단대학, 산동대학, 남경대학, 동남대학, 양주대학, 연변대학의 명예교수를 지냈다.

 

김 전 총장은 일제 강점기 학병으로 징집됐다 탈출해 광복군에 투신, 독립투쟁에 나섰으며 해방 이후에는 교육자와 학자로서 군사독재에 맞서며 해방 이후 국내 중국학의 문을 열어 `시대의 스승'으로 널리 칭송받은 인물이다. 

 

유족으로는 부인 민영주 여사와 아들 홍규씨가 있으며 장지는 국립 대전 현충원이다.

 

2011년 6월 7일(화) 오전 10시 2분 별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