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레기를 주우며시대의 넝마를 주우

연재를 시작하면서

광래 2012. 1. 27. 1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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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를 시작하면서)

 

올해(1993년) 우리 나이로 일흔 다섯인 김남식(金南植)님은 오늘도 쓰레기를 줍고 있다.

 

벌써 스무해가 훨씬 지났으므로  그 일은 자연스럽게 하나의 미담이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날마다 그렇게 지내는 것보다 그것을 시작하기까지의 결심이 아주 어려웠다는 그의 마음을 바로 아는 이는 드물다고 본다.

 

그런 까닭으로 오랫동안 잠겨 있다가 조용하게 흘러나온 그의 이야기는 때로 새삼스런 긴장도 가져다 주었다.

 

북에선 반공주이자, 남에서 용공분자란 이름으로 각각 옥고를 치를 때도, 그에게 문제가 되었던 것은 특정한 정치적 이념이 아니었다.

 

스스로에겐 아직도 참된 '한국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마침내 어떤 지나간 일이 그의 양심 앞에 불리워 왔는데, 이른바 일제 치하에서 보냈던 교직 생활이었다.

 

그것이야말로 어김없는 '민족 반역자의 행위'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두고 두고 생각한 끝에 최소한의 속죄행위를 하기로 했다.

 

그 옛날에 그가 버렸다고 믿는 쓰레기를 줍는, 동네의 '넝마주이'가 된 것이다.

 

오늘날, 이와같이 자기 확신에 따라 혼자 실천하는 일은 과연 아무런 뜻이 없는 걸까?

 

있다면, 그의 양심을 때려왔던 그의 과거와 그의 과거 속에 스쳤었던 시대의 이야기는 우리 현실에서 무엇을 되묻고 있는 걸까?

 

물론 이것은-일제치하, 8.15전후, 6.25, 자유당시절, 4.19교원노조, 5.16에서 10.26사이 그리고 5.17 직후까지-한국 정치사의 격도기를 한 사람의 교원이 자기의 현장에서 정면으로 겪었던 아주 소작한 일상 생활사에 지나지 않는다.

 

참고로, 이 이야기는 주로 1986년 여름 약 일 주일에 걸쳐 당시 해직교사였던 이치석(李致錫) 등에게 들려 준 것이다..

 

            김남식(우) 이치석(좌)

 

'씨알에 돌아가는 태도'를 생각하면서, 여러가지 서투름 속에서나마 그의 목소리를 꾸밈없이 싣고자한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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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칭 민족 반역자가 되기까지-

 

(50년 만에 만난 선배)

 

*선생님 스스로 민족 반역자라고 그러시는데 그게 일제시대의 교직경력과 관련이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먼저 그 때 교사가 되기까지 학생 시절의 말씀부터 듣고 싶습니다.

 

서당도 다니셨다고......

 

서당도 1년인지 2년인지 다니고,

 

그 다음에 정규 보통학교가 아닌 동네에 있던 삼락학원에서 4년을 마치고, 그 담 외갓집 근처에 있었던 공립보통학교를 4학년부터 6학년까지 다녀서 졸업한 뒤에 한 2년 쯤 쉬었습니다.

 

그러다가 중학교에 들어갔어요.

 

저 항승이란 데가 함경남도 도청 소재지거든요.

 

거기 사립학교인 함흥영생중학교라는 저 기독교 계통의 학교예요.

 

국민학교 졸업하던 해는 쉬고, 그 다음해 입학시험을 봤는데 떨어지고 그 다음해 역시 또 떨어졌는데, 그 때는 보결편입이란게 있었어요.

 

그래 학교 졸업한 뒤 2년이 지났기 때문에 또 한 해 넘어가면 나이도 너무 많아서 힘들 것 같아서 내 선친께서 보결 시험준비를 하는 것이 좋겠다고 결정하셨습니다.

 

마침 영생 학교의 한 학생이 가까이 있어서 그 학생한테 우리 선친께서 부탁해가지고 시험 준비를 하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몇 학년에 들어가셨습니까?


그 때 광주학생사건 무렵이라 전국적으로 학생 운동이 있지 않았어요?

 

그 학생이 대구사범에 다니던 학생인데,

 

거기서 문제가 있어 가지고 쫓겨난 학생이예요.

 

그래서 뒤를 따라 다니던 기관원 때문에 공부하고 싶어도 못하는 거지요.

 

그런데 몇 해를 쉬다가 마침 함흥 영생에 그런 보결 시험이 있다는 걸 알고 응시해서 4학년에 들어가 제가 만났을 때는 5학년 학생이던 때지요.

 

1, 2 학년은 보결 시험이 없어서 3학년 시험을 보기로 했습니다.

 

그래 3학년 책을 빌려다가 시험 준비를 하느라고 하지만 그게 제대로 되겠어요?

 

그러면서 원서도 냈고 시험도 보고 그랬지요.

 

그래 어느 정도 봤는지를 알고 있을 게 아니겠어요?

 

         김남식의 아버지(우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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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두 발표한다는 날은 혹시 또 뭐 되지 않을까 생각도 해보고.....

 

발표한다는 시간도 있고 한데 가서 볼 용기도 없고 그래서 집에 그냥 있었지요.

 

그랬는데 동네 아이들이 밖에서 내 이름을 불러요.

 

학교에서 날 찾는다는 거예요.

 

그래 교무실이 아니고 어느 무슨 회의실에 들어가니까 선생님 몇 분 빙 둘러 앉으셨고 아마 무슨 사정을 하는 모양이지요.

 

그 중 한선생이 너 이번에 시험 본 성적이 그렇게 좋지 않은데 너 그실력 갖고 다니기가 힘들텐데 하면서.....

 

3학년 시험을 봤지만 2학년에 다닐 생각이 없느냐구 그래요.

 

그 말씀만 들어도 고마운 일인데 난 또 엉뚱하게 '제가 아주 짧은 기간 동안 준비했기 때문에 그렇게 밖에 안됐는데 합격만 시켜주면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러니까 그러면 좀 나가서 생각해 보라구.

 

그러나 나가서 생각해 보나마나죠.

 

가르쳐 준 선배하고 의논하니까 안된다고 그러겠어요?

 

너무 고마운 일이죠.

 

*2학년에 들어가라고요?

  

예. 그래 2학년에 들어갔어요.

 

그 때니까 그런 길도 있었지요.

  

*그 선배 덕분에....

  

내가 그렇게 들어간 게 참,

 

시험은 형편이 없는데 그 학생이 그렇게 전년도에 들어온 학생이고 보니,

 

보나마나 내 실력은 그 학생도  짐작했을테고 하니까 그 은사들을 찾아다니면서 부탁을 했어요.

 

내가 이런 아이를 맡고 있는데 너무 짧은 기간동안 준비했기 때문에 시험 성적이 좋을 것 같지 않지만....

 

그 선배님의 힘으로 그렇게 된거지요.

 

*그래서 그 분이 선배가 된 거군요.

 

그 선배가 제 은인이잖아요?

 

그 분은 경상도 분이고 난 북쪽 사람이고,

 

그렇기 때문에 헤어진 뒤로 몇 번 서신은 있었지만 그 뒤에 3.8선이 생기면서 48년에 월남 한 뒤로는 소식을 모르게 됐어요.

 

그러면서 여기로 넘어와서도 내가 은인을 찾지 않고 이렇게 있구나'하고 자책을 했지요.

 

맨 좌측(손위처남 박도병 경상대교수)좌에서3번째 김남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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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늘 안동 사시는 분이라고 이야기하는 그 분이예요.

 

박태숙 이라는 분인데 그 분을 만났어요

 

* 지난 번에 만나셨다는....

 

예. 내가 북쪽에 있을 때부터 기억하고 있는 주소,

 

안동군 월곡면 가류동,

 

 4.19 때 같이 교원노조하던 조 영 진 선생님처럼 대구사범을 나온분을 만나면 '그런 분을 모르는가' 그렇게 애를 많이 썼지만 만나지 못하다가 지난 번 만나서 아, 이렇게 은인을 .... 내가 죄를 지었다 사과두 하고 그랬지요.


*어떻게 만나셨습니까?


(중략) 마침내 우리집 아이를 데리고 어느 일요일 청운동 동사무소에 가서 옛날의 기록들을 좀 들춰서 지금 강남에 사시는 것을 확인했어요.

 

전화번호두 알아 가지구 전화두 걸면서.....

  

* 얼마 만인가요?

 

50 년 만에 음.....전화를 하니까 그 사모님이 받더군요.

 

그런데 지금 목욕중이라고.

 

그래서 30분 뒤에 다시 거니까 전화를 받더군요.

 

"전에 박 태 숙이라고 부르시던 박 관 숙 선생님이십니까?

 

저는 한 50년 전에 함흥 영생을 졸업한 아무갭니다"

 

그러니까 깜짝 놀라면서 "아, 그 때 보결에 들어 갔던 아무개냐구?"

 

허허허..... 그러면서 약속을 해서 그 다음 날 다방에서 만났지요.

 

그래 참 그동안의 일을 사과두 하구 하하하.

 

*요즘엔 보기 드문 풍경 같습니다.

 

그런데 그 분이 함흥에 오시게 된 동기가 광주학생사건에 관련된 시위로 조사 받게 돼서 그 쪽으로 오셨다구 그랬는데....

 

김남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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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당시에는 그리 온 뒤에도 형사들이 요주의 인물로 연락이 되면서 늘 뒤쫓기는 그런 형편이었기 때문에....

 

또 형사들이 뒤쫓아 다닌다는 이야기 정도는 하면서 그 때 무슨 사건이 어쨌다 그런 이야기를 뭐 내가 어렸다구 그래서 그런지 직접은 안하구.......

 

다만 그런 사건 때문에 요주의 인물로 형사들이 뒤쫓고 있다는 사실만 알았지요.

 

*그래도 더러 보고 듣고 그러셨지요?

  

그 때는 전국적으로 그랬고.

 

내가 있던 집 학생두 함흥고보를 다니다가 또 전국(학생동맹)사태로 해서 퇴학당했던 사실도 있었습니다.

 

그 때 집에 있지 않구 다른 데 가 있었는데....그래 그 전국적으로 곳곳에서 퇴학을 당한 학생들이 많았던 것 같았습니다.

 

그 광주 학생 사건이 1929년이었지요?


* 예 29년 입니다.


29년이니까, 내가 입학시험을 준비하던 때는 5. 6년이 지난 뒤인데 그렇게 희생당했던 학생들을 보이기 위한 것이겠지만 좀 구제한다해서,

 

함흥 같은데서는 함흥고보 몇 해 전에 그렇게 제적되었던 사람들을 시험을 보게 한 일도 있었어요.

 

그래서 시험준비를 내가 있던 그 집에서 하는 그런 모양도 보았어요.

 

그런데 그런 걸 형식적으로 시험만 보게 하였을 뿐이지 그 학생들이 복교한 것 같지는 않아요.

 

(조 아바이와 체육 선생님)

 

*그 영생중학교는 함경도 함흥 지방의 유지들이 설립했습니까?

  

아니요. 캐나다 선교회에서 후원 받는 학교였지요.

 

개신교쪽 이었고.

 

아마 장로교인 것 같고....

 

그래서 교장선생님도 캐나다에서 온 선교사였고.

 

나중에 설립자가 되었습니다.

 

김남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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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생들은 그 때 얼마나 되었습니까?

 

1학년 부터 5학년 까지 갑. 을조 두 반씩 있었으니까  열 학급이죠.

 

학급당 한 50명 정도니까 약5백명 정도일 거예요.

 

함흥엔 사립학교로 영생중학교.

 

영생여자 중학교가 있었지요.

 

*그럼 선생님들은......

 

선생님들은 한 20명 전후였습니다.

 

그리고 우리 은사님 중에는 함 선생님과 같이 성서조선(聖書朝鮮)을 하시던 양 인 성 선생님이 계셨어요.

 

*예

 

양 인 성 선생님을 전 그 때 몰랐어요.

 

또 함 선생님도 해방 후에나 알았지 몰랐었구.

 

양 인 성 선생님이 함 선생님과 같이 '성서조선'을 같이 했다는 것두 84년엔가 부산모임이 있어서 함 선생님과 같이 갈 때 함선생님이 그런 말씀을 하셔서...

 

'아 아,  그 분이 우리학교에 계신 선생님이셨구나' 그런 정도로 알았지.

 

내가 영생에 다녔다고 그러니까 함 선생님이 "양 인 성 선생이 계시지 않았느냐?

 

"그런데 처음엔 얼른 생각이 나지 않아요.

 

나중에 생각해 보니까 맡은 과목이 달라서그런지 우리교실에 별로 들어오신 것 같지 않고,

 

학생들 간에도 이야기를 들은 게 없고,

 

그리고 조선어를 가르치신 조 정 우 선생님이 계셨어요.

 

우리가 4 학년 때 까지는 조선어과목이 있었어요.

 

5 학년 때 부터 없어졌어요.

 

5학년. 38년도. 그 때 우리 중학교에서 조선어 과목이 없어졌어요.

 

*전국적으로 없어졌나요

 

아마 그렇겠지요.

 

지시에 의해서 그렇게 된 거니까.

 

그래서 조 선생님이 물러나야 될 형편 아니예요?

 

그래서 저 함경도 사투리인데 '아바이'.

 

노인을 '아바이'라고 해요.

 

여기 더러 '아바이 순대' 그러는거 있잖아요?

 

성이 조씨니까 조아바이 그러는데 저 다른 일도 할 수 없어서 학교 안에 판매부를 새로 만들어 그것을 경영하셨어요.

 

 

제자들과(김남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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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 생각이 학교 변소에 국민학교도 그렇지만 직원용 한 쪽에 막아놓고 뭐 일반용 이렇게 따로 있지 않았어요?

 

그런데 조 선생님은 그렇게 그 직을 그만 두신 뒤에 판매부를 경영하실 때면 변소에 가셔서 직원용 변소에 용변을 보실만 한데 그렇지 않고

 

'난 이제 직원이 아니다.' 그런 생각으로 이쪽 가서 소변을 보시던 생각도 나고요.

 

그리고 저 갈릴리 교회에서 들은 이야기인데.

 

문 익 환 목사 어머님이 그 북간도에서 공부하실 때 그 조 선생님이 선생님이셨대요.

 

그러면서 그 조 선생님이 재직 시절에 독립운동가를 어떻게 연락하고 그런 말씀도 문 목사 어머니께서도 하셨어요.

 

우리가 학교 다닐 때는 그런 분인지 전연 모르고 지냈지요.

 

*그러니까 몇년 다니신건가요?

 

3년 반 다녔어요.

 

여름방학 지나고 9월부터 다녔으니까.

 

그래서 이 뭐 '국사'라고 그러지요?

 

우리나라 역사는 배우지 못했고,

 

일본국사- 풍신수길 (豐臣秀吉) 이야기라든가 만세일계천황(萬世一系天皇) 이런 것만 배웠지요.

 

1, 2 학년 국사(日本史), 3 학년 부터는 동양사,

 

그 다음은 서양사 시간이 있었는데 1학년때 부터 배우던 학생의 말이 서 창 균 선생님은 단원에는 없지만,

 

우리나라의 역사를 가르치셨다고 그래요.

 

*예


그런데 5학년 때 가을에,

 

함흥경찰서에서 5학년 전체인 100명을 일요일인데 아침 몇시까지 나오라는 명령이 있어서 간 일이 있어요.

 

그 까닭은 한 체육선생님이 어떤 사건으로 해서 검찰에 검거 되셨는데 평소의 학교교육이 학생들 한테 어느 만큼 영향을 주었는지 그걸 조사하기 위해서 학생 전원을 부른 거예요.

 

그래 그 시간에 나가니까 처음에 전체를 모아놓고 일본인 고등계 주임인가 하는 자가 여러가지 이야기를 하는 중에....

 

好餌之下에必有死魚라.

 

낚시질 하는데 좋은 미끼를 던지면 미끼가 좋기 때문에 반드시 희생되는 고기가 있다 그 말이지요.

제자들과 (김남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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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걸 체육 선생님이 써먹었다는 건가요?

  

체육 선생님이 아니고 경찰 간부의 훈시지요.

 

*그러니까 그 사건이 어떻게 된건가요?

 

그래서 음.....

 

아까 이야기 한 것처럼 평소 체육선생님의 이야기가 학생들한테 어느 정도 영향이 미쳤는가 그게 재판하는 것과 관계도 있지 않겠어요?

 

벌을 주기 위해서 하는건데.

 

한 사람씩 이렇게 마주 앉아서 그동안의 학교에서 일어난 일을 묻는 거예요.

 

그래서 내 차레가 되었는데 그 체육 선생님이 호랑이에 대한 이야기를 했는지 묻는 거예요.

 

어느 체육시간에 호랑이 이야기를 이렇게 하셨어요.

 

"어떤 사람이 호랑이를 우리에 넣고 기르는데 어느 날 그 주인이 밖에 나가구 아이들만 집에 있는 사이에 그 호랑이가 우리에서 뛰쳐 나와 아이들을 잡아 먹었다.

 

이것이 주인이 잘못한 것이냐.

 

아니면 호랑이가 잘못한 것이냐?" 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었느냐?"

 

그래, 틀림없으니까 뭐 "들었습니다."그랬구.

 

또 갑조 을조니까 뭐 갑조에서 안한 말씀이 있을지 모르지 모르니까 듣지 않은 것은 듣지 않았다구 그러구.

 

그래 뭐 돼지에 관한 이야기도 했다는데 그래서 들은 기억이 없다구.

 

없는 것은 없다구 그러니까 

 

"너희 학교는 마치 동물원 같구나!"

 

그러면서......

 

결국 그 체육 선생님은 무슨 생각이 있어서 또 믿구 그 교실에서 그런 이야기를 하는데,

 

그 참 감동깊게 듣는 학생은 감동깊게 듣는데 또 어떤 사람은 "아, 좀 거 사상이 나쁘구나"

 

이렇게 돼서 그걸 밖에다 옮겨 가지구,

 

결국 학교에서 되어진 일이 밖에 새어 나가서 경찰에 까지 알려져서,

 

지금 체육 선생님은 검거된 그런 형편이지요.

 

*그 체육 선생님에 대한 기억이 있으신지요?

  

그 분은 송 기 수 선생님인데 우리 학생 중의 한 사람은 재판 때 증인으로 나가기도 했어요.

 

*경찰측 증인으로요? 

 

김남식

 


1-13

경찰, 피의자를 불리하게 하기 위한 경찰측 증인인 셈이죠.

 

그런데 그 선생님이 기소유예인가로 나중에 그 때 그 얼마쯤 지나서 나왔어요.

 

경찰에서 그런 일이 있구 어느 만큼 지나서 한번 쉬는 시간에 운동장엘 나가 보니까 저철봉틀 밑에 그 선생님이 앉아 계세요.

 

주위엔 사람들이 없고 

그래서 우린 그 동안 참 고생도 하셨고 가서 인사라도 할려구 가까이 가려 하니까 멀리서 손을 저으면서 오지 말라고 그러는....그런 기억이 있어요.




* 그 때는 이미 전쟁 분위기였지요?

 

 

그래 그 땐 대동아 전쟁이라는 아직 미국과의 싸움은 아니고,

중국과의 싸움은 시작되었을 때에요.

 

그럴 때인데 학교에서도 이 저 목검체조라고 그래서 나무 칼 체조, 검도예요.

 

검도인데 체육시간엔 반드시 그걸 해야 되는때였어요.

 

체력을  단련하기 위해서 전력, 전력증강 중의 한 부분으로 칼 쓰는 연습이라든가  하여튼 그런 연습을 해야된다고 하는 지시가 있어서 하는 것이지요.

 

그래 선생님이 그 목검을 들고 교단에 올라서 가르치시면서,

내 자신이 잘못하는 것을 너희들한테 가르치려니....

 

그걸 뜻있게 듣는 사람은 아, 저게 무슨 말씀이다 하는 걸 알지요.


*체육 선생님의 그런 말씀을?


그렇지요.

 

아까 그 체육 선생님이예요.

 

아직 학교에서 물러나기 전에 그 평소에 있던 일을 내가 하는 얘긴인데 그래 뜻있는 선생님들이 계셔서 그런 뜻을 전하려고 해도 또 그렇게 그것 때문에 문제가 되어서 옥고를 치르고 하는 것이 그 때 형편이지요.


* 목검체조를 하시면서..... 

 

내가 잘 하지도 못하면서 너희를 내가 가르치다니 하시면서.....

하지 않아야 될 일을 내가 위의 명령이니까 하고 있다 그런 거지요.

 

그게 뭐 자기도 신나고 그러면 그런 말씀을 하시겠어요?

 

좀 신나게 가르쳤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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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시의 학교 책임자는 누구였습니까?

 

그 처음에 내가 입학할 때는 한국인 목사님,

김 관 식 선생님이셨어요.

 

4학년 때 그 교장 선생님은 당국의 간섭으로 교사직을 물러났습니다.

 

제가 입학한 당시에는 기독교 학교니까 조회, 예배조회를 해요.

 

그런데 5학년 때 부턴가는 교가두 응원가두 일체 우리 말로 불러선 안 돼구.

 

그 때 보이게 저항한 것이 바로 체육 선생님의 경우지요.


* 문제가 될 만한 것은 그 때......


글쎄, 우리 시절엔 그 '신사참배' 같은 게 많이 문제가 되고 하는데.....

 

일본신 '가미따나'에 모셨는데 교문에 들어와서는 그 신(神) 쪽을 향해서 경례를 해야 했습니다.

 

(감시하는 교사를 배치하면서.......)

 

*생각이 나시는대로 계속 말씀해 주시죠.

 

그리고  교가는 못 부르게 했고.

 

그런데 우리 졸업할 때 송별회때 이야기..

 

교가를 못부르게 했지마는 제지를 무릅쓰고 우리말로 교가를 불렀어요.

 

또 공립학교는 대부분이 일본사람이 교원이고 한국사람도 한 두사람이 끼여 있기는 하지만,

 

왜 사립학교 같은 데는 전부라고 할 수 있게 한국사람인데 그러니까 당국에서 보조라고 하면서,

그 감시, 감시교사를 배치하는 수가 있어요. 그래 그.....


* 감시하면서....


예, 그래 우리가 저 송별 동창회를 할 때도 그 일본사람이 그 임무를 띤 사람과 또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어서 한 두세명이 있게 되는데 다른 일본사람은 동창회 같은데 참석하지 않아도 그 임무를 띤 사람은 꼭 참석해서,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가 불러서는 안 되는 우리 노래를 우리말로 부르는 모양을 보고 그리고 위에다 보고 하고 그러겠지요.

 


1-15

* 참 더러운 짓입니다. 그 때나 지금이나.....

 

그리고 응원가도 우리말로 돼 있고.

 

그렇게 쭉 불러오던 응원가도 일본말 가사로 고쳐서 부르라고 했지요.

 

그 때 영어 선생님이셨던 백 석이라고 하는 시인이예요.

 

책도 있지요.

 

원 이름은 백기행(夔行)인데,

 

그 분이 일본말로 고쳐야 되겠다고 그러니까 일본말로 고쳤어요.

 

그래서 그것을 일본말로 고쳐야 했지만,

연습도 하고 그랬지만 우린 일본말로는 안부르겠다 해서....

 

고쳐놓고 연습도 하느라고 했지만 그 뒤엔 불리워지지 않았지요.

*그럼, 그 때의 교가의 가사내용은 지금도 기억하고 계시지요

 

가사? 

 

저...... 춘원 이광수 (李光洙) 작사인데, 

아 盤 龍 山, 함흥에 반룡산이란 산이 있어요

 

*가사 한 번?

*한번 불러 보세요.

(영생중학교 교가를 불러 봄)

아- 반룡산 우렁찬 큰 뫼즐-기

함마천 평천리를 달려나려

환할사 툭 터진 함흥의 벌판

이곳이 우리 모-굘세

영생 - 오래-살아라

주의 참 빛을 영원히

이 겨레에 비치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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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하하하.....

 

*2절까지 있습니까?

 

예, 2절까지 있어요.....

 

아- 우리의 할 일을 잊지말자

 

그 나라와 그 의를 이루어서

 

몸과 맘 큰 정신 기르자하여

 

(이하 1절 후렴과 같음)

 

*그런데 선생님, 그 학교에서 기독교 교육은 안 했습니까?

 

있었지요. 성경, 글쎄 2학년?  3학년 때는 성경을 하지 말래서 못했던 것 같구,

 

2학년 때까진 성경 시간이 한 주일에 한 시간 정도.

 

그러다가 가르치지 말라고 그래서 못했고, 3학년 때까진 조회, 이 예배조회를 한 주일에 한 번씩인가 보고 그랬는데 그 뒤로는 또 그것도  해서는 안된다 그래서 못했고.

 

(히틀러와 東條를 영웅이라던 선생도 있는데....)

 

*학교 다니실 때 교과목은 어떠했습니까?

 

그 때 일본말(국어라고 했지요). '영어' 그 다음에 저 '대수' 기하' '지리' '역사' '그리고 일반 이과. '물리화학', 또 '체육' '음악'미술' 그런 정도 였지요.

 

 그리고 고학년에 가서 '실업''상업''농업''공업' 이런 과목도 있었습니다.

 

*'국사'는?

 

국사라는 게 일본 국사지요.

 

*우리나라 역사는 전연 안 배우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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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요.

 

*선생님, 그럼 우리나라에 대해선.....

 

그래도 일본이 우리나라를 빼앗아 가지고 있다  그런 정도는 그저 알고 있었던 거지요.

 

*그런 걸 이야기 해 주는 사람도 없었고요?

 

그렇지요. 그리고 이 태극기, 태극기는 해방될 때 까지는 못 봤어요.

 

그런데 우리 5촌 아저씨 여기선 당숙이라고 그러지요?

 

아저씨가 나보다 2년쯤 위인데.

 

우리 동네에 삼락학원 숙직실에서 어떤 종이를 펼치면서 무슨 뭘 그려볼까 하다가 그냥 그만 둔 그런 생각이 나는데 그 아저씨가 태극기를 그려 보여 주려고 그랬던게 아닌가 그런 생각이 납니다.

 

또 40년도에 이 서울에서 박람회를 열고 그래서 전국의 국민학교 학생들을 기차편을 짜 가지고 와서 그걸 보는 기회가 있어서, 내가 근무하던 곳이 서울에서는 굉장히 먼 데인데 거기 아이들도 박람회 구경오는 차례가 되어서 저도 인솔자로 그 때 왔었어요.

 

그래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독립문에 가면 태극기를 볼 수 있는데 그 때는 누가 나한테 일러주는 일도 없었고,

(그것은 물론 나의 잘못이지요)

 

그걸 그래서 해방된 뒤에나 봤고....

 

그 전에 갓집이라고 하는 우리 외갓집에 가보면 방구석에다 이렇게 저 갓을 보관하기 위한 함이 있었어요.

 

그래 천장에 매달아지는데, 거기 태극기 무늬를 변형해서 그려 넣은 것이 있어요.

 

해방될 때 까지 태극기란 말을 들은 것 같지 않습니다.

 

*그러셨군요.

 

그리고 어린이날 모임을 하는 걸 경찰이라든가 당국에서는  막는 모양을 느꼈어요.



1-18

그래서 동네의 청년들이 주동을 해서 동네를 떠난 산골짜기 같은 데서 모인다거나  하는 것이 결국 일제에 반항하는 그런 정도로 알고 있었고.

 

*예......

 

'역사'를 가르치셨던 서 창 균 선생님이 어느 수업이 끝날 무렵엔가 무슨 질문이든지 해라 하는 그런 기회가 있었어요.

 

그 때 내가 질문한 기억은 그 일지사변,처음에 일지사변이라고 그랬지요.

 

중국과 저 노구교에서 시작된 건데 37년 7월 7일 인가.

 

서 선생님이 그런 그 나라를 빼앗긴 설음이라든가 이런 것두 좀 나올 수 있을 까 해서 하여튼 이런 여러가지

생각을 또 졸업할 무렵 되니까 그러셨는지,

 

"日支 事變이 언제 쯤 끝날까요?" 하고 제가 질문을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리고 또 어떤 선생님은 그 때 저 日獨 관계를 두고, 乃木大將-曰露 (내목대장-일로)전쟁 때 대장인데 전쟁 중 두 아들이 전사하고 明治천황이란 자가 죽은 뒤에 시를 읊고 자결을 한 자이지요. -이라든가

 

東條-육군 장군 출신으로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주범인데 종전 후 전범으로 총살당했지요-라든가

 

히틀러 같은 사람을 어떤 선생은 영웅처럼 훌륭한 사람으로 그렇게 선전하던 때에.

 

그런데 이 서 선생님은 뭐 그자식이라고 그렇게 말해요.

 

그 자식이 아무것도 모르면서 뭐 이런 거라고 길게 설명을 할 수 없고 짧게 그런  말씀 정도지만 듣는 사람이 어떻게 듣느냐....

 

참, 나는 6. 25때 부산 피난거리에서 한 번 만나뵌 적이 있는데 지금은 돌아가셨죠.

 

*그 시절 선생님은 무슨 복장이셨습니까?

 

학생은 교복이 있으니까 교복을 입었고.

 

그리고 아직 미일전쟁이 시작되기 전부터 아까 일지사변이 있으면서 '국민복 이라고 하는 것학교시절부터 있던 거예요.

 

무엇인가 단추를 채우고 뭐 군복이라고 할 수 있지요.

 

39년 발령을 받고 갈때 저는 검정의 학생복 같은 걸 입고 갔는데 나중에 국민복으로 맞춰서 입을 수도 있고,

사서 입을 수도 있고,

 

또 중학교 4학년 때쯤인가 이 단발령이.....



1-19

*단발령이요?

 

4학년 때쯤 있었어요.

 

학생들이야  다 머리를 깎았었지만 선생님들이야 그 때까지는 머리를 길렀었거든요.

 

*군인처럼?

 

다 빡빡.

 

*빡빡?

 

그렇지요. 하하하....

 

*그래 선생님들은 그걸 다 깍았군요?

 

학생들은 물론 다 깍고,

 

선생들도 당국의 강력한 지시니까 다 깍게 되는데 어떤 분들은 어느 만큼 버텼는지 모르지만  그런 분이 한 두분.

 

우린 사립이니까, 공립 같은 데는 그럴 수 없고, 저의 담임 선생님 물리를 가르치시던 선생님인데 그 전에 머리가 있을 때 모습과 깍아 놓으니까 아주 볼 품이 없지요.

 

그래서 만화 잘 그리는 학생들이 아주 이렇게 빛이 나는 것 같이 번쩍 번쩍한 게.....

 

그런 일도 있었고.

 

그 때 일본 안에서는 그렇지 않았고  그 南次郎(남차랑)  그가 총독이 되면서 단발령도 있고 그랬어요.

 

그러면서 그 뒤론 해방 때까지 머리를 깎는 뭐이였고.

 

(내가 교원이 된다면)

 

*그 때 등록금은 얼마였습니까?

 

글쎄 정확한 기억은 나지 않고, 그 때 보통학교 수업료라고 해서 80전?

 

80전 하던 기억은 있고.

 

33년 무렵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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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 한가마에 얼마씩 했습니까?

 

가만있자.....

 

모르겠어요.

 

우리 외갓집에서 4학년 때 까지 기차타고 다니고 그랬지만, 외갓집에선 농사를 지었는데, 이 저 무우를 농사지어 그게 아마 한 20리쯤은 되는 길이겠지요.

 

그런데 마차, 우차라고 하면 더 맞겠는지 끌고 가서 파는데 무우 하나에 일전,

 

하하하.....

 

일 전씩 받았다던 기억이 나네요.

 

그러나 잘 모르겠어요.

 

*기차 통학 하실 때 생각이 나십니까?

 

4학년 때부터, 사회 공부하면 이원, 철산이라고 배우지요.

 

우리 외갓집에서 거기가 멀지 않아요.

 

그래 차를 탄 것도 이원, 철산의 쇳돌을 실어 나르는 그런 차 뒤에 객차의 객실 하나를 달아 갖구 다니는데

함경선 본선의 지선을 타고 다녔지요.

 

여기 羅興이라는 데서 들어가는 찻길이 있고 그 다음 역에서 차호라는 항구까지 가는 객차로 6학년 까지 통학했어요.

 

그런데 무료에요.

 

1년짜리 패스예요.

 

학교에서 주지요.

 

*철강석 원석이라는 게 바로 그 쇳돌이군요.

 

그렇지요.

 

그 뭐 철산 근처에 근거지를 만들어 가지고 사는 인부들이 있었고, 또 이 쇳돌을 캐내면 그 선광리라 해서 잡석 같은 걸 깍아내고 그런 걸 부근 이웃 동네 부녀자들이 주로 하고, 굴속에선 남자 노동자들이 많이 하고 그랬겠지요.

 

*여학생은 많았습니까?

 

글쎄 여학생이 많지 않을 때예요.

 

이 저 왜정 때는 학급인원이 80명 정도예요.

 

그래서 한 사람두 더 할 수 없어요.

 

내가 보통학교를 졸업한 뒤에야 1면 1학교가 돼었고 그렇게 학교 수가 적었고 내가 다니던 학교는 80명 정원에 10명쯤이 여학생 이었어요.

 

귀했지요.

 


1-21

*거기 함흥엔 일본사람이 많았습니까?

 

많이 와서 살았지요.

 

철도라든가 그땐 무슨 금융조합이란 것도 있고,

무슨 관청이란 게 주로 많고 그랬지만....

 

*그럼 그 사람들의 자녀들도 학교에 같이 다녔습니까?

 

저 왜정 말기엔 더러 한국 학생과 일본 학생이 한데 있고 그랬지만

대부분 일본 사람들이 다니는 국민학교가 따로 있고 그랬어요.

 

저 이원군 같은 데도 이원군 전체의 일본 학생들을 모은 데도

그렇게 많지 않은데 아까 저 나흥이라는데 거기 일본 소학교라고 해가지고

따로 일본 사람만 가르치고.

 

중학교도 그 여기 서울고등학교도 일본인 고등학교잖아요?

 

그렇게 서울에서도 지방에서도 일본인과 우리를 구별해서 가르치고 그랬지요.

 

*하긴 일본인과 같이 학교 다닌 것을 자랑하는 사람도 있지요.

 

그런데 선생님께선 영생학교를 졸업하면서 바로 교원이 되신 건가요?

 

그 무렵에는 무슨 후배를 가르치는데 뜻이 있어서 꼭 이 길을 택하자 그런게 아니고,

당시에 들어가기 쉬운 데를 찾는 방법으로 그렇게도 생각한 거지요.

 

정말 직업에 대한 이야기는....

 

아까 4학년 때 우리 선친의 친구분 댁에 가정교사로 있었다는 이야길 했는데

점심을 싸가지고 다니지 못했어요.

 

지금 같으면 어떻게 했겠는지....

 

할머니가 집안을 다스리는 그런 집인데

20리 좀 안되는 거리를 다니면서 오랫동안 그렇게 점심을 못 먹으면서 

그 때도 교육할 그런 생각을 했던지....

 

내가 만일 교원이 된다면 지금 점심을 먹지 못하는

이런 점도 생각해서 내가 맡은 아이 들이

이런 형편이 돼서는 안 되겠지 막연하게 생각했던 것 같아요.

 

(황초령 넘어서 첫 학교로)

 

*그럼 교원이 되신 말씀을 해 주시지요.

 

참, 이 치질문제,



1-22

이  저  중학교 때부터 있어서 그것도 많이 원인이었을 거예요.

 

사범학교에서는 저 성병검사두 있다구 그랬잖아요?

 

건강검사라고 그러는데 치질도 그런 종류의 병이 아닌가.

 

그리고 만약 응시했다가 이 사실이 많은 사람에게 알려지게 되면

부끄러운 일이 아닌가 그런 것도 아마 작용해서 안 했던 것 같아요.

 

그래 3주 강습을 받고 아마 한주쯤 교생노릇을 함흥 그 제일보통학교에 가서 하고...

 

*그리고 바로 발령을 받으셨단 말이군요?

 

그렇지요.

 

그 교생실습이 끝나고 시험이 있어고,

그게 교원 시험이 있는걸 대비한 건데 3종 시험에 합격해야 발령을 받는 거지요.

 

*누가 발령을 내나요?

 

도지사지요.

 

*도지사는 누굽니까?

 

일본 사람이고요.

 

한국 사람이 한 둘 있었던가,

강원도 도지사가 누구였든가...

 

도지사가 한국사람 된 일이 별로 없을 거예요.

 

아, 그 때 3종시험 본 뒤에도 또 실기도 본다구 그래서....

 

한 시간을 여러 토막으로 짤라서 복도에 대기하고 있다가

한 5분쯤 지나면 나오라고 또 그 다음 사람이 하고...  그런 식으로...

 

*시험관은 누구인가요?

 

저 시학이라고 그랬지요.

 

지금은 장학사지만.

 

일본인이예요.

 

*3종이라고 그러면 2종, 1종도 있었다는 거지요?

 

있었어요.

 

여기 경성사범 연습과든가 그 본과 한 사람도 그렇겠지만



1-23

그 1종이 되고 함흥이라든가 대구라든가 지방 사범학교 졸업생은 2종이 되고

그리고 우리 같은 사람은 3종 시험 보는 그런 경우도 있고.

 

2종이나 1종도 있었고.

 

*이 강습과 연습과는 어떻게 구분되는 건가요?

 

연습과는 대개 사범학교를, 그건 저 경성사범에만 있었던 것 같고 2년?

그리고 강습과는 서울에도 있었는지 모르지만 지방 사범학교의 1년 과정이고.

 

*심상과라고 하는 것도 있지요?

 

본과를 아마 5년,

 

보통 저 일반 중학교처럼 그걸 심상과라고 그랬던 것 같고...

확실히 모르겠지만....

 

또 의숙이라는 건 그들 교육법에 교육기관이 아니라는,

 

내가 중학교 들어가기 전에 다닌 학원처럼 그저 개인 교육 기관이겠지요.

 

* 산속인가요?

 

산속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 부근도 해발 1000 미터나 되고.

 

5월 9일은 서울이나 함흥이 여름 같은 기분이 나는 땐데,

여름 복장을 하고 황초령이라고 하는,

여기 저 진흥왕 순수비가 서 있다는 거기예요.

 

거길 저녁 때 쯤 인가 넘는데 아직 겨울이예요.

 

그래 하갈이란 동네가 있는데,

거기 여관에 들어가 자고 그 다음난 아침이 되니까 눈이 와요 눈이.

 

그 쪽 강도 있고 그러잖아요 지도를 보면.



 1-24

*예

 

강이란게 함흥 근처에 있는 성천강이지요.

 

그리고 저 장진호라고 우리나라에선 맨 처음된 수력발전이 있는 부근이예요.

 

그 때는 1학년 40명,

4학년 40명 그런 복식을 맡았어요.

 

2학년과 3학년, 5학년과 6학년이 같은 반에서 수업하는,

그래서 그 교장도 담임을 해요.

 

교장까지 직원이 네 사람이고.

 

학생은 전부 320명쯤 이었어요.

 

*교장 교감 다.....

 

교감은 없고.

 

왜정 말기에 큰 학교엔 교감이 아니라 교두라는 이름으로 있었는데 처음엔 없었고.

 

그래 내가 있던 거기에 한 사람은 교장,

다른 사람은 훈도라고 그랬어요.

 

저 같이 3종 합격자는 촉탁교원,

그러다가 한 해 지난 뒤에 훈도라는 그런 발령을 받았지요.

 

*그럼 '교감'이란 것은 해방 후에 생긴 건가요?

 

그렇죠. 해방 후에 생긴 거지요.

 

*그 처음 가셨던 개마고원이 함흥과는 다른 풍경이었겠네요?

 

주로 농사를 짓는데 콩, 감자가 많고 귀리도 있었고 또 압록강의 지류예요.

 

그래서 나무 짤라서 뗏목을 만들어서 이렇게 보내는 거기 삼림 관계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그리고 저 아편 아편재배.....

 

*양귀비?

 

예, 양귀비.

 

그게 전매루 되서 허가를 받아가지고 경작을 해서 나중엔 경찰관 주재소에 바치고 그래요.

 

그걸 몰래 먼 산에다 해가기고 그렇게 어떻게 발각도 되고.

 

그래서 많은 수는 아니지만 어떤 때는 그 같은 부락에사는 몇 사람이 쫓기게 되는 그런

신세가 돼서 아주 하룻 밤 새에 어디로 가는지 모르게 그 학교 학생들까지 데리고 정처없이 가는 그런 수도 있고....

 


1-25

*가옥도 차이가 나지요?

 

그렇지요.

 

평지에선 초가집이 많잖아요?

 

그런데 저 장진은 기와가 통기와라고 하는 나무조각이예요.

 

나무로 널판지 같은 지붕을 얹어져 이렇게 놓고 이  아래서 쳐다보면 그 통으로 하늘이 보이는 수도 있어요.

 

우리가 처음에 학생들이나 동네 사람들 한테 얘기하면 저렇게 비가 새지 않을 까 걱정을 하면 그 사람들은 초가, 거기는 더러 초가집고 있고 그러는데 오히려 초가집이 그렇게 이렇게 되면 비가 새들어 떨어지지 않을까 자기들은 그렇게 생각한대요.

 

*재미있는 얘깁니다.

 

그런데 산촌이 잘 살지 못하드라는 느낌은 안 드셨나요?

 

역시 평지보다 못산다는 느낌이 들죠.

 

*거기 가실 때 혹시 버스타고 가셨습니까?

 

함흥서 지금  저 큰 버스도 아니고 택시같은 작은 차도 아니고 봉고차, 봉고차 정도라고나 할까,

그것보다 좀 작은 차일 거예요.

 

장진까지 그런 차를 타고 그리고 황초령 까지는 승합자동차라고 그걸 타고 넘어갔는데 날씨는 겨울이 되고.

 

*요금은 기억나세요?

 

잘 모르겠어요.

 

아까 저 박람회 이야기도 했지만 그 때 약 100명 정도 학생을 장진군에서 걷기도 하고 차도 타고 서울에 와서 이틀밤을 자고 돌아 갔는데 그 전체 비용이 110원 이든가 그런 계산이었어요.



1-26

* 그래 첫 인사는 어떻게 하셨습니까?

 

내가 그 저 일본 사람을 많이 접촉하는 학교면 그 때 부임인사를 일본말로 해야 하니까 이 어떤 말로 할까 생각했겠지만, 자신있게 그렇게 했을것 같지는 않고 그 뭐  말은 아주 짧게 잘 부탁합니다 정도로 했을 거예요.

 

그것도 중학교 까지의 생활이 일본 사람과 그렇게 뭐 책은 읽었겠지만 직접 대화하고 또 일본말로 많은 사람들 앞에서 얘기하는 그런 일은 없었으니까 아주 짧게 그렇게 된거고.

 

그리고 부임하던 때 춥던 이야기를 하고 그랬지만 그 때 그 전시땐데 '국민복' 이란것,

 

이 저 고등학생들 교복에 '쯔메', 우리말로 '쯔메에리' 라고 호크도 끼고 그러는거 있잖아요?

 

그런 걸 맟춰 입고,

 

모자 쓰는 게 상식두 같고,

 

어떻게 하고 가야 할까 생각 중에 그 중절모라는 게 있잖아요?

 

중절모,

 

그 하나를 처음 모자점에 가서 준비해 가지고 그리고 갔었어요.

 

중절모는 전쟁 전까지는 필요한 사람들이 대부분 쓰기도 하고  그러던 때인데 그 날  뒤로는 쓰진 않았어요.

 

그 뒤론 전투모, 공무원이라든가 이런 사람들은 다 전투모를 쓰고 '국민복'을 입고,

 

그리고 점점 더 일지사변이 시작되던 해에는 '각반'이라고 하는 것도 차고 다니고 했어요.

 

*칼은 안찼습니까?

 

칼은 왜정 때 초기에 뭐 교장회의를 하는 사진을 보면 모두 쓰고 칼도 차고 그런 걸 본 것 같지만 실지로 교원이 칼 찬 모양은 보지 못했어요.

 

(쓰레기를 줍게 된 문제의 그 과거-자칭 민족반역자가 된 까닭)

 

*처음 만난 교장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그 때 한 종 순 이란 분인데 아주 산골이니까 그렇지 한국 사람이 교장되기 힘들어요.

 

그런데 교장도 정식 발령이 아니고 '교장 사무취급'이예요

 

그래 일본 사람이면 30대 전후가 돼도 정식 교장 발령을 받는데 우리나라사람은 40이 넘고 그래고 함경남도, 도치고도 그렇게 많지 않을 거예요 그런 고산지대서나 근무하구.



1-27

그 때 그분은 교직에 10년 쯤 있었다구 그래요.


우리 같이 몇 해 안 된 사람이 있는데 이야기 하기를 자기가 시작할 때 한 8.9년 이렇게 근무한 사람을 보면 좀 이상하게 보이더라.


그렇게 오래도록 근무 할 수 있을까 그랬는데 지금 10년 넘었다든가.....

그 때는 '은급'이란게 있었어요.


그러구 벽지에 근무하면 그 가산점수가 있어서 그런데서 한 12년쯤 근무하면 은급이 되서 지금처럼 그만 두더래두 보수두 받게 됐던 모양이예요.


 그 분은 아직 그런 정도엔 이르지 않구.


그래 그 창평에 부임했을 때, 늘 내가 '민족 반역자'라구 한 그 이야기의 시작인데.....


*예....


(새삼 엄숙한 어조로)중학교 다닐 때는 4학년까지 조선어 시간이 있었구, 5학년 때는 없구 그랬는데 39년도에 창평에 부임하니까 국민학교인데 조선어 시간이 있어요.


그래서 요 앞에 4학급이란 얘기를 했는데, 교장선생님은 6학년을 담임하구 저는 1학년,4학년 복식을 하는데, 그 때 조선어를 각 학년마다 교장선생님이 맡았어요.


그리구 우리 세 사람은 역사,지리,이과 이렇게 그 조선어 시간에 6학년 교실에 가서 가르쳤지요.


저는 이과를 맡았어요.


*그 때 가르쳤던 교과목을 쭉 한 번 말씀해 주시죠.


'수신' 국어','국어'란게 일본어지요.


그 다음에 '산술'이라구 그랬어.


지금은 '산수' 라구 하지만.


그 다음에 '이과',요새의 자연 뭐 또 '지리' '국사', '국사'는 일본사지요.


*역시 '한국사'는 전혀....


아 그럼은요.


'국사' 그 담은 '음악' 미술은 '도화'라구 했구.


체육은 '체조' 그게 전부일 거예요.




1-28

*'실과'는 없었습니까?

 

교과서 없이 했던 '직업'이라고 했는지 그건 확실이 모르겠지만 있었던것 같고.

 

*하나, 둘...... 열 과목이네요.

 

그런데 소위 '조선어'가 6학년에만 있었습니까?

 

아니 1학년부터 다 있지요.

 

아직 '조선어'시간이 있는데, 그 시간만 우리말로 배우고 가르치고,

일단 밖에 나가면 우리말을 써선 안되는 규칙이 있거든요.

 

교장외 직원이 세 사람 있으니까 세 사람이 한 주일씩 돌아가면서 주번을 맡아야 되잖아요?

 

그러면 4학급 320명 중에 6학년 학생 네 사람이 주번이 되지요.

 

그 땐 간호당번이라고 그랬어요.

 

간호당번 네 사람이 학교에 오면 교무실,

그 때는 직원실이라고 그랬든가 와서 주번선생 한테 인사하고 표를,(國語常用)이란 표를 받아요.

 

그 표를 가지고 쉬는 시간에 돌아다니다가 규칙을 어겨가지고 우리 말을 쓰는 학생을 발견하면 그 표를 주지요.

 

그럼 그 표를 받은 학생은 그걸 다른 학생한테 전해야 되니까,

 

몰래 감춰 갖고 또 발견하면 주고.

 

그렇게 네개의 표가 하루종일 어디로 다니는지 모르게 돌아다니고 지금은 이 학교지도라고 그래서 수업이 끝나면 곧 돌려보내고 그러지만 그 때는 저녁 때까지 있고 싶은대로 놀다가 가고 그러니까.

 

*아니 선생님, 그(국어상용)표 말입니다.

 

그거 맨 나중에 직원실에 직접 갖고 가는 거예요?

 

글쎄 그 얘기를 제가 할려는 거예요.


*아 예.




1-29

그래 그 아주 작게 되어서 이 주먹에 쥐게 되면 보이지 않게 이렇게(주먹을 쥐어 보이며)됐어요.

 

그래야 누가 가졌는지 모르쟎아요?

 

그래가지고 하루종일 돌아다니는데 뭐 저녁 때는 자기가 더 이상 누구한테 전할 수 없으면 직원실에 가지고 들어오는 거지요.

 

지금도 왜정 때의 버릇때문에 무슨 교무실에 들어와서 인사도 하고 그런 절차가 남아 있다고 생각하지만,

왜정 때 교무실엔 '가미따나', 일본신을 모시는 '가미따나'가 정면에 있거든요.

 

우선 들어오면 거기다 뭐 굽혀서 하는 절이겠지요.

 

그걸 하고 선생님 앞에 와선 몇학년누구 왔습니다.

 

이런 식으로.....

 

지금도 남아 있다면 그대로 하는 거지요.

 

결국 표를 가진 학생이 제각기 오던지.

 

네 사람이 오던지 하면,

 

"왜 그 약속을 어기고 그렇게(표)를 갖고 있어?

 

다음부터 그러면 안돼"

 

그러면서 훈계한 사람이 (나)이기 때문에 (민족반역자)라고 하는 거지요.

 

뭐 처음엔 학교 규칙을 지켜야 한다는 걸로 생각했지만 나중에 생각하니까 (죄) (죄)를 지은 거고....(침묵)

 

*아, 어쨌든 학교안에선 '일본어'를 써야 됐군요?

 

글쎄 규칙이 그렇지요.

 

기억이 확실하진 않지만  39년도 까지는 '조선어'가 있었던 게지요.

 

다음 해엔 없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점점 더 강화되었다고 할 수 있지요.

 

학교뿐 아니라 나중엔 이 저 (국어의 집)이라 그래 가지고.....

 

*(국어의 집)?

 

(국어의 집). 어떤 가정이 자기 집에서의 약속이 '우리 집에선 한국말을 안 쓴다.

 

아주 일본말만 쓰자' 그렇게 장려하고.

 

그러기로 자기 집안에서도 약속하고,



1-30

 

정말 황국신민이 되기 위한 노력을 하지만 그걸 아주 떳떳하게.

 

그 또 장려해서 그렇지만,

 

대문에 어느 교회다닌다고 붙이는것 처럼 뭐 '국어의 집'이라고 붙이고.

 

또 그렇게 하는 사람은 그걸 자랑으로 생각하고 그랬다 할 수 있죠.

 

그리고 또 하나 이(국민학교)란 이름도 제가 창평을 떠난 40년 부터 바뀌었을 거예요.

 

*40년이면 이른바 창씨개명을 할 때군요?

 

예. 내가 어렸을 때는 (보통학교)였는데 창평에 부임했을 때는(심상소학교),그러다가 40년부터 (국민학교)로 창평공립국민학교로.

 

일본식 이름이 지금은 일본에서도 모두 (소학교)로 고쳐졌는데 아직도 우리는 ....

 

저 함 선생님께서도 언젠가 '민주교육실천 협의회' 창단식 (1986년 5월 15일 흥사단 강단)의 축사가운데 그 말씀을 하신 기억이 있어요.

 

(국민학교)란 이름을  없애야 한다고.

 

 



2-13

사라지는 날과 살아오는 날들 사이에서

 

(꽃밭과 고콜의 산촌 풍경)

 

=첫 학교에 계실 때 숙식문제는 어떻게 해결하셨습니까?

 

거기는 아주 조그만 동네인데,

여관하는 집이 방도 있어서 직원 셋이 다 그 여관방을 하나씩 얻어서 있었어요.

 

교장은 사택이 있고.

 

=그럼 사람들이 참 많이 있었던 곳이라는 얘기군요.

 

산촌인데 영림서 관계루 -나무 자르고 뗏목을 나르고 해서- 드나드는 손님이 더러 있었나봐요.

 

압록강 지류가 흐르는 곳이니까.

 

= 거기 생활은 어땠습니까?

 

학교 다닐 때 고산지대엔 고산식물이 참 볼만하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여름이 되는 것도 아주 늦게 6월 중순 쯤 지나야 그저 여름이 드는 느낌인데 한 여름 중에 '꽃발'이라고,

 

일본 사람들은 '하나바다께'라 부른 꽃밭이 그냥 길가에 평지에서 보지 못하는 그런 여러가지 색들의 꽃이 피고,

 

참 장관이예요.

 

그리고 고지대이기 때문에 여름동안은 열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시원해서 좋고,

 

또 딸기가 산에 참많이 나는데 여기에 저 큰 딸기라고 하는 그걸 뜯어다가 이렇게 설탕에 버무리면 맛이 참 좋지요.



 2-14

그리고 겨울에 김장하는 것도 양배추 같은 걸로 하고 그 김장 담그는데 갓나물이 들어가지요.

 

=여러 가지가 다르군요?

 

글쎄요. 겨울 난방 때문에 부엌과 방이 한데 붙어 있어요.

 

그러구 이 저 '고콜'이란 등잔이 있는데,

 

그걸 켜 놓으면 방안을 밝게두 하구 뭘 끓이는 것도 하고.

 

그러니까 한쪽 구석에 솔가지 중에 관솔이라고 하는 것들이 불도 밝게 할 수 있고 또 오래 켤 수 있잖아요?

 

그 관솔피우는 장치가 '고콜'이지요.

 

가령 음식점에서 환기시키는 장치처럼 벽 한쪽에서 그을음등을 곧 바깥으로 나갈 수 있게 해가지고 그래서 방도 덥게 하고,

 

또 촛불 대신으로도 쓸 수 있고.

 

=그럼 그 지방의 민속도 좀 다른 것이 있나요?

 

평지에서는 추석이라든가 설날이라든가 가 1년 중 가장 큰 명절이지만,

 

거긴 추운 지방이기 때문에 단오가 제일 큰 명절이예요.

 

추석 때도 벌써 좀 추운 지방이기 때문에 단오가 제일 큰 명절이예요.

 

추석 때도 벌써 좀 추운 느낌이 들고 또 음력 설 때는 더욱 그렇고 그래서 밖으로 잘 나가지 못하는 형편이여서,

 

산소에 가는 일이나 또는 출가한 여인이 친정에도 오고 그런 때가 대개 그 때라고 그래요.

 

학교 운동회 하는 것도 단오 무렵에 해요.

 

=거기서 술은 많이 드셨습니까?

 

교원으로 근무하는 때니까 학부형이라든가 직원끼리 어울리기도 했지요.

 

그런데 막걸리를 못만들게 해서 그런지 막걸리 마신 경험은 그렇게 없군요.

 

막걸리는 이 남쪽에 주로 많이 쓰인 것 같지 북쪽에는 정말 그런게 별로 없었던 것 같고.

 

하긴 탁주라고해서 모양은 있긴 있었겠지만.

 


2-15

= 그 때 첫 급료는 얼마였습니까?

 

아마 38원인가 했어요.

 

벌써 쌀 사는 것도 '야미'라고 하는 암거래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아직은 혼자 하숙비로 10원 정도를 내고 그러면 되니까 뭐 그리 큰 문제는 아니지만 일본이 중일 전쟁 시작하면서 부터는 값있는 돈이 아니었어요.

 

= 그런데 일본인 교사와 한국인 교사의 월급은 같았습니까?

 

일본 사람들은 '가봉'이란 것이 있어요.

 

우리가 만약 무슨 11급이라고 하면 그 11급 본봉에 대해 수당으로 7할인가를 일본인이기 때문에 더 받는가 그래요.

 

우리나라 전역에서.

 

그러니까 일본에서 할 일이 없고 그런 사람들이 지원해서 그냥....

 

=뭐 세금등으로 떼고 실제 손에 쥐는 금액이 38원인가요?

 

세금으로 떼던 생각은 확실치 않고,

 

뗀다고 해도 뭐 별로 그렇게....

 

그건 그렇고 '교육회'도 들어야 하니까 그 회비를 내어야 했지요.

 

=무슨 교육회요?

 

'군 교육회'. 장진군이면 '장진군 교육회'인데,

 

요즘 '서울시 교육회'하는 그런 모양이지요.

 

=그런데 그 일본인 교사를 일본에선 별 볼일 없는자 들이라고 하셨는데 그들이 어떻게 해서 올 수 있었나요?




2-16

그 때는 일본 각 학교에다 학교 선전과 소개를 하며 모집을 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일본 학교에다 그것을 보내면 관심있는 사람들이 응해서 1년동안 강습을 받고 그리고 교직에 나가고.

 

예를 들면,

 

여기 사범학교에서 그 일본의 고등학교,

 

아니 중학교가 되겠지요.

 

거기다 광고문 같은 것을보내서 선전이 되면 좀 외지에 나가 보고 싶은 자나 또 좀 어려우니까 한번 가서 해보자 그런 사람들이 있겠고,

 

여러가지 경우가 있었겠지요.

 

=다음 발령지로 가보지요.

 

학교는 여해진(汝海津), 단천군이예요.

 

=저 산촌에 있는 학교서 고생 좀 하셨다고 그래서 더 좋은 학교로 오신건가요?

 

뭐 나는 그렇게 느꼈지요.

 

그 통근도 불편하고 그런데 산지에 한 2년쯤 있었으니까 평지에 근무하던 사람 그쪽으로 보내고,

 

산지, 평지 그런 방침으로 인사원칙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럼 교장이 특별히 근무성적을 매기는 이런 제도는 없었습니까?

 

그런 걸 느끼지 못했어요.

 

6학년은 없고 학년까지 5학급이였어요.

 

주로 1학년과 3학년을 맡으면서 여해진 한 5년 쯤 있었는데,

 

 때 미.일 전쟁이 시작됐어요.

 

=41년도, 그렇지요?

 

그렇지요. 태평양 전쟁,

 

아! 대동아 전쟁이라고 그랬지요.




2-17

(방학 중에 출근하고, 모래 땅에 콩을 심고)

 

=그럼 전쟁 기간중 이니까 웃기관에서 교사들에게 경계 태세를 어떻게 하고,

 

마음을 어떻게 하고 전달된 어떤 얘기는 없었나요?

 

그렇죠.

 

아, 그러니까 교장과 직원이 합쳐서 다섯 명이었는데 어린이 조희 같은 것이 날마다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런 때 훈화를 전쟁터에서 일어난 얘기를 하고.

 

그래 전국적으로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여기서는 학교  '꽃밭'이라는게 꽃을 심어서는 안되기로 되어 있었어요.

 

꽃밭도 다 식량에 도움이 되는 콩을 심는다든가 그러게끔.

 

그런데 한번은 시학이 지금은 저 장학사지요.

 

=시학이요?

 

시학이라고 그랬어요.

 

장학사라는게 처음에는 도에만 있었어요.

 

나중에 군에도 한 사람씩 배치하고 그랬는데 그러니까 한 군의 지역이 넓기 때문에 가끔 와서 학교를 들르지 못하지요.

 

그래 42년인가 43년인가 그 무렵이 됐을 때 어떤 장학사가 왔었는데 그 꽃밭 자리에 꽃 몇 포기를 심어 놨어요.

 

그걸 뭐라고 나무라더군요.

 

=한국인 장학산데요?

 

아니지요, 일본 사람이지요.

 

교장도 일본 사람이고.

 

그렇게 운동장도 조회나 할 수 있는 정도로 하고 그 나머지는 다 방공호를 파거나 빈터가 있으면 다 콩을 심거나 어떻게든 식량에 보탬이 되는 것을 심으라 그랬어요.

 

그래 해변가에 있는 학교이기 때문에 모래가 주로 된 운동장이라 그걸 파고 심어도 곡식도 잘 되지 않았지만 명령이 그러니까 그렇게 했어요.




2-18

=그럼 선생님께선 창평하고 대동소이하게 생활하신 겁니까?

 

아무 일 없이.

 

그 때까지는 아이들은 그렇게 밖에 나가서 일을 돕거나 아직 그렇지는 않았고,

 

신문에 뭐 전과가 나고 그러쟎아요.

 

교장만 일본인인데 그 사람들은 어떤 전과가 나면 보도두 크게 되지만 아주 정말 몹시 기뻐하고,

 

그 싱가폴 함락 됐을 때나 남경 같은 데가 함락 되었다거나 어디가 어떻게 됐다 그러면 우리 벌써 중학교 때 부터도 행렬, 죠찡이라는 초롱들고 하는 행렬,

 

그 다음에 기 흔들면서 하는 행렬을 많이 해왔지만,

 

여해진에 간 뒤에도 대동아 전쟁이 시작되면서 그런 전과가 나면 또 행렬하고 그랬지요.

 

그래 조간 같은 신문이 배달되면 아침에 직원실에 가서 보고 그러는데 이 한국 직원들은 느낌이 어떤가 그걸 감시하는 것 처럼 늘  그래요.

 

그 사람들이 좋다고 하는데 같이 좋다고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내 표정을 할 수도 없고.

 

그리고 창평에 맨 처음 부임했을 때는,

 

여름 방학이 시작되면 시작하는 날 부터 '시사여행원'을 내가지고 방학이 끝난 날 까지자기 볼일을 보고 그러다가,

 

여해진에 온 첫 해쯤에도 그러다가 그 다음 부터는 지금도 왜정 때 배운 걸 당국에서 잘 쓰고 그러지만 방학이 수업이 없다는 말이지 무슨 직원들이 맘대로 다니고 그런 날이 아니라는 걸 아주 강력하게 강조했어요.

 

방학이 되면 집에 와 있다가 가고 그랬는데,

어느 겨울은 그렇게 공문이 왔다고 하면서 못가게 해요.

 

직원이 얼마 되지도 않는데.

 

그 때 부터 말루 그렇게 반항을 못하고 가지 못한다고 그러니까 가지 못하는 수 밖에 없으면서 그냥 할 일도 없으면서 학교에 나오고 그런 생활을 했어요.

 

그 여해진에 처음 부임할 때도 내가 몇년도에 어디 졸업한 사람이라고 그러니까 교장이 일본인 야마네라는 사람인데.

 

아주 반갑게 맞이해 주었어요.

 

담임은 아니었지만 선생님이었어요.

 

그러니까 사이가 나쁜 그런 일이 없었는데 당국의 지시도 있어서 그랬겠지만 압박을 받는다고 생각을 하면서 좀 사이가 좋지 못했지요.

 

특별하게 뭐 그런 일을 없었고.

 



2-19

=선생님 뭐 그러실 분이 아니...

 

하하하, 여해진이 바닷가여서 참 좋았어요.

 

운동장에서 바닷가 까지의 직선 거리가 100m 쯤 되는데 여름엔 체육시간에 바닷가에 가서 헤엄치고 들어 오고.

 

=백사장도 있고요?

 

그렇지요.

 

그 동쪽 바다가 참 좋았고 그래서 여기 월남해서도 바닷가에 있기를 원했지요.

 

창평에 있을 때는 '발귀'를 탔어요.

 

장대,

 

알맞은 장대 하나만 가지고 이 쪽을 받칠 필요가 있을 땐 그냥 내려가다가 이렇게 받치고 그러는데 그 스키 위에다가  뭔 짐도 싣고 산에가서 나무도 해오고 그럴 때 썰매처럼 '발귀' 그걸 타고.

 

= 산토끼도 잡으러 다니셨습니까?

 

그 근처에 포수라든가 그런 얘기를 잘 들어 보지 못했고,

 

사는 사람이 많지 않아서 그런지 우리 그 동네가 동네가 아녜요.

 

산토끼 잡던 기억은 없고.

 

지금 발귀,

 

왠만한 경사진 데가 있으면 얘들이 거기 가서 미끄럼 타고 거기 가서 그런 일을 하고 그러는데 위에서 발귀 준비 해놓고 아이들이 타면 한 사람이 앞에 가서 운전하고 그래요.

 

그런 모양을 동네 아이들이 놀고 그러는데 나도 타 보기도 하고 그러다가 운전 해보고 싶은 생각이 나더군요.

그래서 앞에서 그 채를 잡고 출발해서 떠나는데 경사를 내려오는데 도무지 걷잡을 수가 없어요.

 

운전도 잘 하지 못하겠고,

 

그 때 잘못했으면 죽을 뻔 했어요.

 

급하게 내려 오니까 뭐야 내 마음대로 이렇게 운전 할 수 없고 그러다가 겨우 경사를 면해서 괜찮았는데.

 

그게 발귀 놀러 갔다가 한 번 혼난 경험이군요.




2-20

(간이학교의 '유지계')

 

=참, 이 여해진 학교에 몇년 계셨습니까?

 

44년 까지 있었어요.

 

41년도에 와서 44년 까지 만 3년 쯤 되지요.

 

그리고 44년 그 해에 결혼했어요.

 

그 결혼한 것과 근무와 관계가 있는데 그 때 간이 학교라고 있었어요.

 

아까 창평에도 간이 학교가 한 20리 떨어진 그 산골에 있었는데.

 

= 요새 분교 이런거죠

 

분교라고 할 수 있어요.

 

그 간이 학교가 곳곳에 생겼는데 혼자 근무하는 학교에요.

 

거기는 하숙을 할 만한 알맞은 데가 없어서 반드시 결혼한 사람을 보냈어요.

 

44년 봄에 결혼을 했으니까 그 해 가을 2학기에 옮겼지요.

 

'황곡'이라는 덴데.

 

= 황곡(黄谷). 황곡 국민학교지요.

 

=결혼 이야기는 안 하실 모양이지요, 선생님?

 

뭐 중매로 별로 할 얘기는 ....

 

=그러니까 결혼 때문에 황곡으로 가신거군요?

 

그렇지요.

 

먼저 있던 사람은 다른데로 옮기고.

 

그리고 황곡이 그 때는 벌썰 국민학교로,

 


2-21

간이 학교도 몇 해 있다가 국민학교로 바뀌는 땐데, 내가 발령을 받은 때는 황곡 국민학교였어요.

 

=그래도 선생님은 한 분이군요.

 

그 다음 해방되던 해에 황곡 교장이 정식으로 왔어요.

 

1학년과 2학년이 함께 수업하다가 해방되던 해에 3학년 까지 있었어요.

 

= 해방도 거기서 맞이 하셨지요?

 

거기서 맞았지요.

 

그래서 간이 학교를 운영하는데 '유지계'가 해요.

 

=유지계라니요?

 

유지, 학교를 유지하기 위해 만든 계인데,

 

직원 봉급은 다 나오니까 괜찮지만 겨울에 난로 같은 거 때는 문제는 장작이 필요하잖아요?

 

그런 것을 다 거기서 해결해요.

 

동네에 할당을 해 가지고 어느 동네 얼마,

 

지게로 장작을 져 오지요.

 

거기 무슨 계장이라 그럴까 책임자도 있었겠지요.

 

=유지계는 강제로 성립된 건가요?

 

그거야 간이학교가 있으면 유지계가 꼭 있게 마련 됐었던 거지요.

 

뭐 육성회 같은 후원회인 셈이지요.

 

그래 어느 정도 강제성을 띄었겠지요.

 

내가 갔을 때는 이제 관계가 없었지만 그 전에 풍습대로 겨울이 되면 장작이 배당되었어요.

 

=이때 선생님 월급은 한참 올랐겠네요?



2-22

처음 38원이라고 하는 것은 '촉탁교원'의 초급이예요.

 

그땐 사범학교를 졸업하면 42원인가 됐어요.

 

여해진에 와서 '판임관(判任官)' 이라고 해서 '판임관'이 되어야 '훈도'가 되는 거지요.

 

그러니까 사범학교를 졸업하면 발령을 '훈도'로 받는 거지요.

 

나는 아마 2년 지나서야 그 발령을 받았을거예요.

 

=그럼 교사라고 안하고 판임관이라고 그랬습니까?

 

아니, 훈도에 급수가 있지요.

 

=급수요?

 

뭣이라고 그랬든가  지금은 호봉인데,

 

훈도 10급, 훈도 9급 이렇게 올라가고 그랬을 거예요.

 

= 판임관 위에는 뭡니까?

 

무슨 고등관이라든가  더 올라가면 주임관, 확실히는 모르겠는데요.

 


(일제 말년의 '연구 발표회' 모습)

 

= 44년도라면 치열한 전쟁이 진행하고 있을 때인데 학교에서는 어땠습니까?

 

거기가 바닷가니까 멀리 고기잡이 나갔다가 무슨 저 미군 같은,

 

그땐 미군이라고 그랬는지,

 

하여튼 그런 이상한 배를 만났다는 이런 정도의 얘기고,




2-23

그리고 여해진에 있을 땐데 지금은 서울시 전체가 모여서 무슨 연구회를 하고 그러는지 모르겠는데,

 

'군 교육연구 발표회'라는게 있어서 각 학교에다 봄, 가을로 하던가 1년에 한 번 그렇게 지정되면 군내의 교사들이 모여서 같이 연구 수업을 하고 그러지요.

 

그런데 여해진에 있을 때 44년 봄 쯤인데 단천군내의 어느 학교에서 그 '연구 발표회'가 있었어요.

 

그 때는 교실에 가서 수업을 보고 그런 일이 없고,

 

체력 단련을 어떻게 하는 가를 보여 주고 그러는데 '전력 증강 체육'이라고 했어요.

 

여기서 몇 해 전에 '순환운동'이라는 거 있었잖아요?

 

그 비슷한 거지요.

 

깊이 원추처럼 구덩이를 파 놓고 거길 저 기울어지는 듯 하게 빙빙 돌아서 나오기도 하고,

 

사다리 같은 데를 기어 오르기도 하고,

 

그러고 방공호를 파서 적이 왔을 때 어떻게 하겠다는 것을 보여 주고.

 

그러고  참가한 사람들은 저 운동장 가장자리에 서서 보고 있는데 본교 교직원들이 죽창,

 

그 때 대나무로 만들었던지 북쪽은 대나무가 좀 귀해서 '목총'이겠지요.

 

참관 온 사람들이 운동장 가장자리에 있는데 그 방향으로 적이 지금,

 

해변가 이기도 하니까 불시에 상륙해서 쳐들어 올 경우에 어떻게 막아야 되겠다 그런 훈련을 실지로 보여 주는 거지요.

 

= 본교 직원들이요?

 

본교 직원들이.

 

나무 총을 들고 우리 쪽을 향해서 이렇게 야 ! - 하면서 아주 꽤 찌르 듯이 하니까 그 교장의 표정이 일본 사람이지만 그 사람들도 그렇게 쉽지도 않은 걸 하려니까 우습기도 한 모양이지요.

 

아주 엄숙하게 해야 할 텐데.

 

= 자기를 향해서 그렇게 하니까?

 

아니, 그 우리 참관인을 향해서 본교 직원들이 하는데 그 뭐 우습던 생각이....

 



2-24

=그 당시 직원회의랄까 이런게 아침이나 저녁에 꼭 있었나요?


여해진에선 작아서 그런지 직원 조회, 종례는 별루 없었구 '어린이 조회'는 거의 날마다 있었는데 항상 일장기 걸어놓구 거기다 경례를 하구.


=요새 하는 것과 비슷합니까?


그렇지요.


=경례를 어떤 식으로 하나요?


그 때 부터두 뭐 거수 경례, 대개 그 모자두 쓰구 그랬으니까.


=지금 모습과 비슷하군요.


요새도 어떤 학교에선 아침에 등교할 때 교문에서 딱 이렇게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고 들어 가지요.


모양이 그렇습니까?


예, 그렇지요.


그런데 왜정 때는 항상 국기를 다는 것이 아니라 국경일 이라든가 그런 때 달구.

이 저 '가미다나'라는 -일본 천조대신(天照大神)이라구 우리나라로 하면 단군같은 거지요-

신을 모시는데 그래 내가 황곡에 갔을 때두 지금 저 교문에 들어 오면서 국기에다 경례한다구 그랬지마는, 왜정 때는 저 교무실에 신전을 모셨어요.


=어떻게 모셔놨나요?


사당처럼 높은 데다 포장두 쳐 놓고, 그러구 천조대신으로 시작되는 아랫 글자는 잊었습니다만




2-25

문을 열고 들어 오면서 그 쪽을 향해서 아마 거수경례를 했던 것 같아요.

 

=직원들도?

 

직원도 그렇고 학생도 교장도 그렇고.

 

누구나 들어 올 땐 그렇게 하고 들어 와야 되고 그래서 황곡은 혼자니까 직원이 혼자니까,

 

= 속은 편하셨겠네요?

 

하하하, 혼자니까.

 

그 교문에서 하지 않고 이 교무실,

 

운동장에 그냥 들어 와서 교무실 앞에서 거길 향해서 그렇게 하도록 돼 있더군요.

 

그래서 내가 가면서 내 맘대로 할수 있는 거니까,

 

그것을 일일이 그렇게 하는 것 보다는 조회때 한 번 하는게 좋겠어서 고쳤지요.

 

그러니까 주재소가 바로 학교 위 언덕에 있었어요.

 

학교 생활하는 모습을 늘 보고 있지요.

 

사람이 바뀌니까 그렇게 하지 않는다고 누구를 통해서 그러길래 내가 이렇게 생각해서 그런다 하면서 그대로 했지요.

 

거긴 나 혼자지만 관공서래야 학교 밖에 없고 그랬지만 그런 것을 다 그렇게 감시하게끔 돼 있었어요.

 

(수업 대신 노력 동원으로)

 

= 그것 때문에 문제가 발생된 것은 아니고 그런 정도로 끝났지요?

 

그랬지요.

 

그리고 황곡에 가서는 44년 10월엔가 갔으니까 그 다음 해 8.15까지두 뭐 1년도 안된 때잖아요?

 

갈때는 곧 겨울이 시작된 때니까 괜찮았겠지만 다음해 4월인가는

 

-학기가 4월에 시직되는데-

 

그 동네에서 노무자로 징용으로 나가거나 또는 군대에 징병으로 나가는 사람도 많고 그래서 집집마다 모두 일손이 모자라구 그러거든요.



2-26

따라서 공부하는 1교시, 2교시수업시간 인데도 그런데 관계없이 그냥 가서 10리 쯤 돼도 김매주어야 할 때가 많아요.

 

그런 요청이있으면 얘들 데리고 가서 김매고.

 

아, 그리고 저 송탄유, 비행기에 특별히 쓰는 윤활유가 부족하니까 솔에서 나오는 기름 같은 것으로 대용할 수 있다고 하니까 주로 산촌에선 낫이나 적당한 기구를 갖고 산에 가서 그걸 캐다 바치기도 했어요.

 

= 교육활동은 안하셨군요, 노동만 하시고?

 

그렇지요.

 

시간이 있어서 가르치기도 했겠지만 주로 그런 노력 동원에 나갔지요.

 

= 그 때 전쟁이 끝날거라는 생각은 전혀 못하셨나요?

 

못했지요.

 

단천은 함경남도에서 바닷가로 맨 끝이예요.

 

청진도 가깝고 그러쟎아요?

 

청진에 소련군이 폭격도 하고 상륙도 했다든가 그런 보도가 나오고 그래서 내개 하는 생각이

그 소련군이 바닷쪽으로 지나가면 우리는 그냥 갇히거나 하는 게 아닌가 그랬고.

 

또 다른 사람들은 여러가지 생각을 했을지 모르지만 뭐 종전이라든가 무슨 항복이라든가

이런 것은 더욱 생각 못했지요.

 

일본 사람들이 군대를 교육하는데 저 '옥쇄(玉碎)"라는,

일본 말로 '교꾸사이'라고 그러지요.

 

우리가 듣기를 저 북해도 북쪽에 '아쯔'라는 섬이 있어요.

 

거기서 옥쇄했다는 것을 아주 대대적으로 선전하고 그랬었요.

 

그게 일.노전쟁 뒤에 받은 섬인지 하여튼 그러한 섬에 가서 싸우다가 전체 옥쇄했다든가,

 

그 때 생각이 전장에 나가면 다 죽고 포로라든가 그런 말은 영국인이나 미국인이나 이런 사람들이 포로로 우리나라 어디 와 있다 그런 정도의 이야기를 듣지만 일본 사람이 무슨 포로가 되는 법은 없고 그저 최후의 경우에는 목숨을 바친다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지요.



2-27
해방 후에 장준하 선생이 쓴 (돌베게)에 일본 사람들 포로 취급하던 이야기를 보고 아,

 

이런 일도 있었는가 그랬지 왜정 땐 그런 건 생각하지 못했지요.

 

= 그냥 일제가 계속 전쟁에 이기고 있다?

 

이기는 것도 아니고 글쎄 소군이 와서 그저우리는 산 쪽에 있으니까 저 해변 쪽으로 이렇게 썩 지나가게 될 거다 그런 생각을 했지요.

 

= 미군 생각은 안 하셨군요?

 

소군이 가까이 있으니까 뭐 내려 오겠지 하는 생각뿐이지.

 

=팔로군 얘기는?

 

그건 해방 뒤에 들었고.

 

=좀 다른 얘깁니다만 그 당시 유행가에 기억나는 것 없습니까?

 

우리말 유행가는 그 대 '조선팔경가'라고 그랬는가,

 

"금강산 일만 이천....." 있쟎아요?

 

그게 유행되기는 아마 중학교 무렵일거예요.

 

1935년이나 그 무렵인데 나중에 금지곡으로 됐어요.

 

내가 황혹에 있을 때,

 

더러 주재소 직원과 같이 합석해서 술도 마시고 그런 경우도 있거든요.

 

그 어느 모임인가 내가 부르는 차례가 돼서 그걸  "금강산 일만 이천"하고 시작했더니 같이 있던 순경이 안된다고 그래서 못부르고 그러다가 황곡에서 해방을 맞았는데 그 노래를 어느 모임에서 부르고 그러던 기억이 있군요.

 

그리고 이 두만강 뱃사공 같은 것은 내 기억에 '조선팔경가'처럼 기억을 못했는데 어떻게 가수 김정구 얘기를 들으면 35년에 시작된 노래라고 그래요.

 

그것도 금지당했는지 유행되지 않았고, (보충할 부분)일본 노래는 많지요.

가수 김정구


2-28

군가가 주로 많고.

 

(산머루를 던지던 날의 기쁨)

 

=아무래도 8.15를 황곡에서 맞으셨을 텐데......

 

8.15소식이......

 

그 끝 무렵에 일본 사람들이 (국민의용대)를 만들었어요.

 

국민 전체가 의용군이 되는 거예요.

 

그냥 조직상으로 만든 거지요.

 

황곡이면 황곡리라고 하는 동네에 '황곡 국민학교'라고 그 하나 있어요.

 

그래서 이장이 중대장,

 

위에는 대대도 있고 그렇겠지만 중대장이 되고,

 

국민학교 교원은 그 훈련을 맡은 그런 책임이 지워졌어요.

 

그래서 8.15날 그 날 의용군 조직의 맨 처음 회의를 면사무소에서 한다는 통지를 미리 받고 있었어요.

 

=8월 15일 날?

 

그 날. 그래서 이장과 나하고 같이 참석해야 되니까 그 날 새벽에 황곡에서 면 사무소 까지 걸어서 가는데, 40리가 돼요.

 

8월 15일 12시에 회의가 시작된다고 통지를 받아서 새벽 일찌기 이장과 같이 떠나서 12시 전에 갔어요.

 

그 면사무소 회의실에 들러 갈려구 하니까 경보, 공습 경보가 났어요.

 

평지에선 몰라도 산촌에선 그걸 경험해보지 못했지요.

 

그래서 거기 먼저 온 몇 사람들과 같이 방공호로 대피해야  된다 해서 허둥지둥 가는데 지금 경보는 잘못 된거라고 다시 회의실로 가라고 그래요 회의를 시작하면서 '의용대 서사'도 제창했어요.

 

남총족이라는 사람 때 '황국신민의 서사' 라는 것이 만들어졌는데,



2-29

학교에서나 직장에서 어떤 행사가 있을 때 꼭 불러야 하고 학교 조회 때마다 늘 부르고 하는 건데. "우리는 황국신민(皇國臣民)입니다.

 

천황폐하에게 충성을 다 하겠습니다."

 

그리고 1, 2, 3, 까지 있어서 국민학교에서는 쉽게, 중학교 이상에게는 좀 더 어렵게,

 

그렇게 된 것이 소위 '황국신민서사'라는 거지요.

 

그런데 그 날 회의를 하면서 '의용대 서사'를 제창했지요.

 

=의용대 서사.

 

예. 그러면서 그걸 처음 면장이 불러 주면 읽고, 그리고 하여튼 모임을 끝마쳤어요.

 

그런데 오후4시 부터,

 

거기가 '수하 국민학교'인데 거기 모인 사람들이 훈련을 받는다구 그래요.

 

그 시간에 훈련장엘 갔어요.

 

대부분이 다 모였는데, 그 학교 선생 가운데 내가 아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이 훈련에 참석하지 않구 나두 어떻게 용감해서 그랬는지 거기엔 참석하지 않고 숙직실에서 이야기하고 그랬어요.

 

그러면서 그 선생님이 그러든가 오늘 뭐 12시에 중대방송이 있었다고 그랬던가 그렇게 한참을 이야기하다 나오니까 훈련도 어느 틈엔가 해산되었어요.

 

저녁 때 여관에서 저녁도 먹고 밖에나와 보니까 사람들이 모두 길거리에 모여서 이야기가 오늘 12시에 중대방송이 있었다고 그러지 내용도 모르고.

 

그러니까 거기두 라디오도 별로 없으니까 누가 전하는 이야기를 들은 것인데 그러면서 밤이 깊어져서 자세한 건 모르고 그냥 와서 잤어요.

 

그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니까 "일본천황이 어저께 무조건 항복을 했다"는 거예요.

 

= 16일 아침에?

 

그 날 아침에, 그 때 처음 알았지요.

 

그 때 황곡 주재소는 인원이 뽑혀가서 주재소가 없어지게 됐어요.

 

뭐 이런데 까지 신경쓸 것 없다고 그래서 없애기로 됐어요

 

또 8월18일 인가는 그 모든 주재소 직원들이 가니까

 

동민들이 모여서 뭐 송별회라도 해야 되겠다

 

그런 얘기도 있고.



2-30

= 일본 순산데요?

 

일본인이지요.

 

한국인도 있었어요.

 

그리고 8월 16일 이장은 이장회의가 그 면사무소 소재지에서 있을 예정이었는데 이렇게 중대방송도 있고 그러니까 없어진 것이지요.

 

그래서 이장과 나는 같이 황곡으로 오는 거예요.

 

8월 16일 날?

 

16일 날. 40리를 걸어서 들어 가는데 어느 만큼 가니까 어떤 아주머니가 머리 위에다 이렇게 머루넝쿨, 머루넝쿨이 주석산 성분이 들어 있으니까 그것을 집집에 할당해서 언제까지 바쳐라 하면 그걸 이고 40리 더운데 나와서 바쳐야돼요.

 

그것을 무겁게 땀을 흘리면서 이고 가는 아주머니들이 있잖아요?

 

=예.....

 

그럼 우리가 "아주머니 이제 그거 필요 없습니가" 그러면 "아, 그래요"하면서 그냥 개울에다 집어 던지기도 하고,

하여튼 우리가 거기서는 맨 처음 그 소식을 아는 사람인데, 만나는 사람은 그렇게 어저께처럼 그걸 준비해 가지고 오고 그런 때이죠 저녁 때가 돼서 황곡에 왔는데 우리가 일본 순사들에게 그런 소식을 전하니까 깜짝 놀라요. 

 

궁금해 하기도 하고.

 

뭐 정말 같기도 하고 거짓말 같기도 하고 믿을 수가 없쟎아요?


=예

 

그런데 무조건 항복을 했으면 어떻게 돼는지 그런 것은 내 자신도 몰랐고, 이장도 잘 모랐고, 그저 그랬다드라 그저 그런 걸 전하고.




2-31

8월 17일이 되니까 다른데서 온 사람들도 어디서 만세를 불렀다 어쨌다 이런 얘기두 들리고 그래서 그럼 우리도 동민을 모아서 만세를 부르자 그렇게 결정이 됐어요.

 

그래서 그 날 저녁에 학교에 있는 일본기를 꺼내서 거기다 태극, 빨강, 파랑등 대강 아는 사람이 그렇게 했는데8괘 정도를 아는 사람이 있더군요.

 

그 날 저녁에 사이렌을 울려서 동민들을 모아 그저 간단하게 축하 만세도 부르고 또 시가도 아니면서 태극기를 앞세우고 학교 교문 앞을 지나서 큰 길을 내려 가고.

 

한 참 가다가 그 주재소 수석인 일본인과 마주쳤어요.

 

그는 17일 날 아침에 본서로 확인하러 갔다가 그 때 저녁 때야 돌아오는 길이예요.

 

아주 풀이 죽어서.

 

= 그걸 주민들이 어떻게 손대지 않았어요?

 

아니. 글쎄 우리는 신나서 마주치자 더 힘있게 만세를 불렀을 뿐이예요.

 

무슨 저사람을 어떻게 하거나 그러지는 않았지요.

 

다음 날 18일 정식으로 무슨 축하라고 할까 그런 모임을 하는데 이 줄을 세우면서 우리말로 '차려' '앞으로 나란히'를 해야겠는데, 일본말로만 했기 때문에, 내가 '앞으로 나란히 손 들어'  뭐 그렇게 했든가  하하하,

 

그러면서 간단하게 그 날 식을 했지요.

 

우리가 용감했다고 해야할 지, 주재소 수석도 여기 참석하라고 그래서 강제로 다 참석시켰지요.

 

참석시켜서 만세를 부를 때는 같이 만세 부르고 그랬어요.

 

그러다가 며칠 지나서 짐을 꾸려가지고 어느 밤엔가 갔지요.

 

해방을 그렇게 맞았어요.

 

그리고 17일인가 '천조대신'이란 신을 모시던 신전을 아주 내손으로 다 뜯어 내고 하하하. 그만 하지요.

 

(순사는 도망가고, 교장은 할복하고, 소련군은 내려오고)

 

= 선생님, 주재소 사람이 다른 곳에 갈 때는 꼭 송별회를 해 줍니까?

 

예, 주민들이 해 주지요.




2-32

=그 일본인 순사를 그냥 내버려 두었다고 그랬는데 우리쪽 사람들이 너무 착해서 그런가요, 아니면 주민들에게 곱게해서 그런 건가요?

 

그 어떤 지방에서 보면 평소에 잘못했기 때문에 아마 맞아도 죽고 그런 일이 있었다고 그랬는데

우리 경우는 뭐 그런 일이 없어서 그 정도로....

 

더러 감시할 때 감시하고 그러지만 술좌석도 같이 했었고.

 

그 때 한국인 한 명과 그 일본인 둘이 있었지요.

 

= 그 때 폭격이 잦았습니까?

 

공습 경보 훈련이란 것은 많이 했지만 정말 들리는 말이 저 미군이 한국에  대해서는 폭격을 안할거다 그랬는데 어디엔가 폭격당했던 일이 있었어요.

 

나중에 들리는 말이 한국 사람에게 전쟁에 대한 공포감을 느끼게 하려고 일본측에서 일부러 했다는 그게 확실한지는 모르지만 그런 이야기를 들었어요.

 

=방학 때 아니었어요?

 

그렇지요. 여하튼 방학이 되면서 코흘리개들에게 이 우리말 공부를 해야 되겠다 그래서 저녁 때 교실 뒤에다 ㄱ,ㄴ,ㄷ,ㄹ 등을 이렇게 하고, ㅏ,ㅑ,ㅓ,ㅕ 등을 또 이렇게 해서 '가'는 이렇게 하면 되고  그런걸 '카드'처럼 만들어 붙여 놓고 곧 시작하고 그랬어요.

 

3학년 까지만 있던 학교인데 학생을 모집해서 4.5.6학년 과정도 만들었어요.

 

교사도 세 명으로 늘고...

 

=교사들이 막 교장으로 올라 가기도 했지요?

 

일본 사람들이 가고 또 남은 사람들 중엔 뭐 교장 노릇이라고 할까 하고.

 

나중엔 뭐 교장 발령도 받고.




2-33

=그 일본인 순사를 그냥 내버려 두었다고 그랬는데 우리쪽 사람들이 너무 착해서 그런가요, 아니면 주민들에게 곱게해서 그런 건가요?

 

그 어떤 지방에서 보면 평소에 잘못했기 때문에 아마 맞아도 죽고 그런 일이 있었다고 그랬는데

우리 경우는 뭐 그런 일이 없어서 그 정도로....

 

더러 감시할 때 감시하고 그러지만 술좌석도 같이 했었고.

 

그 때 한국인 한 명과 그 일본인 둘이 있었지요.

 

= 그 때 폭격이 잦았습니까?

 

공습 경보 훈련이란 것은 많이 했지만 정말 들리는 말이 저 미군이 한국에  대해서는 폭격을 안할거다 그랬는데 어디엔가 폭격당했던 일이 있었어요.

 

나중에 들리는 말이 한국 사람에게 전쟁에 대한 공포감을 느끼게 하려고 일본측에서 일부러 했다는 그게 확실한지는 모르지만 그런 이야기를 들었어요.

 

=방학 때 아니었어요?

 

그렇지요. 여하튼 방학이 되면서 코흘리개들에게 이 우리말 공부를 해야 되겠다 그래서 저녁 때 교실 뒤에다 ㄱ,ㄴ,ㄷ,ㄹ 등을 이렇게 하고, ㅏ,ㅑ,ㅓ,ㅕ 등을 또 이렇게 해서 '가'는 이렇게 하면 되고  그런걸 '카드'처럼 만들어 붙여 놓고 곧 시작하고 그랬어요.

 

3학년 까지만 있던 학교인데 학생을 모집해서 4.5.6학년 과정도 만들었어요.

 

교사도 세 명으로 늘고...

 

=교사들이 막 교장으로 올라 가기도 했지요?

 

일본 사람들이 가고 또 남은 사람들 중엔 뭐 교장 노릇이라고 할까 하고.

 

나중엔 뭐 교장 발령도 받고.




2-34

=그랬어요?

 

그랬지요.

 

단천군 우리 군내의 이야기지만.

 

이제 나라가 망했으니까 그런 생각으로 그랬겠지요.

 

거기는 면소재지에서도 40리 떨어졌기 때문에 소련군 이야기만 들었지 실제는 보지도 못했고.직접 소련군을 본 것은 그 뒤 군청 소재지에서고. 이 사람들이 공산주의 교육을 공무원이나 직원에게 시키기 위해서 강습도 마련하고 그랬어요.

 

그래 그런 모임이 있어서 군 소재지에 갔을 때 처음 소련 병사를 만났을 거예요.

 

=그게 9월 쯤이었습니까?

 

일본에 원자 폭탄이 처음 떨어지지 않았어요?

 

그게 8월 6일인가 그렇지요.

 

그러구 소군이 선전 포고한 게 8월 9일이고.

 

그러면서 청진은 소련 땅에서 가까우니까 곧 넘어 오고 그랬어요.

 

9월두 더 지나서 12월 경이었을 거예요.

 

=예

 

(주민 자치 시대에 교사들의 양심)

 

그 해 군청 소재지에 가면서 소군을 처음 봤는데, 오랜 전투에 시달려서 그런지 복장도 참 불쌍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허름하더군요.

 

군대는 저렇지는 않을 텐데 하는 생각으로 봐서 그런지.

 

흑빵을 그들은 '흘레밭이라구 그러는데   그넌 것두 메구 다니더군요.

 

면 소재지 정도에서 병사들을 초대해서 닭도 잡아 환영을 했다는 얘기를 들었지만 우리가 실지로 당해 보지는 못했지요.

 



2-35

그러고 이()에 곧(인민 위원회)가 조직됐는데, 지금 생각하기에 아마 9월이나 10월 쯤에 어떤 지시가 있어서(인민 위원회)를 조직하라 그랬나봐요.

 

뭐 위원장,

각 부서는 아마 소련서 준비된 공산당 관계 기관에서 보낸 공문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래서 우리 동네도 위원장을 정하고 , 무슨 부장도 정하고, 그런데 학교는 아직도 방학이지만 이제 우리말 공부를 해야 되겠으니까 교실에 ㄱ,ㄴ, ㄷ 이런 걸 적어 놓고 그랬는데 교과서가 금방 있는게 아니고 수학 같은 것은 '일본 산수책'을 우리말로 변역을 해서 설명하는 정도였지요.

 

'국어'라는 일본 책은 쓸데없어서 교사 자기 생각대로 그저 이런 것을 가르치면 좋겠다 해서 가르치고 그랬지요.

 

그렇게 그 해 말까지 황곡에 있었어요.

 

=선생님. 그럼 인제 개학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2학기는.

 

학년을 왜정 때는 4월에 시작하지 않았어요?

 

그걸 갑자기 바꾼다든가 공문으로 된 일도 없어서 그냥 계속하구 그랬어요.

 

46년 2월에 학교를 떠날 때 학년도가 9월로 바뀐 것을 알았어요.

 

아마 소련두 그런 모양이지요.

 

여하튼 그냥 왜정 때 식으로 2학기를 계속하는 거지요.

 

그런데 저한테 가정 사정이 생겼어요.

 

선친께서 돌아가셨다는 전보가 왔어요.

 

그때 원산에 계셨는데 이렇게 시국이 바뀌었으니까 우편도 잘 돼지 않고.

 

결혼해서 멀리 떨어져 있으니까 소식이 궁금해서 선친께서 힘들게 천리길을 다녀 가신 적이 있었어요.

 

오신게 9월, 10월 그 무렵인데, 다음 해 2월에 돌아가셨다는 전보가 왔어요.

 

그래서 그 어려운 교통편으로 원산에 가니까 벌써 장례는 끝났구, 장남이니까 집을 지켜야 되지 않겠어요?

 

그래서 황곡에 다시 왔다가 그만 떠나 원산에 오게 되었지요.

 

=사표를 내고 오신건가요?

 

그 때 사표를 냈지요.

 

당시 사표를 내지 않구 타도로 희망하는 것을 '출할'이라구 그랬는데 해방된 뒤니까 우선 그만 두는 사표를 내고 왔지요, 2월 하순에

 



2-36

=누구한테 냈습니까?

 

제대로 할려면 군청 학무과에 내는 것인데 그럴 수 없으니까 학교 직원들에게 부탁했을 거예요.

 

=선생님. 그러니까 8. 15 이후가 교무나 행정 사무가 완전히 공백 기간이 아니었군요?

 

글쎄, 어떤 위의 명령이 아니라도 각 지방마다 자치적으로 했어요.

 

주재소 사람을 감시하던 것처럼 동네 사람들이 생각 있으면 '이렇게 해보자'해서,

'자치대'든가 '치안대'든가 곳곳에 다 그렇게....

 

=정말 완전히 주민 자치가 이루어진거군요?

 

그렇지요.

 

그러면서도 공산단 측에선 앞서 말한 것처럼 그런 것을(인민 위원회)계통으로 지시하구.

 

=그러니까 8. 15 이후에도 이전처럼  똑같이 교사들은, 일제 식민지 시대의 그것은 아니겠지만,

주민 자치로 바뀐 상태에서도 계속 교사직을 맡았다는 것입니까?

 

그렇지요.

 

어느 달 쯤이었던지 교원들 모임도 있어서 군에 교육관계를 맡아 보는 사람도 있어서 자기의 생각을 발표하는데 "우리가 지금까지 왜정하에서 '일본이 꼭 이긴다' 또는 '일본은 정의다' 하면서 가르쳤는데 그 일본을 찬양하던 입으로 그 학생들 앞에서 뭐 '일본은 나쁘다' 이렇게 하기는 곤란하지 않느냐"

 



2-37

그러구 또 "거짓말쟁이라고 손가락질이나 받지 뭐도움이 되겠느냐?

 

그러니까 "근무지를 옮기는게 좋겠다" 그런 의견들이 있어서 이동두 있었지요.

 

=선생님들 자치적으로...

 

아니, 군에 교육을 주관하는 부서두 있었지요.

 

저하구 같이 황곡에 있던 교장이 자기 고장에 가서 교장이 되구 그랬지만, 질병이라든가 직원이 징병이나 징용으로 나갔기 때문에 자리가 비어서 교류를 해야 할 필요가 있기두 하는등 여러 형편이 있었어요.

 

=선생님의 경우는 그런 인사 이동이 아니군요?

 

그렇지요.

 

=무슨  '반성대회' 같은 것은 없었습니까?

 

글쎄, 썩 지나서 공산치하가 돼가지고 무슨 '자기비판'하는 그런 모임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러나 초기엔 그렇지 않았고 차츰 정돈 되면서  그런 과거의 일뿐만 아니라 평상시의 여러가지 행동에 대해서 '자아비판'두 하는 모임을 갖는 기회가 있었어요.

 

=당시 이남에선 왜정 때 해먹은 놈들이 활보했다는데.

 

북쪽에선 그렇지 않고 그 앞잡이라든지 더러운 놈들은  다 처단하고 그랬군요?

 

그렇지요. 처단이라는게 뭐 죽이는 정도는 아니지만 자리는 자진해서 물러나기도 하고 뺏기기도 하고....

 

그런데 교원은 그렇게  전근이라두 가서 하구 그랬지만, 순경하던 사람은 거기 남아서 순경한다거나 옮겨간다거나 그런 것은 일체 없었을 것 같고, 다시는 경찰을 못하게끔 돼 있었어요.

 



2-38

('연성소', 청년훈련소, '지원병 그리고 국민학교 교원')

 

=그래 주민들은 교원들에 대한 태도가 크게 나빠지지는 않았습니까?

 

교사 자신이 평소 학부형 상대를 어떻게 했느냐에 달렸겠지요.

 

그런데 일제 때 이 '연성소(鍊成所)라고 하는게 있었어요

 

=연성소?

 

군대 적령이 돼서 징병을 당해야 하는데 국민학교두 못다녔기 때문에 일본말두 못하잖아요?

 

그런 병정은 나이는 들었지 말은 못알아듣지 그래서 학교 교육을 받지 못한 적령자들을 국민학교에 부설된 이 '연성소'에서 군대 기초 훈련을 하는 거지요.

 

이 '연성소'는 군대의 예비 훈련을 하는데 일본말을 가르치는게 중점이기는 하지만 군대식으로 연성소원을 심하게 다루는 교관이라고 할까, 그걸 국민학교 선생이 맡았는데, 황곡국민학교에도 '청년 특별 연성소'가 있었어요.

 

=아 아,

 

그런데 심하게 우리를 괴롭히고 그랬다는 반감으로 해방된 뒤에 그런 사람들을 일률적인 것은 아니지만 보복을 당하는 그런 일두 있은 셈이지요.

 

=예,

 

또 국민학교 졸업한 학생두 그런 군사 훈련을 받는 '청년 훈련소'라는....

 

='청년 훈련소'요?



2-39

'청년 훈련소'. 그것두 다 국민학교 교원이 맡아요.

 

그러니까 정규 수업을 마친 뒤에 오후에는 그런 일도 하게 되니까 고된 일이지요.

 

=이 훈련 기간이 얼마나 됩니까?

 

1년 동안인가. 영장을 받을 동안 준비를 하는 거지요.

 

=완전히 일본 군인을 만들어서 끌어 가는군요?

 

그렇지요.

 

=여기에 해당되는 사람이 많았겠는데요?

 

하여튼 징병 해당자는 다 그런데 징병 나이가 만 20세 라고 생각하는데 만 19세되는 때 부터 1년 동안은 의무적으로 그렇게 훈련을 받구, 나중에 또 영장을 받구.

 

=이게 몇 년도에 생긴건가요. 선생님?

 

1942년이나 1943년 무렵 부터 일거예요.

 

=처음 듣는 일입니다. 선생님. 그럼 45년 이전에 교원들은 이것을 다했겠군요?

 

그렇지요. 요 먼저 '의용대' 이야기를 하지 않았겠어요?

 

국민 전체가 의용대원이 돼가지구 이장이 중대장이 되구, 국민학교 교원이 훈련 책임자가 되는 거지요.

 


2-40

=그 때 가혹하게 했던 선생들은 해방 후에 혼이 났다 이 말씀이지요?

 

그렇지요. 그들은 주로 집의 일을 해야하는 가정에서 참 중요한 존재인데.

 

그런 일을 젖혀 놓고 날마다 정한 시간에 와야 했지요.

 

만약 출석을  제대로하지 않거나 열심히 하지 않거나 하면 어떤 벌을 받게 되니까 황곡 같은데서 교통이 불편해서 거기 모이려면 몇 십리  걸어야 되는 형편이구.

 

대개 아침에 집을 떠나 오후에 훈련을 받게 되지요.

 

그래 명령을 어기면 벌을 받고 어려운 일이 많았지요.

 

=훈련 과정이란게 주로 무엇입니까?

 

그런데 지도하는 일본어 교육과 군 기초 훈련이지요.

 

자신이 군대 교육을 받지 않은 사람이쟎아요?

 

그러니 잘 모르면서 그저 '앞으로 가' '뒤로돌아 가' 그런 정도지요.

 

그런데 교원 중에도 '지원병' 제도가 있지 않았어요?

 

거기를 마친 사람들이 교원이 되는 수도 있었어요.

 

저 육사 있는 자리가 왜정 때 '지원병 훈련소'하던 곳이예요.

 

=이 지원병은 어떤 건가요?

 

확실히는 모르지만 1940년도 쯤에 생긴 것인데, 국민학교를 졸업한 정도면 거기 가서 훈련을 받구 나중에 일본 군대로 가는 거지요.

 

제 나이 비슷한 분으로 지원병 출신이 선생이 발령을 받아서 여해진에 와 근무한 적이 있어요.

 

그런 분들은 자기가 총검술을 했으니까  그것을 잘 가르치지요.

 

그들은 대개 3종 촉탁 교원인데 시험을 치르고 교원이 되지요.

 

=왜정 때 그렇게 시작해서 해방 후에 나중에 교장이 된 사람도 있습니까?



2-41

그렇지요. 그냥 있으면...

 

=그런 지원병이 선생한다는 이야기도 전혀 모릅니다만, 선생님 보시기에 그들은 어땠습니까?

 

글쎄, 그런 훈련을 받고 왔으니까 일본 정신이 어느 만큼은 들었다고 할 수 있지요.

 

이인석이라는 사람이 지원병 마치구 나중에 상등병이 되었는데 중 . 일 전쟁에 참전했었어요.

 

그는 지원병 출신으로 전쟁에 나가 처음으로 전사한 사람이라 해서 '야스꾸니 신사'에 모셔졌지요.

 

그걸 또 훌륭한 군인이라구 선전을 굉장히 해서 국민학교 학생들까지두 이인석 상등병 하면 모를 사람이 없을 만큼 그랬었지요.

 

그는 충청도 어디 사람인데 국도에서 그 집까지 새로 길을 냈다고 하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그 집을 보러 다니는 사람이 많아서 그랬다는데 전쟁 뒤에서 지원병 선전을 하기 위해 없는 사건을 만들었다는 소문을 들었지만 어느게 헛소문인지.....

 

=하여간 공산당이 들어 오면서 차차 정리가 됐다 그렇게 말씀하셨는데.....

 

그랬어요.

 

(국민학교를 '인민학교'로)

 

=그럼 김일성 이야기는 언제 처음 들었습니까?

 

김일성 이야기야 해방 직후 부터 들은 걸.

 

해방 되기 전에두 독립운동 한다는 사람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우리 고향은 만주에서 가까우니까 많이 들리는데 물론 김일성은 아니지요.

 



2-42

해방 직후에도 그 '김일성이가 단천 사람이다'. 북청 지방 사람이면 '김일성이가 북청 사람이다' 그랬어요.

 

지금 김일성이 아니고 옛날 김일성인데 썩 나중에 가짜니 어쩌니 말이 돌았지요.

 

=그러니까 나중에 가짜라는 이야기가 있었다는 거지요?

 

그렇지요.

 

그래 제가 선친께서 돌아가셔서 원산에 오면서 도중에 보니까 김일성 초상화가 거리에 붙여진 걸 처음 보았어요.

 

황곡에 있을 때는 아직 초상화두 볼 수 없었구.

 

나중에 그 사진과 관계된 이야기가 저 적전(赤田)학교에 있었는데 그건 46년이지요.

 

그 때 벌써 '인민학교(人民學校)'지요

 

=인민이란 용어는 어떻게 된 건가요?

 

해방 뒤에 소련군이 진주하면서 '국민학교'를 '인민학교'로 다 바꾼거지요.

 

='국민'이란 말이 일제가 썼던 거라서 바꾼거지요?

 

그렇지요.

 

=그럼 그 '인민'이 자연스럽게 나온 것인가요 아니면 무슨 계통을 통해서...

 

어, 계통이지요.

 

위에서 이제부터 '인민'으로 바꾸라는 지시를 받고 고치게 된 것이지요.

 

사실은 황곡에서 그런 통지도 받기 전에 정말 자치적으로 '우리 학교 이름을 (황곡국민학교)라고 이렇게 하지말자' 그래서 지시가 있기 전 까지는 (건국 초학원)이란 간판을 달았었어요.

 

그 땐 다른데 소식을 들은 것두 아니예요.

 



2-43

=예

 

황곡국민학교 간판을 그냥  둘 수가 없으니까 우리 (건국초학원)이라고 하자고 해서 이장이 글씨를 잘 쓰는 사람이어서 당장 그 간판을 그렇게 했는데, 그것두 두 달도 못되어서 (황곡 인민학교)로 또 간판이 고쳐졌어요.

 

그처럼 처음에는 자치로 했지만 차츰 공산당 쪽 지시를 따르게 됐지요.

 

=그럼, 원산에 있는 (적전 인민학교)에 46년 4월 부터 계셨다고 했지요?

 

글쎄, 거기 있을 때 해방된 지 1년도 안되는 때쟎아요?

 

프린터를 해서 교과서루 각 학교에 배부해서 사용할 땐데 46년 11월 3일에 해방된 뒤 맨 처음 선거가 있었어요.

 

여기루 말하면 '국회의원'을 뽑는 선거지요.

 

='인민대표'를 뽑는 거군요?

 

그렇지요.

 

그런데 우리가 무슨 선거를 한다구 투표장에 가구 그런 경험은 정말 없쟎아요?

 

아직 30도 안된 때지만 정말 생전 처음하는 투표지요.

 

=선생님은 그 때까지 선거란 것을 전혀 모르셨군요?

 

몰랐지요.

 

왜정 때 면에서 무슨 평의원을 뽑는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면장을 돕기 위한 평의원 조직이 있어서 재산 정도에 따라서 재산을 어느만큼 이상 갖고 있는 사람이 아마 투표권이 있었던가 봐요.

 

그러니 한 동네에 투표권을 가진 사람은 그저 몇사람 없을 정도인데 왜정 때 그런 평의원 뽑는 모임이 있다 그런 류의 이야기만 듣구 어떻게 했는지 그것은 모르구 있었네요.

 



2-44

=예

 

(첫 흑.백 선거에서 반대 투표를)

 

그래 11월 3일 처음 선거를 하는데 거기 여러 사회 단체가 있었어요.

 

여성이라든지 청년이라든지 10개 가까이 있는데 투표하는 방법을 알리기 위해서 모의투표란 것을 했어요.

 

몇시에 시작하구 어떻게 하구를 여러 단체가 집집마다 다니면서 여성동맹에서는 이렇게 알리고 농민동맹에선 또 이렇게 하구.....

 

11월 3일 전에 학교에서는 반장을 뽑는 모의 투표가 있었어요.

 

그래서 '적전인민학교'에서두  6학년 반장을 뽑는 모의투표를 흰통, 검은 통으로 했지요.

 

그래 소문이 들리기를 흰통, 검은통에 넣는 것을 비밀로 한다고 그러지마는 나중에 알려지는 방법이 있다는 것 처럼 공공연하게 하는게 아니구 그런 말을 유권자들이 듣게끔. 겁을 주고 그러지요.

 

입후보자는 물론 단일부호예요.

 

이 후보를 찬성하느냐 반대하느냐 그것만 표시하면 되는 거예요.

 

그래 처음 당하는 선거인데도 '잘 하는 방법이 아니다' 하는 느낌이 나서 '선거란 걸 우선 부인할까'

그렇게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11월3일 선거를 하는데 어떻게 하는지 다 들었으니까 투표시작하고 두 시간 쯤 지나서 투표장에 가니까 이 동사무소 같은 방에 흰통, 검은통이 있구 참관인석이 한 5 - 6m 떨어진 조금 높은 데에 있어요.

 

=참관인은 어떤 사람들인가요?

 

정당, 사회 단체이지요.

 

그 때 뭐인가 노동당이지요.

 

또 천도교 관계의 청우당이라고 하는 당도 있었구.

 

제대로 하면 천도교 청우당 아마 그렇게 했을 거예요.

 

하여튼 차례가 돼서 표를 받았어요.

 



2-45

여기 전철표만 한데 투표 방법이 투표함 앞에 가면 횐통에다 먼저 손을 가져 갔다가 그 다음 검은통에 이렇게 가져 가는데 이 손에 감춰가지고 하기 때문에 어느 쪽에 넣는지 모르게 한다고 비밀 투표라는 거예요.

 

두 쪽에 넣는 시늉을 똑 같이 한다고.

 

=흰통은 찬성이고.....

 

검은 통은 반대이고.

 

그 단일 입후보를 정하는 방법두 선거를 공명하게 한다 해서 청우당, 노동당, 무슨 민주 연합도 나오구,

정당과 사회 단체가 협의해서 단일 후보가 결정 되는 거예요.

 

선거 경험도 없구 선거 자체가 맘에 안들어서 난 마음 먹었던 대로 흰통에 넣는 시늉을 하다가 옮겨 가서 검은 통에 넣었어요.

 

=참관인이 몰랐습니까?

 

뒤의 조금 높은 곳에 앉아 있는 참관인은 손에 감춰서 하니까 어디 넣는지 모르게 되어 있지요.

 

그럼, 앞엔 통만 있고 아무도 없습니까?

 

그렇지요. 그래서 검은통에 넣었어요.

 

넣으니까 '떵"하는 소리가 나쟎아요.

 

온 방안이 울리는 것 처럼.

 

내 가슴이 그 때 너무 놀라서 그렇게 느꼈는지 모르지만  '아' 이제 다 알게 되었구나' 이런 생각이 나요.

 

그래 이 선거 하기 전이나 후에두 거기에 있는 동안은 어느 통에 넣었다 그런 이야기를 가족한테두 하지 않았지만, 지금두 제가 여기와서 내 생각을 갖고 있다 해도 가족에게까지 누가 좋다 표시를 안해요.

 

여기 넘어 와서두 아무한테두 하지 않구 이야기 할 만한 사람 한테만 하는 정도였어요.

 

그런데 또 생각해보니까.

 

투표가 시작된지 적어두 두시간 쯤 지났으니까 검은통에 꽤 여러 장이 들어 갔다면 널판지에 닿아서 그렇게 떨어지는 소리가 나지 않았을 텐데, '아! 아무도 넣지 않았는데 내가 넣었구나' 하는 생각이 나서 다 알려진 사실이구나 하고 느꼈어요.

 



2-46

그 11월 3일 선거는 참 굉장히 선전했어요.

 

정말 유사 이래 처음 당하는 일이구.

 

선거가 끝난 뒤에두 온 동네가 축제 분위기를 만들어서 뭐두 뚜드리고 그랬어요.

 

=그 때 아무 조사도 안받으셨습니까?

 

조사야, 그 때까지 내 생활을 좀 당에서두 다 알고 있었을 테니까 처음부터 '요주의 인물'이었는지 모르지만 더욱 더 찍히고 그랬겠지요.

 

참 투표장에 갈 수 없는 환자들에게는 흰통과 검은통의 조그만 함을 만들어 가지고 가서 "표를 넣으십시오" 했어요.

 

100%는 아니구 99.00%의 투표율이라고 선전 했지요.

 

=개표는 어떻게 됩니까?

 

그러니까 결국 99점 몇 퍼센트가 되구 반대라는 것은 거의 없다 이렇게 발표가 됐겠지요.

 

=아마 공산당에 대한 최초(?)의 반대투표를 하셨군요. 선생님.

 

참 뜻 밖에 말씀입니다.

 

다시 적전인민학교 시절로 가지요.

 

몇 학급이었습니까?

 

(스탈린 초상화 총격 조작 사건으로)

 

적전학교가 8학급인데. 교장부터 직원까지 공산주의를 그렇게 좋아 하지 않는 사람들만 있는 것으로 알려져서 46년 말 무렵에 왜정 때 직원 동태를 감시하는 동료 직원을 배치한 이야기를 한 것 처럼 이 적전학교에 감시하는 직원 하나를 배치했어요.

 



2-47

=같은 교원인데?

 

예, 교원을. 당시 교장은 왜정 때 부터 근무하다가 수석 훈도였기 때문에 자동으로 교장이 된 한정욱(庭頊)이란 분인데 그 학교에서 배웠던 교장의 제자인 송만호(宋萬浩)가 감시 책임자로 배치를 받았어요.

 

학교에 있는 여러가지 일을 보고 할만한 것은 다 보고하는 책임자죠.

 

참, 그 때두 '직업동맹'이라는 모임이 있었어요.

 

교장은 규칙상 동맹원이 될 수 없었어요.

 

회의를 할 때두 교장은 참가를 못하지요.

 

그런데 송만호가 둘 밖에 없던 여직원중 하나를 동맹에서 축출하자는 의견을 내더군요.

 

무슨 가사 과목을 충실히 하지 않는다는 조건을 붙여가지구.

 

그것이 동맹회의에서 결의가 되면 위에다 보고를 하게 되지요.

 

회의에서 그런 결의가 되면 무사할 수 없어요.

 

=동맹회의, 그러니까 직업동맹은 당시 어떤 성격입니까?

 

공산당은 아니지만 같은 직장의 직원끼리의 모임이죠.

 

그러나 친목회 같은 것은 아니지요.

 

=이 직업동맹은 학교마다 있었습니까?

 

다 있는 거지요.

 

'00인민학교 직업동맹'이라구.

 

하여튼 거기서 결의가 되면 결의대루 될 수 있어요.

 

=그 때 송만호가 주동자다 이거지요?

 


2-48

동맹원은 회의에서 학교의 무슨 일이나 의견을 내놓을 수가 있는 거지요.

 

그런데 송만호가 한 여선생을 위에다 보고 해서 조치를 취할 작정으로 그랬던 것 같아요.

 

=선생님, 말씀하신 '위'가 자세하게 어딥니까?

 

위라는게 그 때루 말하면 원산 시인민위원회 학무과라고 그럴까.

 

그렇지요. 여기두 그랬지만 당시에 일반 행정과 같이 교육 행정을 취급했어요.

 

그래서 회의를 하는데 제가 그랬어요.

 

"우리가 해방이 된 지 1년두 넘었지만 무슨 자료가 없어서 제대루 가르치지 못하고있는 형편이다.

 

그런 처지에 가사를 맡은 선생님이 잘 가르치지 못한다고 '징계합시다' 그렇게는 못한다.

 

우리 제각기 다 자기 반성을 해야 될꺼다"  그러니까 다른의견들두 송만호가 제의했던 의견을 그냥

무시했다구 할까 이루어지지 못했어요.

 

사실 이 송만호 이야길 듣는 이들이 "이건 송만호 의견이 아니구  위에서 좀 사상이 건전치 못한 사람을 어떻게 제거 하라는 이런 명령을 받구 하는 얘긴데, 섣불리 반대했다가는 또 점 찍힌다"는 위험 때문에 발언도 마음대로 못하는 형편이었지요.

 

송만호와 그 여선생이 평소 사이가 좋지 않은 것 같지는 않은데 해방이 되면서 좀 사상이 뭐하다구 느껴지는 사람은 어떤 방법으로든 제거하려는 방침이었나봐요.

 

심부름 하는 '급사'까지두 회원이 돼가지구 의견을 발표해요.

 

'나는 교원이구  저사람은 급사라는, 잘못됐다면 잘못된 생각인지 모르지만 나이로 봐서 썩 어린 급사가

다른 직원이 의사 표시를 못하는 그런 발언을 해요.

 

그러니 송만호가 내 이야기를 진정으루 듣겠어요?

 

말로만 그렇게 끝났지.

 

=그러니까 송만호에게 선생님은 자꾸 밉게 보였겠군요?

 

그 전 부터 그래 왔지요.

 

사석에서 이야기를 해두 우리는 감시 당하는 입장이니까 늘 거리감을 갖고 있지요.

 


2-49

일어났어요.


=47년?

 

겨울이예요. 그러니까 사건이 있은 건 47년초겠군요.

 

1월 어느 날인지 모르는데 동네 청년이 공기총을 갖고 새잡이를 한다고 다니다가 학교에서 친구가 김상화(相和)란 선생인데, 당직을 하니까 교무실에 들어왔어요.

 

그 때 김일성 사진과 스탈린 사진이 교무실에 걸려 있는데 이 청년이 안될 일이지만 여기 저기 공기총을 쏘면서 스탈린 사진에두 쐈어요.

 

=고의적으로 한거군요?

 

고의라고 할 수 있어요.

 

박진우라고 나도 얼굴이나 아는 정돈데 새잡이 다녔다고 할 수 있지만 교무실에 들어 와서 거기다 쐈다는 것은 생각이 달라서 그런 거지요.

 

거의 개학할 무렵인데.

 

쏜 사람은 다음 날  내무서로 끌려 가구...

 

=나중에 어떻게 됐습니까?

 

재판두 받구 같이 있던 죄수들이 대부분 시베리아로 갔구, 그렇지 않으면 함경북도에 있는 광산에 갔지요.

 

=그 초상화는 철거했습니까?

 

아니. 그대루 있었어요.

 

해방 초기니까 액자가 아니구 사진을 벽에다 그냥 붙여논 정도지요.

 

한 교장이 집에 갔다 오니까 그런 일이 생기지 않았겠어요?

 


2-50

그러니까 노동당에 가까운 사람 같으면 거기 가서 미안하게 됐다구 끝날 수 있는 문제인데 감시 받는 입장에 이런 일을 당했으니까 어떻게 수습할 수 있겠어요?

 

개학을 하자 수업을 하는 날두 보안서에서 현장 조사가 있었어요.

 

하여튼 사진을 향해서 쐈다는 이야기만 들었는데 어느 일요일 지나니까 그 총 맞은 자리가 스탈린 목, 목이다 그렇게 돼 가지구 무슨 문제가 더 커진 것 같아요.

 

그래 보니까 스탈린 목부분에 아주 탄환 자리가 있더군요.

 

=겨냥을 해서 쐈군요?

 

예,그런데 어느 날 소사가 박힌 걸 꺼냈다 하면서 또 더 조사하구..

 

그게 산사람 같으면 문제가 되겠지만 뭐 그냥 사진에데 대구 쐈는데 옆에 맞거나 목에 맞거나 별루 큰 다른 의의가 있겠어요.

 

그래 우리는 뒤에 그걸 보면서 '이게 조작이다' 이문제를 크게 만들기 위해서 목에 상처를 만들었다 그렇게 느껴지더군요.

 

=아. 이제 그쪽에선 초상화에 총을 쐈다고 그러지만 그냥 보통 생각하기엔 조작된 것 같다고 느끼셨다 이거지요?

 

그렇죠. 처음엔 그저 쐈다. 이러다가 어느 일요일이 지나면서 목에 상처가 있다.

 

그러구 산 사람이 아닌데 어디를 맞은게 무슨 큰 차이가 있겠느냐?

 

그런 정도루 생각했구.

 

그런데 송만호 형이 내무서원이었어요.

 

그러니까 이 사건을 자기 형에게 알린거예요.

 

사건 담당이 송만호 형이었어요.

 

=아.....다 그렇군요.

 

하하하.그러구 얼마두 지나지 않았어요.

 

하루는 그 날 일과가 다 끝난 오후 시간인데 삼륜차가 운동장에 들어 오는 소리가 나는데

학무과 직원들이 타구 왔어요.

 


2-51

그 쪽에선 교통수단으로 삼륜차가 많이 이용돼서 출장두 그걸루 했는데.

 

학무과에서 세 사람이 왔던가 와서 발표하기를 그 날 당직은 파면, 교방두 파면, 그리구 삼륜차에 타구 온  김수기가 후임 교장이예요.

 

사건이 난 지 한 달 쯤 지난 뒤지요.

 

(강기덕씨를 옥중에서 보고, 면직 당한 뒤에 임명장을 받고)

 

=선생님도 불려 갔었습니까?

 

아직 불려갈 까닭은 없지요.

 

교장두 바뀌구 거기서 내가 있을 생각은 없구 교두는, 교장 다음 가는 교감인 셈인데, 사의를 표명하구 그 다음부터 안나가고, 나도 다음 날부터 나가지 않았어요.

 

그 때 1년 쯤 근무했는데 발령을 못받았어요.

 

그래두 뭐 임시루있다 그런 생각은 아니었구.

 

그 날 현장에서 후임으로 온 신임 교장 한테 말했어요.

 

"저는 아직도 발령을 정식으로 받지 못해서 임시루 있는 형편이기 때문에 정식으로 사표를 낼 성질두 아닌 것 같아서 내일 부터 안나오겠습니다."

 

그리구 한 일주일 지났는데 저녁 때 쯤에 밖에서 누가 찾는다는 거예요.

 

잠깐 학교루 가자구 해서 조금 이상한 느낌이 나요.

 

가니까 삼륜차가 운동장에 와있구 사의를 표한 것도 아닌 근무중인 교원 윤춘식이 사람을 같이 차에 태우는 거예요.

 

가다가 그 사고나던 날에 당직했던 선생 집에 들려서 그 분도 태우고, 이렇게 세 사람을 내무서 유치장에 집어 넣었어요.

 

다음날이  되니까 교장두 교두두 왔어요.

 

같은 사건의 사람이기 때문에 감방에 다섯을 각기 하나씩 다른 방으로 다른 잡범과 함께 넣었어요.

 

잡범도 있지만 해방이 1년 쯤 지났쟎아요?

 

그래 원산이 '도 인민위원회' 라구 그러지만 아마 도청소재지 노릇을 하구 그런데 이 3.8선이 멀지 않아서 거길 넘다가 붙잡혀 온 사람들두 있었어요.

 

당시 두 번째 있던 선거 때 면.리 위원 선거 선거법 위반으로 유치장에 들어온 사람두 있었구.

 

유치장이 가득 찰 정도였어요.

 


2-52

=얼마나 계셨습니까

 

거기 26일 있는 동안 내무서 청사가 바뀌면서 트럭에 실려 옮겨 다니구 그랬지만 단 한 번도 우리를 잡은 까닭을 묻는 일이 없어요.

 

그래 26일 돼서 나오니까 소감을 쓰라든가 오래간만에 펜을 들어 쓰라는 걸 쓰니까 석방이라구 그래요.

 

아마 송만호 형이 이놈들 혼내 주자 그래서 넣구 보니까 뭐 조사할 것두 없었겠지요.

 

= 한 3월 쯤 나오셨겠네요?

 

3.1절을 유치장에서 맞았어요.

 

기념 행렬을 하는 북소리가 안에서 들리기두 하구 그랬는데 그 때 한가지는 이 강기덕씨라구  3 .1운동 때 파고다 공원에서 시위를 주동한 사람 중의 한 분인데 거기 잡혀와 있었어요.

 

그는 60쯤 이었을 거예요.

 

왜정 때 '예비검속'처럼 이런 식으로 잡혀 온 거지요.

 

저쪽에 반대하니까 이런 시기에 무슨 소요라두 일으키지 않을까....

 

그래서 독립운동의 유공자라면 유공자인데 이런 사람까지두 여기 잡아 넣는게 옳은 일일까 생각했지요.

 

=식사는 무엇을 주던가요?

 

그 땐 잡곡인데 수수 같은 것을 많이섞구 쌀은 거의 없었던 생각이 나요.

 

또 사식을 받을 수 있었어요.

 

사식으로 점심을 집에서 넣었어요.

 

그런데 또 얼마 지나서 3학년에 다니던 동생이 학교에서 주더라면서 편지를 갖고 왔는데 뜯어 보니까 "징계면직"발령이예요.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걸 받았을 때 상식으로 생각해서 발령을 받은 사람이 무슨 사고루 징계면직 발령을 받을 수는 있어두

발령두 받지 않구 그럴 수가 있을까 그래서 학교에 찾아 갔어요.

 


2-53

교장실에 가서 "이 사령장을 가져 왔는데 발령도 받지 않은 사람이 징계면직 발령을 받은게 참 잘못 된 것 같아서 도로 가져왔습니다" 이러니까 좀 웃느 얼굴로 "뭐 그 발령 받아야 되겠습니까?" 하면서 자기 서랍을 열더니 사령장을 하나 꺼내요.

 

그게 발령장이예요.

 

이 사람이 인사 담당하던 사람이예요.

 

그 사람이 이미 발령된 발령장을 가지구 있다가 내가 항의하니까 주는 거예요?

 

"그래 이렇게 할 수 있습니까?

 

징계면직 발령을 먼저 받구, 발령을 나중에 받는게 이게 이럴 수 있습니까?

 

그러니까 뭐 이야기두 없구 남아서 이야기할 필요두 없구 그래 그걸 받아 가지구 왔어요.

 

어디 가서 호소할 곳도 없지 않아요.

 

=그렇군요, 나오신 뒤에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집에 있으면서 동네 벽돌 찍는 공장에 가서 사무일을 맡아보구 그랬는데, 그 해 6월에 어머님께서 돌아가셨어요.

 

그런데 저(토지개혁)을 해서 토지를 분할하기 때문에 소유자두 달라지고 그러쟎아요?

 

=무상으로 몰수해서 무상으로 분배하는....

 

그렇지요. 그러면서 '시인민위원회'에 '경지 조사과'라는 데가 생겼어요.

 

(토지개혁) 뒷처리를 하기 위한 거였으니까 거기 사람이 많이 필요하지요.

 

측량도 하구 뭣두 하구 그런데 거기에 우리 당숙이 아는 사람이 있어서 이력서를 내지 않구 가서 근무하게 됐어요.

 

분할 된대로 면적을 재서 적어 넣는 이런 일이 사무실 안에서 주로 하는 일이었어요.

 

=그것은 언제 부터 시작하셨습니까?

 

어머님 돌아가신 뒤 7월 경이예요.

 

8. 15도 거기 근무하면서 맞았으니까.

 

거기서두 시키는 일이나 잘하구 그러면 그대루 있을 수도 있었을지 모르지요.

 

그런데 그쪽 선전을 하기 위해서 무슨 독서회'라는 모임이 있어요.

 



2-54

직장에서 5시면 5시에 끝난 뒤에는 거기가서 좀 듣구 싶지 않아두 그저 협조하는 것 처럼 듣구 이러면 좋은데 그게 그렇지 않쟎아요?

 

그래서 거기 과장이 그것을 좋지 못하게 보구 있었는데 그 경지 조사하는 일이 좀 일단락 되니까 서기장이라는 사람이 자기 방으로 오라구 그랬다는 거예요.

 

서기장 박세병은 원산시 인민위원장 다음 가는 사람이죠.

 

당시 시장은 인민위원회 위원장이라구 불렀어요.

 

그래 근무가 끝난 뒤에 처음 서기장실을 들었지요.

 

들어가니까 길게 이야기 하지 않고.

 

시키는대로 하지 않던 얘기를 하면서 '참 수고 했다, 이제 내일 부터는 나오지 않아도 좋다"

 

그 동안 내가 근무하던 모양을 그 과장이 자세히 보고해서 그랬겠지요.

 

아마 9월 어느 날일 거예요.

 

그러니까 일이 바쁜 동안에는 부려먹다가  이제 어느 정도 됐으니까 불러서 "그만 나가라" 그런 거지요.

 

하여간 과장 한테는 근무시간 뒤에 독서회라든가 그런 모임에 협조하지 않으니까 늘  "저 사람은 시키는일을 잘 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렇게 찍혀 있는 형편이었을 거예요.

 

=생각하면 아주 좋은 자리였지 않습니까?

 

자리요?

 

가서 시키는 대로만 하는 거지요.

 

어느 이만큼한 땅이 있는데 이렇게 분할되었으면 그 지적도에 본을 떠서 새로 그려넣고 그 새로 받은 평수가 얼마가 되는가 기계를 돌려서 적어 넣기도 하고 그런 일을 했어요.

 

=그 때 선생님께서는 괴로운 나날을 보내셨겠군요. 앞으로 어떻게....

 

그렇지요. 더러 직장 문제를 의논드릴 만한 분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분이 내 사정을 알아서 자리가 있어서 천거하고 싶지만 내 과거 때문에 영......

 

그리고 자기능력이 넉넉히 추천할 수도 있지만 나중일이 두려워서 잘 하지 못하는그런 형편이었지요.




3-13

해체된 풍경 속에서

 

(해방공간에 분단된 내마음)

 

그 전부터 나는 이미 아주 친하던 사이도 마음을 터 놓을 수 없는 우선은 경계하는 분위기를 느끼고 있었다.

 

(여해진)에서 같이 근무하다가 6. 25 사변 중에 넘어와서 지금도 서로 편지왕래를 하는 동료 박승희 선생이 있다.

 

그를 그 때에 2 - 3년 만에 만났지만, 반갑기는 했으나 이야기하기도 힘들어서 오래 말하지 못하고 말았던 것이다.

 

아마 3.8선을 넘어 올 생각으로 그 근처에 왔던 것 같은데 내가 그렇게 느꼈다고 섣불리 털어 놓고 말 할 수도 없는 형편이었기 때문이다.

 

1948년 설날에 나는 다시 적전학교의 전직교사들과 함께 유치장에 끌려가게 되었다.

 

"스탈린 초상화 총격사건'이 난지 1년 쯤 되자 관련되었던 사람끼리 울타리도 없는 우리 집에 모여서 지나간 이야기를 한 것 뿐이었는데 미운 사람으로 찍혔기 때문에 지서에 있던 보안서원들이 트집을 잡은 것이다.

 

우리는 전에 있던 유치장의 어느 일본식 다다미 방에 감금 당했지만 다음 날 아침 본서로 넘겨진 뒤에 그들은 아무 설명도 없이 우리는 풀어 주었다.

 

불쾌하다기 보다는 불안한 마음이 스미는 일이었다.

 

그런 일이 있은 후,

 

마침내 나는 월남을 결심하게 되었다.

 

이제 고향은 내마음에서 자꾸만 살벌하게 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잊을 수 없는 1948년 5월1일, 이른바 '메이데이'라고 불리는 세계 노동자의 명절에 나는 원산을 떠나게 되었다.

 

형편상 당시의 내 심경은 너무 절박한 상태였다.

 



3-14

그래서인지 고향과 가족을 남겨둔 채 떠나면서도 마음은 미처 슬픔을 돌아 볼 여유마저 없었다.

 

그 날, 세계 노동자의 날 행사가 열리던 원산 역전에 모인 월남 할 우리 일행은 철원까지 오는 차표를 샀다.

 

월남한다는 생각 때문에 개찰구를 나갈 때는 참 잡히지 않을까 그랬는데 무사히 통과하게 되었다.

 

역전 광장에는 아직 흩어지지 않은 군중들이 있었다.

 

사실 떠날 마음을 정한 뒤에도 내겐 한동안 동네의 불길한 소문이 들렸다.

 

떠난다던 사람이 가지 못하고 도중에 잡혀 경찰서에서 고생한다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떠나지만 과연 살아남을 수 있을까 하는 불안에 싸였기 때문에 처음에는 개찰구만 빠져 나간 것도 여간 다행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우리가 탄 경원선은 목적지가 서울이었지만 연천까지만 가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삼팔선을 넘으려면 철원에서 내려야 했다.

 

도중에 검문은 없었는데, 열차가 철원에 거의 다가오자 "손님 여러분, 긴 여행에 수고 많으셨습니다..

 다음은 철원역입니다. 잊으신 물건 없이 목적지까지 안녕히 가십시오"라는 축복처럼 들려서 참 고마운 느낌이 들었다.

 

철원에 내린 우리는 걷기 시작했다.

 

같이 떠난 처남과 알고 있는 사람을 합쳐서 일행은 일곱이 되었고, 우리는 안내자를 따라서 밤길을 이용했다.

 

낮보다는 아무래도 더 안전하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평상시에 입던 흰옷 위에 오징어짐을 일본식 영어발음인 '룩작'에 멘 장사꾼 모습이었다.

 

어둠을 타면서 우리는 어느 나룻배가 있는 지점까지 오는 한참 동안 고개와 산을 넘고 들을 걸었다.

 

거기가 어딘지 처음엔 몰랐으나 곧 임진강가 였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나룻배로 그 강을 건넜을 때는 벌써 날이 새고 있었다.

 

우리가 지나가는 논밭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보기엔 어딘가 이상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는 눈초리였다.

 

그 시선을 뒤로 하면서 우리가 어느 고개를 넘었을 때 어디선가 갑자기 멈추라는 소리가 들렸다.

 

순간, 나는 '아, 여기까지 무사히 왔다가 이제 잡히는구나!' 하는 생각이 스쳤다.

 

우리는 열심히 변명을 하며 위기를 넘기고자 하였다.

 

그들에게 "우리는 아주 남쪽으로 살러 가는게 아니고 장사하는 사람들인데 갔다가 다시 돌아오려고 가는 일행이다"라며 한참을 얘기하자 그 말을 믿어주었던지 마침내 그들은 "그럼 당신들 장사하는 길로 떠나도록 하시오." 그러는 것이었다.

 


3-15

거기서 삼팔선은 그리 멀지 않았다.

 

이제 위기를 모면한 우리는 계속 개울과 골짜기를 지나게 되었다.

 

농사짓는 사람들이 계속 보였다.

 

드디어 삼팔선을 십리 앞에 두고 우리가 어느 외딴 집에 안내되었을 때는 한 낮 12 시 쯤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낮에는 더 이상 갈 수가 없다고 하길래 할 수 없이 밤중이 될 때까지 밥값을 내어 저녁까지 먹고 기다리기로 하였다.

 

이어 밤이 이슥해지자, 안내자를 앞세운 우리 일곱 명은 한 사람씩 앞 사람을 잊어먹지 않을 만큼의 거리를 둔 채, 마지막 산골짜기를 타고 있었다.

 

안내자는 경험이 많은 이였다.

 

어느 지점에 감시자가 있는지를 벌써 알아서 피해 나갔다.

 

게다가 삼팔선을 지키는 이들도 계속해서 불침번을 서지는 못하는 것 같았다.

 

그런 틈을 이용해서 그는 묘하게 거기를 통과하는 것이다.

 

안내자를 따라서 우리가 얼마를 지나왔을 때, 지금 생각하면 한탄강에 닿았던 모양이었다.

 

아랫도리를 벗고 짐은 '룩작' 에 그냥 진 채 물속에 들어가자 키는 넘지 않았지만 가슴까지 찬물이 닿았다.

 

그 때는 마침 비가 와서 평소보다 물이 불었다는 것이다.

 

우리가 어딘지 모를 곳을 지나자 닭 우는 소리가 들렸고, 이어서 안내자는 '여기가 삼팔선이다' 라고 가리키는 것이었다.

 

'아!이제 넘어 왔구나' 그러면서 우리는 팻말도 없는 '삼팔선'이라고 말하는 지점을 지났다.

 

마음의 삼팔선도 함께 넘었던 것이다.

 

나는그곳을 정말 넘어 온 것인가.......

 

아직도 어제같은 5월5일 새벽이었다.

 

안내자는 우리가 삼팔선을 넘었을 때 이미 돌아갔다.

 

안내자에게는  얼마인지 모를 꽤 많은 돈을 준다고 들었지만 자세한 액수는 지금도 모른다.

 

어쨌든 그 비용은 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얼마 앞에 불빛이 보였다.

 

'혹시 아직도 여기가 북쪽 땅이 아닐까?' 걱정했지만 그것은 남쪽 초소였다.

 

이미 일행은 흩어졌기 때문에 진주 형님과 나 둘 뿐이었고 그냥 가서는 안된다는 사람의말을 따라 우리는 포천군  창수라는 지서까지 가야했다.

 

그 날 밤, 어느 집에 안내 되었다가 날이 밝아 올 무렵 우리는 무슨 연락이 와서 그 지서에 도착하였다.

 



3-16

다음 날, 6일 명륜동에 있는 처남을 찾아 서울로 출발 할 때까지, 우리는 북쪽에서 나운 사람을 묵게하는 수용소에서 저녁을 먹으며 하룻밤을 지냈다.

 

한편, 원산에는 4촌, 5촌, 그리고 작은 할아버지가 계셨지만 4촌을 제외하고는 떠날 때 아무에게도 월남한다는 이야기를 하지 못했다.

 

나중에 그들은 내가 무사히 월남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므로 가족도 그 해 6월 말경 넘어오게 되었다.

 

내겐 왜정 때 중학교에 다니다가 맹장염에 걸려서 죽은 동생과 또 어려서 죽은 두 동생 말고도 또 다른 두 명의 친동생이 있었는데 그 동생 하나, 네살 먹은 큰 아이, 그리고 처남 댁이 우리집 식구와 함께 내 뒤를 따라 넘어 온 것이다.

 

당시에는 아직도 생존하셨던 조부모가 계셨고, 남아 있는 동생 하나는 지금도 눈에 선하다.

 

(비를 맞으며 걸었던 낯선 땅)

 

서울은 낯선 곳이었다.

 

경험이라곤 왜정 때 (창평) 아이들을 데리고 박람회 구경을 한 번 했던 것이 전부였다.

 

북쪽에서 생활한 경험도 교원이니까 여기서도 어떻게 하는 수가 없어서 교원을 희망하였다.

 

그 때 집안 아저씨 뻘 되는 분이 고양군청에 근무하고 계셨고 그 사무실이 지금의 동대문 운동장 근처에 있었다.

 

그 분이 고양 군청 학무과에 이력서를 내라고 해서 냈지만 얼른 발령이 안나므로 나는 다른 사람의 말을 듣고 경기도에 다시 지원을 하게 되었다.

 

그러자 거기서 어느 곳을 지망하느냐고 묻길래 가까운 바다가 낀 시흥군을 선택하였다.

 

과거 바닷가 근처에서 근무하던  (여해진)시절이 그리웠기 때문이다.

 

당시 발령은 정부수립 직전이었으므로 미군정하의 경기도 지사가 했고, 이력서에는 'p & t'라고 썼던 기억이 있다.

 

무슨 교사를 나타낸 것인지 알 수 없으나 아마도 군정청하의 기관이니까 그랬던 것 같다.

 

그리고 발령이 날 때까지 나는 친척 아저씨의 소개로 당시 미아리 고개 근처에 있던 고양군 숭인면 면사무소에서 임시로 일을 보며 기다리고 있었다.

 


3-17

그 해 7월 말, 궁금하길래 경기도 학무과에 가 보니 7월 초에 시흥군에 있는 군자국민학교에 이미 발령이 나 있다는 것이다.

 

서울에 왔다지만 그 때까지 한강을 건넌 일이 없었던지라 지도부터 살펴야 했다.

 

보니까 영등포도 있고, 시흥도 있고, 그래서 나는 군청 학무과가 시흥에 있으리라는 생각에 기차를 타고 시흥역에 내렸다.

 

거기서 군청이 어디 있느냐고 물으니 안양에 있다는 것이다.

 

다시 버스를 타고 안양에 갔다.

 

안양에 도착하니까 수원까지 기차를 타고 다시 수원서 인천가는 수인선을 타야 했다.

 

왜정 때도 군에 가서 내가 어느 학교 발령을 받은 사람인데 처음 가는 길이니까 어떻게 가느냐고 묻고 간 기억이 났다.

 

나는 군포 다음인 수원역에 내렸는데 기차가 떠난 뒤에 보니 거기는 부곡이었다.

 

내리고 보니 내린 사람도 많지 않고 건물도 초라한 것이 조금 이상하긴 했었다.

 

수원은 그 다음 역인 것을 모르고 착각을 한 것이다.

 

 그 날 준비해 간 우장을 가지고 수원까지 비를 맞으며 걸어 갔다.

 

그래서 수원에 늦게 도착했기 때문에, 기다렸던 수인선을 탄 나는 물어 볼 것도 없이 군자역에 내렸다.

 

군자역이 (군자국민학교)가 있는 곳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역에서 보니 저 만큼 둔덕에 학교건물이 있었다.

 

'아! 이제야 다 왔구나' 마음을 푹 놓고 학교에 들어 갈 준비로 그 앞에 흘러가는 물에서 엉망이 된 발을 씻었다.

 

그리고 정문에 다가 갔을 때 나는 또 한번 실망하였다.

 

이름이 (군서국민학교)였기 때문이다.

 

물어 보니까(군자)는 10리를 더 동쪽으로 가야 있다는 것이다.

 

다시 걸어서 마침내 그 학교에 도착했을 때는 여름 날이 어두워지던 늦은 저녁이었다.

 

방학 때 이므로 일직 선생 정도는 있어서 연락을 해 놓고, 그 다음 날 교장을 만나고서 서울로 돌아왔다.

 

7월 스무 며칠이었을 것이다.

 

서울에서 내려 갈 준비를 하는데 가족들도 같이 가야 했으나 사실 여비가 없었다.

 

어디 누구에게 부탁 할 수도 없는 처지여서 나는 다시 군자학교에 혼자 내려가기로 하였다.

 

나는 '교장이나 교감한테 약간 여비를 얻어서 옮겨야겠다'는 마음 먹었다.

 

이번에는 길을 아니까 수원을 통해서 갈 작정이었는데,  나는 우연히 교감을 만나게 되었다.

 

사정을 말하자 교감은 자기도 서울에 볼 일이 있어서 오는 길이라며 거기를 갔다가 또 돌아 가고 그러면 힘들겠다며 "내가 교장과 의논해서 서울 주소로 전해 주겠다"는 고마운 이야기를 내게 하는 것이었다.

 



3-18

그리하여 집으로 돌아 온 얼마 뒤에 이승만 박사가 있던 이화장 근처에서 만난 교감한테 나는 여비를 전해 받을 수 있었다.

 

나는 새 부임지에서 8.15를 뜻있게 맞자고 8월14일 저녁에 군자 국민학교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다음 날 정부수립을 겸한 경축식에도 참가한뒤 금호분교에 근무하게 되었다.

 

거기 있던 이가 본교로 오게 되었기 때문에 내가 대신 가게 된 것이다.

 

금호 분교에서는 나 말고 또 한 사람이 같이 근무하였다.

 

마치 황곡 간이 학교 생각이 났다.

 

(남쪽 넘어와서 한 소련식 체육수업)

 

비록 학교생활이 낯익은 경험이라 해도 남한 땅에서의 출발은 낯선 것일 수 밖에 없었다.

 

1-4학년 까지 분교에서, 5-6학년은 본교에서 공부하였는데 나는 다음 해 9월 이전에 본교로 옮겨 와서 2학년을 맡다가 49년 부터는 6학년을 가르치게 되었다.

 

그 때는 학기가 9월에 시작되었고, 교과서도 아직 없었다.

 

배급 종이에 프린트 한 교재가 있었는데 분량이나 내용이 미국의 것을 본 받은 것 같았다.

 

교과목도 사회가 아니라 사회생활 등으로 불리웠다.

 

거기다 내 남쪽 생활에 대한 것 만큼이나 아이들도 나에 대해서 낯설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예컨대, 학생들이 청소라든가 공부 때문에 남아 있는 것을 북쪽 우리지방에서는 '짙어 있다'고 말한다.

(짙다 : 깉다의 사투리)

 

또한 "5에서 3을 빼면 얼마가 짙느냐?고 한다.

 

나는 나중에 가서야 '남는다'라는 말이 '짙다'와 같은 뜻인지 알게 되었다.

 

해방 직후에 어느 것이 표준말인지 아닌지 모르고 썼기 때문이다.

 

그것은 다른 선생님 한 분이 내가 아이들과 선생님들이 못 알아듣는 말을 한다는 사실을 알려 준 뒤였다.

 

그 밖에 체육시간에 생긴 일도 기억이 난다.

 

말하자면, 구령 방법이 왜정식, 소련식, 미군식 등으로 달랐기 때문이다.

 

왜정 때는 '열중 쉬어' 하면 양손을 뒤로 하지 않고 왼발만 내민다.

 

그러다가 오래하면 체중이 실리니까 발을 바꾸고 싶을 때 차려를 했다가 다시 바꾸는 것이다.

 

그런데 해방후 소련군이 와서는 '열중 쉬어'를 한쪽 무릎만 구부리도록 한 것이다.




3-19

내가 북쪽의 (적전학교)에 있을 때, 교장은 그런 일에 익숙하지 못한 이였다.

 

단상에 올라가서 '열중 쉬어'를 했지만 아이들은 그에 따르지 않았다.

 

그래서 들어 간 뒤에 "왜 안했느냐?고 물어 보면, "아! 이렇게 했는데...."

 

교장 눈에는 띄지 않았던 것이었다.

 

말하자면 학생들은 소련식으로 했지만 교장은 소련식을 몰랐기 때문이다.

 

이 남쪽에 넘어 와서 나는 처음에 소련식으로 하였다.

 

그러다가 나중에 "아! 이렇구나"해서 그 다음부터 따라하게 되었는데,

왜정식이나 소련식이 아닌 미국식인 것 같았다.

 

'차렷'은 다  같았던 것 같았지만 "뒤로 돌아갓'은 미국식,왜정식, 소련식 다 달랐다.

 

그러니까 우리식은 없었다고나 할까.

 

나는 황곡에서 해방의 기념으로 첫 모임을 치를 때 '차렷'을 어떤 구령으로 해야 할 지 몰랐던 일과 '나란히'를 "손들어"! 하던 기억이 다시 새삼스러워졌다.

 

나는 군자국민학교에 오기 전까지 4학급 밖에 없는 학교에 있었으므로 18학급은 그 때가 처음이었다.

 

그러나 그 학교에서 내 생활은 무척 어려운 것이었다.

 

처를 북쪽에 두고 넘어 온 젊은 함경도 출신의 선생이 하나 있었다.

 

사택에 살던 우리는 우리 형편이 그런 만큼 학교 실습지에다 농사를 짓기로 하고 북쪽의 풍습대로 우선 감자를 심었다.

 

학교 화장실에서 거름을 지어다 뿌리기도 하면서 지은 감자 농사는 그 근처에서도 눈에 띄었던 모양이다.

 

이웃들이 "그렇게 넓게 감자 심은 적은 없었다"고 말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남쪽으로 피난 온 사람이니까 마음으로 라도 도와 주려는 이들이 있었다.

 

학부형 한 분은 옷도 자리도 없는 나에게 무슨 도움을 주려고 움직이는 모양이었다.

 

그 문제를 의논하기 위해서 한 번은 교장이 분교에 왔었는데 생각 끝에 우리는 결국 거부하기로 하였다.

 

비록 북쪽에서 왔기 때문에 사정이 어렵다 하여도 직원이 둘인데 한 사람만 돕기도 무엇하고 기타 다른 사정 등으로 한 결정이었다.

 

그 해는 그렇게 넘기고 다음 해 7월부터 본교 6 학년을 맡았다.

 

49년 9월에 내가 맡은 6학년 학생들은 한 6개월 동안 공부하고 졸업하게 되었다.

 

바로 그 해 6.25가 났다.

 

실습지에 심은 감자도 영글어 살림에 꽤 보탬이 되었을텐데 그것을 그냥 두고 나는 피난을 가야 했다.

 



3-20

(백남훈이 강연하던날)

 

누군가 6.25를 네 가지 성격으로 진단하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미국과 소련의 입장에서  보면 '대리전'이요, 북쪽 입장에서는 '해방전'. 남쪽의 입장에서 보면 '방어전'이고,

그리고 우리 동포끼리 싸운 걸로 보면 '내전'이라고, 그렇게 들었지만 정말 그런 것을 나는 잘 모른다.

 

그 전쟁은 내게 더 없이 견디기 어려운 일이었다는 것 밖에는 모른다.

 

그 삼년 내내, 나는 아무 대책도 없이 여기 저기를 옮겨다녀야 했다.

 

그러니까 그 일요일은 나와 같이 근무하다가 이웃 학교에 전근을 간 동향의 박선생과 며칠 전에 연락했던 대로 만나기로 약속한 날이었다.(박선생=박승섭선생)

 

그래서 10리쯤 걸어서 군자역 근처에 나가 그와 함께 하루종일 점심도 먹고 저녁때까지 이야기 하다가 늦게 돌아오는 도중이었다.

 

그런데 들리는 얘기마다 삼팔선에서 큰 교전이 있었다는 것이다.

 

동네에 오니까 얘기는 더 자세해졌고 그 다음 날부터  분위기는 술렁거리기 시작하였다.

 

다음날 26일 월요일은 아무 연락도 없이 수업이 자동으로 없어졌고,직원들도 출근하지 않았다.

 

교장도 나오지 않았다.

 

그 날 나는 우연히 멀리 시흥쪽에서 공중전을 하다가 떨어지는 비행기 한대를 보았다.

 

어떤 때는 낙하산 타고 내리는 것도 보였다.

 

폭격을 당해서 연기가 오르는 것 같은 모양도 구경했다.

 

그러다가 27일인가, 북쪽  땡크가 내 있는 곳까지 왔다는 이야기를 듣고서야 나는 당황해서 피신을 서둘렀다.

 

곧 우리가족은 어디 쯤 간다는 생각도 없이 그곳을 떠났다.

 

언뜻 '땡크는 논으로 다니지 못하겠지' 그래서 논쪽으로 가는게 안전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논으로 가다가 들으니까 나뭇가지로 위장한 차를 어떤 사람이 북쪽 차라고 잘못 전해서 피했으나 다시 '아니다!' 그래서 되돌아 오기도 하였다.

 

처남은 한강을 건너서 저녁 때 쯤에 가까이 있는 친척을 찾아 오느라고 나한테 왔는데 그 때 국군이 다시 진격할 것이라는보도를 듣고 모두 안심하고 있던 형편이었다.

 

그러나 30일 쯤 될까, 새벽에 일어나 보니, 그 전날까지 순경들이 있던 지서가 철수해서 텅 비어 있는 것이었다.

 



3-21

순간, "아. 위험하구나"하고 우리집에 모였던 처남, 동서 모두 수원 쪽을 향해서 떠나기로 했다.

 

우리는 전북 이리가 목표였다.

 

거기에는 처남이 월남 후 근무하던 이리고등농림학교가 있었기 때문이다.

 

수원역까지 걸어 갔는데, 마침 거기에 열차가 있었다.

 

부상병을 실은 대전행 열차의 차량 지붕 위에는 피난민들이 탔고 우리도 그들처럼 거기에 실려서  아마 31일 밤인가 대전의 어느 국민학교 교실에 마련된 수용소로 옯겨졌다.

 

다음 날 아침, 우리는 대전역전에서 미군 한 중대병력이 행렬을 이루며 지나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7월 1일 무렵에는 "내가 너무 겁을 내서 많이 내려 왔구나" 하는 생각도 났고, 방송도 밀리는 얘기는 거의 없이 듣는 이를 안심시키고 있었다.

 

이리에서 나는 장선생과 함께 처남 댁으로 갔다.

 

그 곳은 평온했다.

 

우리는 시내 거리를 다니기도 하고 어떤 때는 도서관에 가서 책도 꺼내 보았다.

 

그러던 어느날, 7월5일 쯤이었던 것 같은데 정치인 백남훈씨가 이리극장에서 강연한다는  소식을 듣고

그것을 들으려고 나는 장선생과 같이 한 12시쯤에 극장에 들어가 앉아 있었다.

 

강연은 12시 시작이었다.

 

12시가 거의 되었을 때, 순간 "꽝"하는 엄청난 굉음이 들리며 극장이 무너졌다.

 

가장자리에 있던 나는 출입구가 멀지 않아서 다행스럽게 몸이 밀려 밖에 나오게 되었다.

 

나와서 보니까 피투성이가 되어 지나가는 사람들이 보였다.

 

나는 나란히 앉아 있던 장선생을 생각 할 틈도 없었다.

 

그 때 공중에는 비행기가 날고 있었고 어디로 갈지 몰라서 우물쭈물하다 보면 비행기는 또 저만큼 앞에 보이곤 했다.

 

나는 금방 폭격  할 것 같아서 옆에 마침 새끼꼬는 기계와 새끼타래가 여기 저기 있길래 그걸 얼른 뒤집어 쓰고 말았다.

 

그와 동시에 "다다다다다' 기관총 소리가 났다.

 

그러자 앞에 있던 기와가 "두두두두두" 떨어지는 것이었다.

 

비행기가 갈기고 간 뒤에 더 이상 머룰러 있을 수 없어서 뛰쳐 나와 어느 논 옆까지 왔던 나는 모내기 한 직후인지라 움푹 커다랗게 패인자국이 논 한가운데에 있는 것과, 그옆에는 흰 옷 입은 사람이 쓰러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농부들이었다.

 

조금 후, 무슨 단원들인지 트럭을 타고 다니면서 확성기로 알리는데 "이제 적기가 물러갔으니 안전하다.

집에 돌아가도 좋다"는 소리가 울렸다.

 



3-22

집으로 돌아오니 식구들은 다행스러워 하는 것 같았다.

 

밖에 나갔던 사람이 어떻게 됐는지 궁금했었는데 마침 돌아왔기 때문이다.

 

(지프 탄 미군이 처남을 찌르고 가다)

 

차츰 인민군이 내려오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이리 시청엔 공고문이 나붙었다.

 

무슨 일을 도울 수 있는 사람은 몇 시까지 어디로 와 달라고 해서 장선생과 같이 거기를 갔다.

 

갔더니 어떤 집이었는데 동적부 비슷한 것을 주면서 연령, 몇년 생부터 몇년 생까지 적으라는 것이다.

 

우리는 소집영장을 만드는 기초작업임을 얼른 알 수 있었다.

 

시키는대로 우리가 그 일을 하며 하루가 지났을 때 하늘에 또 적기가 나타났다.

 

7월15일 쯤이었으리라.

 

그 땐 집안에 있었는데, 3-4대의 비행기가 이리시를 빙빙 돌다가 되돌아 가는 것이었다.

 

그것은 간단한 비행기 소동으로 끝났지만 이리시는 온통 우왕좌왕 하는 사람으로 가득찬 채 매우 복잡하였다.

 

또 우린 떠나야 했다.

 

처남 댁 식구들을 포함해서 모두 20여 명이나 되었다.

 

우리는 무조건 남쪽으로 내려가기로 했다.

 

거기서 전주까지 80리 라고 했던가.

 

한 30리를 지났을 때 벌써 인민군이 뒤에 와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바로 뒤에 쫓기는 형편으로 가는데 전주를 지나서 저녁 때 전주 다음역인 신 무슨 역에 닿았다.

 

가는 도중에 우리는 장정들을 가득 실은 열차를 보았는데, 그들은 다름 아닌 앞에서 뽑았던 징병자들이란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들에게 줄 영장을 만들던 작업을 하루동안 했던 일이 떠올랐다.

 

그런데 남쪽으로 내려가는 피난민 대부분이 그 지방 사람들이 아니라 북쪽에서 넘어 온 우리 같은 사람들이란 것을 알았다.

 

남쪽 사람들은 사실 피난 갈 일이 없었을 것이다.

 

다음 날 새벽에 내린 곳은 남원이었다.

 

7월17일이나 18일 것이다.

 

가져 온 솥으로 밥을 해 먹은 후, 우리는 더 내려가는 차를 탔다.

 

이번에는 차 꼭대기에 모두 올라 탔다.

 

차표가 있을 리 없었다.

 

그렇게 그냥 타고 본 그 자리들도 여유가 전혀없이 빽빽하였다.

 



3-23

제각기 조심을 해야 했으므로 떨어질 염려는 없었지만 터널을 지날 때 연기는 우리를 몹시 괴롭혔었다.

 

그렇게 해서 내린 곳이 순천이다.

 

아무래도 전주보다 평화스럽게 느껴졌다.

 

순천서도 우리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무작정 걷는 중에도 농민들의 따뜻한 대접은 정말 고마운 것이었다.

 

우리들 한 20명이 무리를 지어 어느 부락에 도착하면 이장 즘 되는 사람이 몇 사람씩 나누어서 이집 저집에 묵게 하고 저녁도 주는 것이었다.

 

어떤 때는 잠 잘 때만 헤어지고 모두 모여서 먹도록 해주기도 하였다.

 

그러면서 우리는 하동에 도착했다.

 

우리는 거기서 어느 극장에 마련된 수용소에 들어가게 되었고 주먹밥도 나누어 받게 되었다.

 

그런데 우리는 우연히 하동 군청이 중요한 서류를 옮기게 된다는 것을 알고 사정 사정하여

군청 직원들이 이용하는 차를 탈 수 있었다.

 

탈 자리가 없자 장선생과 나는 타지 않고 걷기로 하였다.

 

그렇게 진주로 지금 가고 있지만 아는 집이 있어 찾아가는 것도 아니고 먼저 간 가족들을 찾을 일도 막연할 뿐이었다.

 

도중에 길이 어떻게 되는지, 얼마나 걸리는지 생각도 없이 그냥 남쪽으로만 갔다.

 

하기는 이만큼 왔으니까 안심도 되고 가족들도 내가 고집을 부리니까 더 말리지 못했던 것이다.

 

떨어져 가면서, 우리는 한 이틀 밤은 아무렇게 아무데서나 잤던 것 같다.

 

그러나 진주에 도착해서 우리는 진주사범에 수용된 가족을 바로 찾을 수 있었다.

 

진주에서는 젊은이를 모집하고 있었다.

 

정식으로 소집하는 것이 아니라 여럿이 쉬고 있으면 붙잡아서 어느 부대의 인원을 채우는 방식이었다.

 

혹은 군대에서 나와가지고 지나가는 부락민을 나이로 보아 데려가는 것이었다.

 

나에게도 물어 보는 사람이 있었는데 치질이라 하여 실제 까보고 틀림없으므로 그냥 가라고 한 적이 있다.

 

며칠이 지나자 우리는 다시 진주를 떠나야 했다.

 

인민군이 점점 가까이 오고 있다는 것이다.

 

집집마다 하얀 천으로 지붕을 덮으라는 명령이 있었다.

 

미군기가 지나가다가 포탄을 떨어뜨릴 곳인지 아닌지를 분간할 수 있도록 시켰기 때문이다.

 

걷거나 트럭을 타면서 우리는 마산에 도착했다.

 

마산에서 우리는 꽤 여러 날을 머물렀다.

 

그 중에는 북쪽 비행기가 어느 하룻밤에 기총소사를 한 때도 있었다.

 



3-24

한 고개만 넘어가면 일선이니까 땡크를 많이 보았다.

 

그래서 마산도 떠나야 했다.

 

우리집 큰 아이는 그 때 네 살이었는데. '룩작' 짐 위에 그 아이를 태우기도 하면서 우리는 (진영)이라는 데를 지나가게 되었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서로 떨어져서 걸어가던 일행에 뜻밖에 미군 지프가 다가들었다.

 

그들은 나한테 무슨 말을 하다가 다시 뒤에 따라오는 처남과 같이오던 사람에게 가더니 다짜고짜 칼을 꺼내서 등을 찌르는 것이 아닌가.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들이 지나간 뒤 등을 찔린 처남은 길 옆의 어느 집에 들어가 된장을 달래서 칼 맞은 곳에 붙었다.

 

이어 가까운 병원에 가서 응급치료를 받았는데 다행히 상처는 깊지 않았다.

 

그 미군병사들은 처음에 성냥을 달라고 그랬다는데 잘 듣지 않는다고 두 사람을 찌른 것이다.

 

그들은 전쟁 기분을 냈는지 모르지만 우리 심정은 무어라고 해야 할 것인가?

 

부상자가 생겼으므로 우리는 (한얼중학교)라는 아직 완성되지 않은 학교에 수용되어 더 가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8월 15일이 되었다.

 

(피난 중에 전투경찰대원이 되고)

 

1950년 8월 15일,

 

읍인지 면인지 모르지만 사무소 직원이 나와서 오늘 몇 시까지 모든 피난민은 떠나라, 여기도 위험하니까 철수하라, 낙동강을 건너가야 된다, 그러면서 직원 중 한사람이 가는 길을 안내하는 것이었다.

 

환자도 웬만큼 무리해서 걸을 수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일주일 쯤 지난 그날 거기를 떠나게 되었다.

 

그렇게 낙동강 가에 왔지만 철교를 앞에 두고 우리는 건널 수가 없었다.

 

철교는 군용차가 가끔씩 오가기도 했고 또 철도 경비원이 있어서 건너고 싶어도 마음대로 들어설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할 수 없이 우리는 한 사흘 후에 건널 때까지 그곳 경비원들과 이야기도 하고 잠도 자면서 기다려야 했다.

 

우리가 사흘 후 경비원에게 허락을 받고 건너보니 철교는 꽤 길었다.

 

건너가서는 낙동강의 제방 옆에서 여러 날을 묵었다.

거기는 밤에는 그런대로 견딜 수 있었지만, 낮에는 태양열로 데워진 땅이 발도 대지 못할 만큼 뜨거운 곳이었다.

 



3-25

그 때 정부는 대구를 떠나 부산에 간 뒤였다.

 

내무장관 조병욱이 대구를 지킨다고 할 무렵에는 우리가 삼랑진에서 얼마간 머무르고 있을 때였다.

 

인민군이 가까이 왔다는 소리도 들리므로 우리는 다시 부산까지는 가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운명을 생각했는지 안했는지 나는 모른다.

 

거기가 끝인지 아닌지 모른다.

 

하여간 부산 가는 길은 정말 어려웠다.

 

피난민이 다니면 작전에 방해가 된다고 될 수 있는 대로 막았기 때문이다.

 

하룻밤을 자고 물금이란 곳에 도착하여 또 하룻밤을 지낸 그 다음 날 아침 정거장에 가 보니 거기서는 표를 팔고 있었다.

 

아직도 부산을 가려면 며칠 걸리는 거리에 있는게 분명했다.

 

표를 사가지고 부산 본역이 아닌 부산진인가에 내렸을 때,우린 오랫동안 걷는 일을 그칠 수가 있었다.

 

순경이 찾아 온 날은 수용소에서 하룻밤을 보낸 다음날이었다.

 

그가 신분증을 내놓으라고 해서 갖고 있던 도민증을 내놓으니까 가가운 지서로 몇 시까지 나오라는 것이다.

 

그 시간에 맞추어 갔더니 거기엔 나 같은 사람들이 여럿이 있었고 한 참이 되자 우리는 준비된 트럭에 태워져 수상서로 갔다.

 

그리곤 전투경찰학교 대원으로 지원하라는 것 아닌가?

 

전직이 무엇인지는 물어 보지도 않았다.

 

자발적 지원일 리가 없는 순전히 강제였다.

 

수상서에 오기 전에 주임인가 하는 사람이 우리를 모아 놓고 일장 훈시를 했던 일이 떠올랐다.

 

"자, 이제 적이 가까이 왔는데 만약 적이 부산까지 왔다면,우리들은 총칼을 갖고 있으니까 어떻게라도 할 수 있지만 당신들은 우리가 떠나면 어떻게 하겠는가?

 

우리 같이 힘을 합쳐 막아야 되지 않겠느냐?"

 

그 때부터 경찰학교에 실려 간 우리들은 모두 전투경찰대원이 되었다.

 

훈련은 그 다음날부터 시작되었다.

 

입고 다니던 복장 그대로 경찰학교 운동장에서 한 소대끼리 둘러 앉아서 날라다 주는 주먹밥을 먹는다.

 

잠자리도 없으니까 시내의 창고에 가서 잠을 잔다.

 

그리고 아침에 와서 또 먹고 빈광장이 있으면 또 거기 가서 훈련을 하고.

 

때로는 시내행진도 한다.

 



3-26

그렇게 지내면서 "무궁화 아름다운 삼천리 강산...." 하는 경찰가를 불렀던것이 지금도 새삼스럽다.

 

그렇지만 그 모습은 참 거지행렬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러길 한 달,

 

훈련이 끝나면 일선근처로 배치되어 작전을 돕는 일을 하게 된다고 들었다.

 

군인처럼 실전은 아니고 주변에서 도와 주는 것 같았다.

 

벌써 배치되어 갔다가 잠깐 휴가를 얻어선지 와가지고 그런 얘기를 하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족들은 그런 일을 까마득히 모르고 있었다.

 

얼마가 지나서야 나는 아는 사람을 통해서 면회 신청을 한 우리가족을 만날 수 있었다.

 

훈련은 대나무로 총 메는 연습도 하다가 맨 나중에는 실총을 잠깐 잡아 보았는데 우리는 그것을 자세히 배울 시간도 없었다.

 

그래도 일요일엔 그 고된 훈련을 쉬었다.

 

그러던 어느 일요일 아침 쉬는 날이라고 생각하며 밥을 먹은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갑자기 전원 집합하라는 것이었다.

 

윗도리를 다 벗어서 소대별로 놓게 하고 밖으로 줄서서 나갔는데 70리나 되는 다대포까지 대원 전원이 구보로 뛰어야 한다는 것이다.

 

1000명 쯤 되던 우리들은 다대포 까지 갔다가 거기서 점심을 먹고 다시 부산으로 70리 구보를 하고 돌아오니까 모두 녹초가 되고 말았다.

 

저녁을 먹은 뒤에는 이제 자는 일만 남은 걸로 알고 안심하고 있는데 또 소집을 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다시 웃도리를 벗고 부산 시내를 한 바퀴 빙 돈 뒤에 정렬하였다.

 

훈련 책임자가 그 때 이렇게 말했다.

 

"이제까지 일요일은 쉬었는데 지금부터는 일요일도 없이  매일 이렇게 훈련을 할 것이다.

 

앞으로 훈련을 견뎌 낼 수 없을 것 같은 사람은 손들라"고 무슨 영문인지 알 수 없었으나 나는 정직하게 손을 들었다.

 

정말 앞으로 그렇게 한다면 힘들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손을 든 사람은 불과 다섯명 밖에 안 되었다.

 

그러자 그 지휘자는 즉시 그냥 나가라는 거였다.

 

나는 낙오는 하지 않았지만 피난민 수용소로 돌아올 수 밖에 없었다.

 

나중에 생각하니, 당시는 인천상륙 직후였고, 전세가  달라질테니까  이렇게 많은 사람은 필요치 않다고 하여 누구는 나가라 그럴 수 없어서 그 날 그렇게 달리면서도 낙오하는 사람들 이름을 다 적었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3-27

(갈등을 일으켰던 어떤 상상)

 

수용소에서 그냥 지낼 수 없었던 나는 미군부대의 일을 찾아 나섰다.

 

거기서 노무자 모집을 한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항공 관계 부대의 노동일이었다.

 

다음날부터 아침에 집합장소에 가면 트럭에 실려서 부대에 가고 저녁에는 다시 집이 있는 곳으로 실려 왔다.

 

그런 중에 9.28 서울 수복이 이루어졌지만 피난민은 아직 들어 오지 못하고 있었다.

 

얼마 후 한강 이남의 경기도 공무원은 임시열차를 탈 수 있어서 나는 아무 계획도 없이 경기도 공무원이

간다고 하니까 지원해서 타고 서울로 향했다.

 

차만 타면 바로 올 줄 알았는데 역마다 쉬기 때문에 영등포까지 오는 동안에 차에서 이틀 밤을 자며 왔다.

 

영등표까지 오기로 했으나 더 못 간다고 해서 시흥역에 내린 다음, 한강 다리 밑에 설치된 부교를 건너서 당시 경기도청이 있는 지금의 중앙청 앞에 왔다.

 

나는 거기서 경기도 학무과 직원을 만나게 되었다.

 

그는 내가 집에 갈 여비도 없고 하니 좀 마련해 주어야겠다고 하자 주저없이 내게 여비를 주었다.

 

아마 다음에 봉급에서 떼는 모양이지만 어쨌든  그것을 주었기 때문에 나는 군자에 갈 수 있었다.

 

얼마 뒤에 우리 가족은 부산서 인천까지 수송하는 큰 배를 타고 와서 만나게 되었다.

 

그런데 나는 뒤에 잔류파니 도강파니 하는 문제가 생긴 것을 보고 안타까왔다.

 

우린 부산까지 갔다 오는데 그런 일을 겪었지만 남아 있던 사람들은 얼마나 괴로왔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돌아온 학교에는 직원들이 그대로 있었다.

 

교장은 그 후에도 얼마가 지날 때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그런데 직원 가운데 (교책)이란  이름으로 근무한 사람이 있었다.

 

교책이란 공산군편의 학교 책임자를 말하는 것이다.

 

교장하던 사람이 교책이 된 경우도 있었고, 군자국민학교처럼 직원 중의 하나가 교책이 되어 그 동안에 활동을 했던 모양이다.

 

내가 갔을 때는 교책을 한 사람이 이제는 숨어서 다니고 그랬다.

 

주민들 중에도 협조한 사람은 국군이 들어온 뒤로 즉결처분 당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3-28

우리가 나가 있는 동안에 인민군들은 군자학교에 들어왔다고 한다.

 

그 때 학교 직원들과 동네 청년들이 그들을 환영하는 만세를 불렀다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는 우리보다 나중에 떠나 온 사람한테 들었던 것인데 경찰학교에 가서 훈련을 마친 다음 일선에도 간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는 '아! 이제 내가 이 훈련을 마치고 일선에 가면 군자학교 선생과도 마주서서 총을 쏘고, 그렇게 되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도 났었다.

 

여하간 과열하게 협조하며 근무한 사람은 직장에 나오기 미안해서 자중하고  있는 그런 형편이었다.

 

교책을 한 사람과 부교책을 한 사람은 나중에 북쪽에 갔다는 소리도 들었지만 만날 수는 없게 종적을 감추고 말았다.

 

그리고 8.15 뒤에 교직원의 인사이동이 있었던 것처럼, 9. 28 수복 뒤에도 인사조치가 학교간에 대규모로 있었다.

 

교사간의 인화를 위해서라든가.

 

(야간열차가 주고 간 생과 사의 열쇠)

 

하여간 우리학교는 직원 18명 가운데 피난을 떠났던 사람들은 넷이었다.

 

나를 포함해서 장선생, 피난을 다니다가 현역에 입대한 교감 고창균씨 그리고 중학교에 다니는 딸을 둔 여선생 이순난씨였다.

 

나머지 14명은 인민군에게 협조한 셈이 되었다.

 

적극적으로 활동한 교책과 부교책을 제외한 12명도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지만 이른바 시키는대로는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남아 있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서울 수복이 되자마자 즉시 인사이동을 시켰던 것이다.

 

물론 그 전쟁 중에도 수업은 계속되었다.

 

이어서 나는 다시 떠나지 않으면 안되었다.

 

1.4후퇴가 시작된 것이다.

 

사실 우리가족은 내가 먼저 떠난 후 썩 늦게야 만날 수 있었는데, 둘째아이가 올라오면서 병을 얻은 상태라 치료를 받아야 했고, 나는 혼자  자취하는 형편이어서 안정도  안된 생활을 하다가 또 그 일을 당한 것이다.

 

그런데 나는 이 때 내 일생에서 가장 뜻 깊은 경험을 하였다.

 

고난이 내게 준 선물이라고나 할까?

 

기사본문 이미지
                                                9.28 수복 이후              

 

3-29

있는 상황이었다.

 

나는 그렇게 당했기 때문에 상황이 어떻게 되었는지 그 순간은 그냥 모르고 지낸 터였다.

 

나중에 다른 사람의 얘기를 들어보니까, 일부는 시체가 굄목에 걸려 흔들리는 것을 보았다고도 하고,

더러는 거기서 뛰어내려 얼음 위에 떨어져 다쳤다고도 했다.

 

그 사고를 당했지만 우리는 오래 지체하지 않고 곧 대열을 만들어 떠났다.

 

'넘어와서 죽지는 않았구나!' 하던 그 날은 1950년 12월 17일 밤이었을 것이다.

 

나는 온 몸의 전율을 느끼던 그 순간을 당하면서 느낀  게 있다.

 

그 날 안양을 떠나면서 다른 사람처럼 도민증이나 학교에 관련된 무슨 증명이란걸 가질 수 있었다.

 



3-30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두 개를 갖고 있었는데, 지휘관들의 지시는 "가지고 있는 증명들 일체를 다 내놓으라"는 것이었다.

 

증명들을 갖고 도중에 빠져서 어떻게 할 생각을 할까봐 누구든 대열에서 이탈하는 것을 방지하려는 이유였다.

 

그것을 알고 있던  사람들은 증명을 내놓는 척 하면서 안 내놓기도 했지만 나는 내 놓으라는대로 정직하게 내놓았던 것이다.

 

'살았다! 하는 그순간, '내가 정직하게 내놓으라고 할 때, 내놓았으니까 마음이 개운해서 사고를 당하지 않았지, 감춰가지고 좀 꺼리낌 같은 것을 느꼈다면 사고를 당했을지 모를 거다'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우연히 살아난 것이 아니라는 어떤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나중에 수복되어서 군포에 있었을 때, 그곳을 다시 걸어갈 기회가 있었다.

 

가보니까 그렇게 긴 다리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내 마음이 굉장히 조급해서 걸어도 걸어도 끝이 나지 않는 그런 느낌이었지만 다시 보았을 때는 한30m 쯤 되는 길이였던것 같다.

 

좌우간 그 경험은 지금까지 정직해야 한다는 믿음을 흔들리지 않게 해주고 있다.

 

우리가 그렇게 17일간이나 걸어서 1951년 1월5일 쯤 도착한 곳은 경상남도 마산 근처의 함안이었다.

 

떠날 때 든든한 군화를 신었는데 거기에 닿고 보니 옆구리가 꿰지고 신지 못하게 될 형편이 되어있었다.

 

우리는 다른 신을 갈아 신을 수도 없어서  철사 등으로 꿰메어 신고 주먹밥을 먹으며  계속 훈련을 받았다.

 

장작을 베거나 나르는 일도 했다.

 

그 훈련병 속에는 북쪽에서 1.4후퇴로 거제도까지 왔다가 들어 온 사람도 있었다.

 

그런데 가끔 현역병을 보충하기 위해서 지원을 받던 일이 있었다.

 

한 번은 일선에 나가야 되겠다고 지원을 했지만 역시 치질이 문제가 되어서 그만 못가게 되었다.

 

그것은 전투에 참가라도 해 보자는 호기심이 아니라 그 만큼 거기 생활이 하도 지겨웠기 때문이었다.

 

우리 두 소대는 어느 국민학교에 머물렀는데 저녀 때가 되면 본부에 가서 하기식을 하였다.

 

얼마 후, 근무 중대원이 필요하다면서 중졸 이상 되는 사람들을 형식적으로 시험을 보아서 뽑았고,

나도 그렇게 되어 한 달 쯤 보초를 서는 등의 일을 한 적이 있다.

 



3-31

그런데 우리들의 모습은 말이 아닐 정도였다.

 

1950년 여름의 거지 행렬과 비슷했기 때문이다.

 

입고 간 옷이 그런데다가 인원은 많고 먹고 자는 것도 형편이 없어서 대원 가운데는 몸이 쇠약해지거나

더러 죽어 상여가 나간 경우도 몇이 있었다.

 

군대가 부패했기 때문에 희생당한 것이다.

 

책임자로 김윤근이가 사형당했고 동시에 이어 4월에 그것은 해체되었다.

 

저 유명한 (국민방위병사건)이라고 알려진 현장이 바로 거기였다.

 

우리가 떠날 때는 제대라고 그러는 것인지 몰라도 현물로 쌀도 주고 돈도 주고 그랬다.

 

계급은 없었지만 좀 젊은 사람은 소대장이 된 적도 있었다.

 

(전쟁중에도 거짓말 하는 국회의원)

 

함안에서 제대가 된 나는 마산까지 걸어가고 거기서 부산까지는 배를 타고 갔다.

 

4월 봄날에 나는 부산의 어느 수용소를 찾아 가 거기서 하룻밤을 묶고 다시 군자로 오게 되었다.

 

물론 그 동안에 우리 가족과는 아무 연락이 없었다.

 

당시 형편으로는 중공군이 넘어와서 우리가족이 있는 곳까지 지났을 것 같은 생각이 들어 불안한 마음이었다.

 

우리가 부르던 군가에 "아내여, 이 세상 굳세게 사소서" 그런 것도 있었는데, 집에서 떠나온 사람이라 궁금했지만 별 도리가 없는 일이 아닐 수 없어서 아주 체념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런 현실에서도 정치한다는 사람은 역시 정직하지 못했다.

 

어느 날인가, 훈련 기간중인데 시흥군 국회의원을 하던 이재형이 왔었다.

 

세상에 잘 알려져 있다시피 그는 오랜 야당생활과 그 원로로 지내오다가 전두환 정권하에서 국회의장까지 했던 언물이다.

 

그 시절, (국민방위병)이 해체되기 직전 어느 날  국기 하기식 때였다.

 

그는 격려차 우리들에게 말하길 "군자면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가 전라도 어느쪽으로 피난 했으니까 안심하라"고 집걱정을 말라는 그의 말에 우리는 고마운 마음으로 그런가보다 하면서 그대로 믿고 있었다.

 

그러나 와서 보니까 계획적으로 안전하게 보낸게 아니고 그저 제각기 떠나간 것이었다.

 

피난민들의 생사가 걸린 문제를 그토록 가볍게 입발림을 할 수 있다는 심사는 도대체 무엇인지 모른다.

 


 

 

3-32

함석헌 선생은 정치한다는 자들을 (정치업자)라고 했던가......

 

그런 인물들이 지금도 아마 있을 것이다.

 

어쨌든 우리집 식구의 경우는 평택 가까이 가다가 더 이상 남하하지 못하게 해서 다시 돌아와 있던 곳에 있기도 하고 집에 있을 수 없어서 피난 다닌다고 어려운 경우도 많았다고 했다.

 

한편 나는 그렇게 떠돌아 다녔어도 많은 시체를 본 적이 거의 없었다.

 

그런데 그 때 가족들은 피난을 다니면서, 양쪽 비행기가 폭격하는 곳에서 사람이고 짐승이고 할 것 없이 길에 시체가 쫙 깔려 있는데를 지나간 경험이 있다고 했다.

 

나는 부산에서 처남이 있는 이리로 왔지만 아무 소식도 못듣고 말았다.

 

정말 생사를 모르는 것이다.

 

그런 때에도 자기가 득을 보려고 하는 그런 생각은 잘못이었을 것이다.

 

이리농업학교도 함안에서 경우처럼 학교는 대부분 난민수용소로 되어 있었다.

 

수용소 방들을 아침 먹고 한 바퀴 빙 돌아보니까 동료 노선생 이름이 세대주 난에 적혀 있는 것이 보였다.

 

글씨를 퍽 잘 쓰던 그 분을 여기서 만나는구나 생각하며 물어보니까 그는 거기 있다가 그 날 아침에 떠났다는 것이다.

 

우리는 교육대에 같이 있었는데 그는 조금 먼저 출발했고 우리는 끝까지 남아있다가 왔기 때문이다.

 

점심 때 쯤 출발해서 도중에 그를 만난 나는 천안과 수원을 지나서 점점 군자가 가까와지자 우리가족이 그냥 있을 지 점점 더 걱정이 되었다.

 

그러나 가족은 무사히 남아 있었다.

 

아직 4월이었다.

 

집에 와서 얼마가 지나지 못했을 때, 우리는 또 서둘러 떠나기로 하였다.

 

중공군 춘계공세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앞서 두 차례 놀랐고, 겨울에도 헤어졌고, 그래서 조금 일찍 가족을 데리고 떠났다.

 

너무 겁이 많아서 그랬던 것 같다.

 

그래서 나는 혼자 올라와 보니 나도 모르게 군포에 발령이 나 있었다.

 

가족은 나중에 힘겹게 따라왔고, 짐도 별 것이 없었지만 꾸려가지고 군포에 부임하게 되었다.

 

와보니 교실은 다 미군이 쓰고 있었다.

 

그래서 산에 다니면서 공부를 했다.

 

1951년 9월에 1학년 들어간 우리 아이는 다음해 4월에 1년도 못되어서 1학년을 마치게 되었다.

 

 

 

3-33

나는 6학년을 맡았는데 그 학생들도 3월에 끝냈고, 그들은 지금의 대학 학력고사처럼 국가고시라는 중학교 지망하는 시험을 안양에 가서 보고 진학을 하였다.

 

그리고 그 다음해인 1952년 여름에 또 지금의 광명시가 된 서면에 있는 서면학교로 옮기게 되었다.

 

서면학교 교장이 자기학교의 말썽있다는 교사를 나와 바꾸기로 했기 때문이다.

 

난 다소 어이없었다.

 

열심히 근무하느라고 한 것은 물로 바꿔야 할 별 까닭도 없었고, 더구나 1년 밖에 되지 않았는데 이럴 수가 있는가 생각했다.

 

짐작컨대, 직원들 중에 내가 제일 미웠던지..... 또한 여러가지의 경우를 종합하면 군포국민학교 교장 지현식이 내가 몹시 미웠던 것 같다.

 

(백락준 박사와 옷감의 행방)

 

서면학교 교장은 박순이라는 사람이었다.

 

함경도 동향이었던 그는 포도원을 경영하고 있었다.

 

직원들의 평은 좋은 것 같지 않았다.

 

나도 내 맡은 일만 하면 됐지 하는 입장이었다.

 

얼마나 지난 뒤에 교장 박순은 내게 회계를 맡으라고 하였다.

 

그 때는 지금처럼 서무가 하지 않고 교사들이 일을 보고 있었다.

 

회계가 하는 일은 쌀이나 보리를 걷고, 후원회비도 걷는 것이었다.

 

난 그런 경험이 없어서 "하기 힘듭니다." 그렇게 의사표시를 했는데도 교장은 자기가 명령을 했으니까 내가 그것을 맡았다고 여기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학교의 회계에 관한 것은 언제나 교장이 어느 정도 자기 마음대로 사용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지 나는 아직 사무인계를 받은 것도 아닌데  하루는 교장이 내게 우표값을 내라는 것이다.

 

나는 인계도 받지 않았다고 얘기하면서 그것을 거부한 일이 있다. 

 

그 때 백락준 박사가 문교부 장관이었을 것이다.

 

전쟁 중에 미국에 가서 "한국교원들이 많은 시달림을 받고 있어서 어떤 이는 옷도 없는 어려운 형편이다.

 

이러한 교원이 많으니까 미국 교원들이 좀 도와주어야겠다."고 교섭을 해서 뜻있는 미국인들이 양복 두 벌씩을 받도록 양복감을 보내준 일이 있었다.

 

전직원에게 돌아갈만한 숫자는 아니니까 우선 서울 한강 이북에서 근무하는 사람이라든가 많이 필요한 그런 지방에 한 사람에게 돌아가도록 배당하고 일선에서 좀 먼 지방은 그 중에 어려운 사람을 주도록 되었다.


그래서 시흥군 같은 곳엔 상당히 온 줄 알았는데 결과는 그렇지가 않았다.

 

우리학교는 단지 양복 두 벌의 옷감이 배당되었을 뿐이다.

 

나중에 우리들이 알게 된 내용은 교육구청 우두머리들 부터 차례로 차지하고 그 나머지를 학교에 배당한 것이었다.

 

교장의 발표는 "한 벌의 옷감은 자기 차지이니 나머지 한 벌의 옷감은 직원들끼리 의논해서 누가 갖도록 하라'는 거였다.

 

그 직원회의에서 난 내가 믿고 있는 바를 그대로 이야기 하였다.

 

"미국사람들은 신의가 있을테니까 지금가지 걷은게 이런 정도여서 그렇게 보냈지만 앞으로도 할 수 있으면 또 보낼 것으로 믿는다.

 

그 때 내 차례가 되면 받겠다.

 

지금 직원이 8명 이니까 나도 1/8 쯤 몫이 있을지 모르지만 그렇게 되리라 믿고 나는 포기한다" 그러면서 그냥 "적당히 의논 하십시오' 라고 그래서 나중에 투표로 결정하기로 하였다.

 

그 결과 그들은 내가 받는 것으로 결정하였다.

 

대부분이 그 지방에 살던 사람들이었던 직원들은 그 중 내가 제일 어려운 것 같아서 내 이름을 썼던 모양이다.

 

상급기관에선 "우선 내가" 하고 아래로 넘겼는데 일선에 있던 사람들은  아직 자기가 가져야겠다는 생각을 안한 것이다.

 

나는 먼저 한 말도 있고 선생님들의 의사결정이 고맙기도 해서, 나중 어느 때엔 차례가 올 것이라며 끝내 사양을 하였다.

 

그랬더니 어처구니없게도 그 옷감을 교장이 차지하고 말았다.

 

그 후에도 나는 공보다도 사가 앞섰던 교장을 몇 번 볼 수 있었다.

 

선생님들은 그렇게 결정되었으면 좀 받는 거지 왜 그러냐고 오히려 나를 나무랐고, 교장은 왠지 모르게 차츰 차츰 나를 미워하는 것 같았다.

 

그리하여 곧 전근발령이 또 떨어졌다.

 

당시의 교원을 전출시킬 수 있는 교장의 인사권이란 미운 교사를 편의대로 쫓아보낼수 있었던 이른바 전가의 보도였던 것이다.

 

(전쟁말기에 부활된 일제 말년의 "연성소")

 

결국 1953년 5월, 학기 중인데도 나는 여주로 쫓겨 갔다.

 

서면에 온지 1년이 채 못되어서 여주 북내 국민학교로 온 것이다.




3-35

교장 류장호는 무용도 하는 분이었다.

 

분명히 좌천이었지만 서면학교 교장은 영전이라고 강변하는 형편이어서 나는 그러려니 하며 가족은 남겨둔 채 아이 하나만은 내가 다니는 학교를 다니게 해야 겠다는 생각으로 함께 데리고 떠나 왔다.

 

그리고 숙직실에서 아들과 함께 자면서 밥을 끓여 먹으며 그 여름날은 보냈다.

 

그 시절에 학교는 폭격을 당했고 칸막이도 없는 가교사에서 비오는 날  1, 2, 3 학년을 한꺼번에 수업하거나,

날씨가 좋으면 밖에 나가 강변에 적당히 자리를 잡아 가르치기도 하였다.

 

서면 학교 있을 때,나는 1953년 7월 휴전을 맞았다.

 

떠나기 전 그 때 포로교환을 한다면서 이쪽으로 온 포로들을 환영하기 위해서 시흥역에 갔던 일이 생각났다.

 

그런데 거기서 나는 다시 과거 왜정시대의 악몽이 되살아나는 것을 목격했다.

 

전쟁이 터지기 전에 없던 청년훈련기관(민병대)가 생긴 것이다.

 

말하자면 해방 직전에 있었던 일제의 그 연성소 모습이 거기 있었다.

 

제 2 국민병이 해체되면서 왜정 때처럼 장정들을 얼마동안 훈련하도록 하는 일을 교사가 맡는 것이었다.

 

3학년 담임을 하면서 그 민병대 사무를 맡아서 명부도 만들고 일 같지 않은 많은 일을 하게 되었다.

 

물론 몇 해 지나서 폐단이 있다면서 해체되고 말았지만 전국적으로 일어났던 광경은 참으로 서글픈 것이었다.

 

해체된 풍경 속에서도 미처 해체되지 않은 모습이 남아 있었다.

 

그렇게 지내다가 나는 사표를 냈다.

 

친척 한 분이 그만두고 올라오는게 좋겠다고 그래서 8월에 나는 여주를 떠났다.

 

가족은 학교 사택에서 나왔지만 그들은 아직도 동면에 임시로 방을 얻어 살고 있었다.

 

사표를 내고 서울에 오라는 친척의 말을 따라 그를 만났으나 사정이 달라졌다고 하는 바람에 나는 정말 붕 떠 있는 상태가 되고 말았다.

 

그런데 때마침 교원채용고시가 있다는 공고가 있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교육위원회 학무과에 원서를 내고 시험을 보았다.

 

선발인원은 25명인데 지원자는 3.4백명이 되는 것 같았다.

 

다른 사람의 실력을 알 수 없었으나 나는 처음부터 자신이 없어서 다음날 면접을 보고 시흥에 내려가고 말았다.

 

내가 합격된 것을 안 것은 썩 나중이었다.

 

그러나 발령은 얼른 나지 않았다.




3-36

마침 친척 한 분이 고양군의 장학사를 알고 있어서 면목국민학교에 모자라는 직원 대신 임시로 가 있도록 해주었다.

 

보수도 정해진 것은 아닌데 수업은 남들처럼 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한 달 조금 넘어선가 청량학교에 발령이 났다.

 

응시할 때 주소를 처남이 면목동이라고 적당히 적어준 것이 그렇게 된것이다.

 

53년 11월 이었다.

 

그러나 강사발령이기 때문에 보수 없었다.

 

15일마다 사친회에서 주는 수당이 전부였다.

 

정식 교사발령은 다음해 1954년 4월1일에 받았고, 순환근무제가 없던 때라 나는 거기서 6년을 보내게 되었다.

 

50학급이 넘어서 3부제를 하기도 했던 기억이 난다.

 

내가 1959년에 다시 소의 학교로 쫓겨갈 때까지 청량학교의 생활은 역시 자유당시절의 비 정상적인 정치풍경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로보트 주임과 체험적 직원회의)


나는 그 때 처음으로 학년 주임이라는 것을 맡게 되었다.

 

직원 중에서 교장과 교감, 교무는 나이가 조금 위였지만 몇 사람의 동갑을 제외하고는 내가 제일 위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못하겠다는 말을 못하고 그냥 맡아 한 것이 54년이었다.

 

학년주임이 무엇을 하는 지도 모르면서, 학교에서 문제가 있을 때마다 학년주임 때문이라는 이야기를 들으며 지냈다.

 

일부 교사들은 학년주임이 로보트라서 일이 잘 안된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어느 해인가 학기 초의 직원회의에서 나는 "학년주임이 무엇을 하는 것인지 알려주면 저나 다른 교사들이 일을 하는데 좋을 것이다"고 말했다.

 

그런 뒤에 정식 직원회의가 금요일로 정해졌지만 처음 회의가 신통치 않아서인지 안건도 없고,

관심도 없어서 결국 그것은 흐지부지 되고 말았다.

 

그 후에도 정상적인 직원회의라는 것은 한 적이 없고, 교장 지시만 전달하는 회의아닌 회의가 있을 뿐이었다.

 

사실, 민주주의 교육을 한다면서도 나는 회의하는 방식을 한 번도 제대로 겪은 적이 없었다.

 

보통학교 시절은 물론, 중학교 때도 회의에 대해서 몰랐고, 교단에 들어서서도 학교 안에서 직원회의라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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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진군 시절은 모르겠고, 단천군에 근무할 때는 교육회에 한 번 가 보았는데 본 것이라고는 순식간에 지나가면서 별 이야기가 없다고 2 - 3분 만에 "이의 없습니다." 하고 끝나는 것 뿐이었다.

 

서울에 와서도 교육회라는 모임에 참석해 보았다.

 

수업에 지장이 없는 사람이 교장이나 교감의 명령에 따라 갔다 올 수 있었는데, 역시 왜정 때처럼 비슷하게 진행 되었다.

 

따라서 나는 아이들에게 특활시간을 활용해서 거기에 대한 교육을 해야겠기에 학교에서도 직원회라는 것을 중심으로 어린이들이 토의 할 사항을 쭉 정해놓고 하는 것처럼 직원회도 그렇게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의견을 냈던 것이 그 때 그만 이루어지지 못했던 것이다.

 

나중에 이야기 하겠지만 나는 4. 19 후에도 서울시 교육회 모임에 나가서 나는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우리나라의 교육에 관한 모임이 제대로 되려면 하부기관인 학교에서 올바로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직원회의니 친목회의니 하는 것도 내 교단생활을 통해 보면 바람직하게 되길 바랐지만, 거의가 그렇게 되지 않았던것 같다.

 

대개가 학교에 관한 이야기를 하다가도 교장의마음에 따라 거부되거나 받아들여졌을 뿐이지 직원의 이름으로 결정된 적은 없었다.

 

마침내 나는 3년 동안 하던 로보트라는 학년주임을 스스로 내놓았다.

 

학년주임을 맡던 시절에 한 번은 동료교사가 자기집 근처로 학기 중에 전근을 갔었다.

 

그 때는 중학교 입시가 있어서 누구나 6학년을 희망하던 시절인데 3학년을 가르치던 내게 그 자리가 돌아오게 되었다.

 

교장이 나를 생각해서 주었지만 갑자기 당한 일이라 반갑지도 않고, 나와 의논도 없었는데다 아무래도 가르치던 아이들에게 피해가 되는 것 같아서 끝까지 6학년의 그 학급을 맡지 않았던 일이 있었다.

 

그런 일이 있은 후, 역시 나는 교장과 사이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그는 다른 교장에 비해 깨끗한 편이었으나 장학사가 학교 시찰을 하며 지적한 것은 잘 고치면서도 직원들이 평소에 장학사가 학교 시찰을 하며 지적한  것과 똑 같은 이야기를 하면 잘 들어주지 않는 것이었다.

 

그 예를 들면서 나는 어느 종례 때 그에게 말 한 적이 있다.

 

또 당시 학교 건물 가까이에는 큰 수목이 심어져 있어서 나무가 자라는데 좋지 않다고 장학사가 종합시찰 때 지적을 한 적이 있었다.

 

그러니까 교장은 금방 나무를 한 귀퉁이에다 옮겨 놓았는데 그 건의는 그 전에 직원 중의 한 사람이 그런 의견을 발설했던 사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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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 인사이동은 물론 교육청에다 교장이 내신하는 것이었지만 대개 교장이 이 사람을 보냈으면 한다고 하면 인사원칙도 없이 거의 그대로 되는 형편이라서 나는 또 소이(昭義)학교로 쫓겨가게 되었던 것이다.

 

당시 부수입으로는 용지대라는 것이 있었다.

 

시험을 자주 보니까 그 비용을 받았던 것인데 군자학교에 있을 때는 몰라서 나는 다른 반과는 달리 걷지 않았고, 청량학교에서는 학년에서 일률적으로 정해 받았지만 그 돈이 모두 시험지 사는 데 썼다고 믿는 사람은 없었다.

 

자기들 주머니도 불리면서 때로 상관들에게 상납도 하는 거였다.

 

내가 주임을 하면서도 주임들끼리 모여서 저학년은 얼마, 고학년은 얼마로 내자 그런 의논도 했는데 한 번은 교장 임훈재가 상납하겠다는 교무주임의 뜻을 안 받겠다고 거절한 일이 있었다.

 

자기는 안 받지만 하지 말라고는 하지 않았던 그는 자기 신변이나 깨끗이 하자는 정도의 사람이었다.

 

그 때도 시내 특 A 지구와 변두리는 차이가 났고, 봉투 문제도 마찬가지였다.

 

용지대라는 것이 군자때에도 있었던 것 같다.

 

그것은 서울에서 처음 시작되어 지방에까지 물이 든 교원들의 부정이었다.

 

그러나 그 때 나를 더욱 괴롭혔던 것은 자유당의 3.15 부정선거였고, 나중에 내가 4.19 교원노조에 창립 초기부터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된 계기도 거기있었다.




4-12

잊혀지는 얼굴들, 잊을 수 없는 순간들

 

(이승만 대통령은 금덩어리로 빛난다)

 

1959년 4월에, 내가 쫓겨간 곳은 서울역 근처 만리동에 있는 [소의(義)국민학교]였다.

 

청량리역까지 전차가 다니고 있었지만 나는 지금 살고 있는 경희대학교 근처에서 버스를 타고 아현국민학교 앞에서 내려 비탈길을 올라가곤 하였다.

 

교장 오영건은 교원들 사이에 평이 좋지 않았다.

 

그는 새로 전근 온 교사에 대해 전에 근무한 학교 교장에게 전화를 걸어서 그 사람 신상을 조사해서 몰래 감시 등을 했다는 것이다.

 

그의 행동이 너무 지나치므로 그가 어느 학교에 근무했을 때, 숙직을 한 교원 한 사람이 세수하고 발 씻은 물을 갖고 있다가 교장이 몰래 감시하러 오는 것을 알고 갑자기 뒤집어 씌웠다는 소문도 있었다.

 

요즘도 나는 그런 교장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 오용건 교장이 어느 날 나를 부르더니 결혼 축사문을 지어 보라고 그랬다.

 

나는 그런 경험이 없어서 못한다고 거절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다른 두명의 신임교사에게도 그런 청을 했다는 것이다.

 

정말 그 속셈을 알 수 없었다.

 

그런 그가 다른 학교로 발령이 난 후에 대신 새로 온 교장은 내가 2년을 같이 있었던 문제의 정창흠(昌欽)이었다.

 

그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역시 3. 15 부정선거라고 할 수 있다.

 

3. 15 대통령 선거일이 다가오자 교육관료들은 부정을 저지르기 시작했다.

 

우리 5학년 담임들은 어느 날 '마포구 국민학교 동학년회의'를 한다고 모였다.

 

서론은 글짓기에 관한 것이었지만 본론은 선거운동이었다.

1960년 3월 17일동아일보. 3.15 부정선거 개표결과 이승만 대통령 4선 당선, 이기붕 부통령 당선을 보도한 기사.




4-13

그 때 한 장학사는 "이승만 박사가 금덩어리가 되셔서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온 세상을 빛나게 한다" 는 식이었다.

 

교장들도 똑 같은 소리를 하였다.

 

1959년 말에 교장은 아주 노골적으로 직원종례에서 자유당 정권을 지지해야 한다고 훈시를 하였다.

 

나는 어느 날, 더 이상 듣고 있을 수가 없어서"교장 선생님이 저희 직원들을 전부 자유당원인 것 처럼 생각해서 말씀하시지만, 공무원이 정치활동을 하면 오히려 벌을 받게 되어 있는데 어떻게 우리더러 선거운동을 하라고 하십니까?" 라며 항의도 해보았다.

 

그 이야기를 하는 나에게 동료들은 거기에 동조하면서도 "그런 발언을 하면 당신 신상에 좋지 않다"고 충고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1960년 2월에, 교사들은 교장으로 부터 아이들 명단을 만들도록 지시를 받았다.

 

아이들 집안의 정치적 성향을 분류해서

자유당은 0,

민주당은 ×,

기타는 △로 표시하라는 지시였다.

 

그리고 전 직원이 모두 동원된 가정방문을 통해서 특히 민주당 쪽 학부모를 설득하라고 했다.

 

나하고 같은 조가 된 사람은 내가 갈 생각이 없다고 하니까 명령을 따르지 않을 수도 없고 해서 아마 내 몫까지 했던 것 같다.

 

이어서 선거일이 가까와오자 1학년 담임부터 교장실로 차례차례 부르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내 차례가 되어 교장실로 가자 교감이 가정방문을 해서 얼마만큼 설득을 했냐고 물었다.

 

"저는 북쪽에서 넘어 온 사람입니다.

 

북쪽에서 살 수 없다고 느껴서 넘어왔지요.

 

그런데 선거 때문에 역시 살 수 없는 땅이 되면 나는 또 다시 살 곳을 찾아가야 하는데 그럴 힘이 없어서 지시에 응하지 않았으니까 그대로 보고해 주십시오" 하고 나왔다.

 

일방적으로 그 말만 하고 나왔다.

 

그 날은 아마 2월 말이었을 것이다.

 

설사 속으로는 반대한 사람이 있었을 지 모르지만 그 때 그 학교에선 단지 나 혼자만 부정선거 지시를 공개적으로 거부했던 것 같다.

 

(4.19 후의 교장과 교감)

 

그 후, 드디어 4. 19가 왔다.

 

그 날 수업을 마치고 아이들에게 안전하게 집에 가라고 한 기억이 난다.

 

다음 날, 4월 20일 부터 수업이 중지되었다.

 

그리고 버스를 탈 수 없어서 서울역 근처에서 회기동 집에까지 걸어 왔었다.

 

도중에 동대문 경찰서를 지날 때는 경찰이 기관총을 설치해 놓아서 공포감이 들기도 했으며, 남대문 경찰서와 시경 근처에서 경찰을 향해 돌을 던지는 곳을 지나오기도 하였다.

 

그렇게 매일 직장까지 걸어서 출근하였다.

(27일동안 행방불명이었던 최루탄이 눈에 박힌 채 마산중앙부두에서 발견된 김주열)



4-14

4월26일엔 걸어오다가 교수단이 데모하는 것을 보았고, 곧 이승만의 하야 선언이 있고나서 쉬었던 학교가 다시 열리게 되었다.

 

다시 수업이 시작된 4월 27일인가 28일 인가 아침 직원조회가 열렸다.

 

민주당 성향의 학부모들을 조사하라고 명령했던 그 교장이 맨 처음 일어났다.

 

'과거 자유당 독재가...."하면서 훈시를 하기 시작했다.

 

나는 참을 수가 없었다.

 

"아니 며칠 전만 해도 이승만 박사가 금덩어리라고 이야기 하던 입으로 어떻게 금새 자유당 독재라고 하는 것이냐?"고 비판하자 그의 훈시는 중지되었다.

 

모두 보고만 있었다.

 

4월 혁명의 기간에도 학교에선 참고서를 팔고 있었다.

 

학교 책임자가 전교생에게 어떤 부독본을 쓸 것인가 하고 처음부터 계획하고 출판사와 미리 교섭을 하였다.

 

4월19일 전에 벌써 부독본이 다 정해졌고 각 학급에는 배당이 되어 있었다.

 

다시 수업이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교감은 그 책값을 내라고 직원종례 때 독촉하는 것이었다.

 

나는 처음 분배할 때부터 불만이어서 우리 반 몫은 자루에 넣어 책상에 놓아 둔 참이었다.

 

그런데 아침 조회 때 그 책값을 내라고 하길래 나는 그 책 자루를 교감 책상 밑에 놓으면서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이래야 되겠느냐?" 면서 내 자리로 가 앉았다.

 

다른 직원들은 구경만 하고 있었다.

 

그 때 직원은 50명 쯤 되었고, 나는 41세였으므로 나보다 어린 20~30대 선생이 반은 넘었던 것 같다.

 

사석에서 그것을 비판하는 사람은 있을 지 모르지만 그런 자리에선 아무도 말 하지 않았다.

 

4.19가 지나서 소풍을 갔을 때도 버스비가 100원이면 200원을 걷고 그랬다.

 

나는 학년 보조를 맞추지 않을 수 없어서 "나중에 내자"고 한 뒤에 소풍갔다 와서 100원만 받았다.

 

그것이 바로 교원노조를 준비하던 때의 일이다.

 

(서울특별시 교육회 이사로 선출되다)

 

지금과 똑같이 당시에도 교육회가 있었다.

 

그러나 4. 19혁명이 성공하자 교육계의 분위기도 바뀌어 있었다.

 

5월이 되어 교육회가 열렸다.

 

나중에(한국교원노동조합)준비 모임에 나오던 서울의 모 고등학교교사인 하원재 선생은 발언권을 얻자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여기 모인 우리들은 모두 허수아비 대의원들이다.

 

오늘 모임은 성립되지 않는다.

 

각 학교에서 정식으로 대의원을 뽑아 다시 모이자."

 

이런 그의 제의가 채택되어서 회의는 시작하자마자 곧 산회되었다.



4-15

그래서 학교 직원수에 따라 인원수를 배당하라는 공문이 왔고 우리학교에선 다섯 명의 대표가 투표로 결정되었다.

 

그 결과 함성광 23표, 김남식 22표 등인데 교장도 그 다섯 사람 중에 끼였다.

 

며칠 뒤에 다시 교육회총회가 소집되었지만 새로 선출된 대의원에게 유인물을 배부할 준비도 안된채 회의가 시작되고 말았다.

 

나는 회의에서 '토론할 안건의 내용과 준비물이 없이 회의를 어떻게 하느냐?"고 발언을 했지만 회의는 그대로 진행되었고, 언제나 하던 식으로 '이의 없습니다."하고는 끝나고 말았다.

 

그래도 각 학교 대표가 모여서 회의한 것은 교육회 역사상 그것이 처음이었을 것이다.

 

이전까지는 이름있는 교장들이 모여서 대충 하는 식이었는데 대의원도 선출하고 이사도 선출하는 것은 당시에 놀라운 변화였던 것이다.

 

그래서 교육회 활동도 하면서(한국교원노조)가 힘이 된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그러니까 교육회가 잘 되어야 (한국교원노조)활동도 병행한 것이다.

 

박웅철 선생도 그 때 대표로 참석하곤 하였다.

 

그러나 항상 정상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회의에서 학교의 의견도 말해야 하고, 의논사항을 학교에 와서 발표도 해주어야 하는데 실제로 그렇게 하는 사람이 많지는 않았다.

 

내가 있던 마포구청(행정계통과 일치하던 시절이므로)의 경우에도 꽤 많이 참석했어야 했지만 아마 20명도 못 되었었다.

 

그 때 휘문고등학교 강당에서 10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이사를 선출하는데 청량에 있던 동료교사가 나를 추천해서 후보에 올랐다.

 

나는 신상발언을 통해 자격도 없고 할 생각도 없다고 했지만 결국 "서울특별시 교육회 이사'로 선출되고 말았다.

 

전체 이사가 한 20명 쯤 되었을 것이다.

 

당시 '서울시 교육회'는 교련 산하에 있는 조직으로 초등, 중등, 대학이 다 포함되어 있었다.

 

당시 사회자는 (대한교육연합회)회장을 하던 고려대학교교수 유진오(兪鎭午)씨가 보았다.

 

나는 이사로 선출된 후에 공개적으로 신상발언을 통해서 이사 사퇴의사를 밝혔고 그 이후 이사회에 나가지 않았다.

 

(한국교원노조)때문에 나갈 시간도 마음도 없었기 때문이다.

 

단지 총회가 열렸을 때, 자동적으로 회원에 가입되던 것을 반드시 가입원서를 받고 가입하도록 제도화해야 한다고 발언했던 일은 있다.

 

대부분의 교사들은 월급에서 자동적으로 회비를 떼고 있었고, 동시에 그들은 그런 사실도 모르고 있었거나 알고도 항의하는 일은 없었다.

 

그것은 분명 불법이었다.

 

아마도 그 가입과 탈퇴의 규칙은 내가 앞장서서 고치도록 주장했다고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4-16

(계훈제 선생과 한국교원노동조합의 태동)

 

그러던 어느 날 조회 때, 동학년 교사였던 함성광 선생은 내게 계훈제(桂勳悌)선생을 만나고 온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아직 교원노조가 발족하기 전인데 을지로 어디선가 계훈제 선생이 첫 발의를 했다는 것이다.

 

함성광(咸星洸)선생은 직원회의에서 내 의견에 동의를 하면서도 충고를 하던 분이었다.

 

그는 나중에 '안전기획부(당시 중앙정보부)'에 들어갔는데 최근 남북회담 때 평양에 두 번 다녀온 것을 TV뉴스를 통해서 알게 되었다.

 

그 때 그는 나더러 을지로 모임에 같이 갔으면 좋겠다고 제의했고 혼자인지 같이 간 것인지 기억은 안나지만 4월 말인 어느 날 나는 거기에 가서 계훈제 선생들을 만났다.

 

그들은 나보다 조금 나이가 어렸고 중학교에 근무하고 있었다.

 

계훈제 선생은 현직이 아니었다.

 

그래서 나중에 손을 떼는 일이 생기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가 전직교사로 이 모임을 처음 태동시킨 주인공임에는 틀림없다.

 

좌우간 거기서 계훈제(桂勳悌) 김희조(金熙朝) 최준문(崔濬文) 박웅철(朴雄澈) 조일남(趙一男) 이행의(李幸儀)씨 등을 만났고 이세령(李世領)씨는 조금 뒤에 참여하게 되었다.

 

조일남, 이행의씨는 박웅철선생과 (청파국민학교)에, 이세령씨는 (전농국민학교)에 있었다.

 

정식 모임단계에는 이르지 못했지만 거기서부터 (한국교원노동조합)의 싹이 튼 것만은 분명하다.

 

서울대학교 문리대 교정에서 공식적으로 결성된 1960년 5월22일에 위원장이 되었던 당시 건국대학교 교수 조일문(趙一文)씨는 당일 처음 나타났었다.

 

을지로에 모이다가 결성대회를 하기 전에 우리는 종로3가로 옮겼다.

 

나중에 수석부위원장으로 대표직을 대행한 강기철(姜基哲)선생을 비롯해서 국제대학에 있었던 신동영(申東英), 이화여고에 있었던 안송산(安松山), 동성고에 민동선(閔東膳)선생들도 그 때 참여하였다.

 

을지로 때보다는 종로 3가로 옮긴 장소가 넓어서 모이는 사람이 많았다.

 

거기에 빙 둘러 앉아서 자기 소개를 했던 기억이 난다.

 

 대부분 30대 중반이라 40대 초반인 내가 나이가 제일 많은 편이었지만 安松山 선생만은 나보다 높았다.

 

우리는 5월22일 창립대회에 참석하는 사람들에게 돌려주기 위해서 규약의 초안을 만들었는데 초안은 주로 계훈제 선생이 인쇄는 함성광선생이 맡았다.

 

그리고 5월22일 창립대회에 참석하는 그 날 대회장소로 정한 서울대학교 강당을 학교측이 거부하는 바람에 우리는 운동장의 한 구석을 강제 점거한 상태에서 다소 엉성하게 치루어야 했다.

 

김희조 선생의 사회로 진행된 임원선출은 투표가 아니라 거수로 했고, 누가 회원이고 누가 참관자인지 확실히 하지도 않았다.

 



4-17

을지로나 종로 모임이 자라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고 지나가던 사람도 손을 들고 가고 싶으면 가는 풍경이었다.

 

정확한 기억은 없지만 부산 등지의 지방에서도 올라온 대표가 있었던 것 같다.

 

어쨌든 정말 비조직적이었고 그래서 더욱 순수하고 자유롭던 창립대회였다.

 

따라서 그 날 처음 나온 북성국민학교 교사 엄호진(嚴虎鎭)씨가 그 학교 소속의 참석자 수 때문에 초등 대표가 되는 일도 생겼다.

 

마찬가지로 초등부위원장도 엄호진씨와 같은 학교에서 온 여교사 오종희(吳終姬)씨가 뽑혔다.

 

이들은 거의 참여하지 않았으며, 무슨 활동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었다.

 

5. 16쿠테타로 옥고를 치른 후 복직운동을 하면서 특히 엄호진씨는 본의 아니게 다른 사람한테 끌려 다니다가 그 지경이 되었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러므로 전국단위의 직책은 있었지만 당시에 조직활동은 그 해 7월에 조직정비가 된 이후의 지역단위의 조직 구성원들이 핵심이 되어서 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중 고등 교원노조 대표로는 김일용(金日龍)선생이, 대학 교수노조의 대표엔 조일문(趙一文)선생이 선출되었다.

 

사전에 계획해서 일사천리로 하는 것도 잘못이지만 한편으론 너무 준비가 부족한 조직결성이었는지 모른다.

 

사실 서울대 강당도 허락을 받은 후에 그런 모임은 좋지 않다고 압력이 들어가서 도중에 취소되었고, 서울대측에서 거부한다고 했을 때는 계엄사령부에다 우리 집회를 방해하지 않도록 보호해달라고 부탁하자는 의견도 있었으나 그런 정도까지 가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교문에다(한국교원조합 창립대회장)이라고 써붙인 뒤에 운동장 한 구석에서 집회를 강행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두 달 후인 7월17일 광화문 네거리, 지금의 교보문고 근처에 있던 의사회관에서 전국의 임원이 모여서 정식으로 조직정비를 할 때까지 그것은 과도기의 성격을 벗어날 수 없었다.

 

(함석헌 선생의 강연)

 

그 해 7월 말경, 조직정비가 되어감에 따라 용산에 있던 노동회관에 모인 초등 조합원 약 400여명이 새임원 선거를 치렀다.

 

그 결과 위원장에 박웅철, 부위원장에 이세령씨와 이종순씨 두분이,사무총장에는 최근 대한교련(현재한국교련)의 부회장을 했던 김영백(金榮白)씨가 선출되었다.

 

그리고 박웅철 선생은 위원장이 지명하는 총무에 나를 지명하였다.

 

당시 민주당의 장면(張勉)정권 아래서 문교부장이던 국사학자 이병?(李丙?)는 불법단체라고 규정하면서 "가입자는 파면한다"고 공개적으로 교사들을 위협하고 있었다.




4-18

그 때 앞장서서 반대논지를 편 사람 가운데 하나가 (노태우 정권에서 국무총리를 하던) 정원식(鄭元植) 이었다.

 

따라서 (한국교원노동조합)이 합법이냐, 비합법이냐가 쟁점이 되어 있었고, 이른바 합법성투쟁과 소송도 제기된 상태였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한국교원노동조합)이 처음에 노동조합(勞動組合)이 아닌 한국교원조합(韓國敎員組合)

으로 출범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창립대회장을 알릴 때, '한국교원조합'이라고 했었다.

 

4.19학생혁명 직후의 분위기로 보아 우리는 자유당 정권의 비호를 받은 학원모리배나 철면피하게도 신성한 교권의 권위를 그권력의 끄나풀 노릇에서 찾던 아첨배 교육관료의 청소작업에 중점을 두었기 때문에 특별히 '노동'을 강조하려는 뜻이 거기에는 없었다.

 

그런데 우리가 정식으로 결성하여 등록하려고 했던 '교원조합'이 되어야 했던 당시의 헌법 때문이었다.

 

이런 까닭으로 (한국교원조합)은 불가피하게 (한국교원노동조합)이 되어야 했고,어쨌거나 당시의 법률상으로는 (한국교원노동조합)이 결코 불법이 아니었다.

 

아마도 지금의 전국교직원노동조합(全國敎職員勞動組合)과는 이 점에서 서로 다른 차이가 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아울러 현재 전교조(全敎組) 불법화의 기원은 5. 16 군사쿠데타에서 비롯된 것이다.

 

우리 동지끼리 늘 하는 이야기지만 4. 19혁명으로 태어난(한국교원노동조합)을 학살한 박정희(朴正熙)와 김종필(金鍾泌)집단이 제5차 헌법을 초안하면서 소방서원, 체신부 종사자와 함께 우리 교원들에게도 노조결성 금지를 새로 명문화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당시 민주당 장면 정권의 입장과 똑같은 것이었다.

 

언론과 금융 그리고 교원 이렇게 3자가  4. 19로 태어난 이른바 지식인 노조였고, 가장 강력한 조직활동을 유지하고 있던 것도 그 가운데서 우리의 (한국교원노동조합)이었다.

 

그러나 지금 언론과 금융계의 노조활동이 현실화 되었는데 반해서 합법화되지 못한 (전교조)를 생각하면 마음이 적지 않게 안타깝다.

 

여하간 그 때도 반대하는 사람을 대표해서 당시 민주당(民主黨)의 곽태진(郭太振)의원이 (한국교원노동조합)을 불법화시키기 위하여 제출한 의원입법안에 대해 우리는 격렬하게 반대하고 있었다.

 

그 처리가 결국은 불가능한 상황이란 것 만큼 법적으로나 사회적 분위기로 보아서(한국교원노동조합)은 뿌리가 잡히고 있었다.

 

반대로 우리의 상대 조직이었던 대한교련(大韓敎聯)조직은 사실상 거의 화해된 상태로 보였다.

 

가령 경상북도에선 공식적으로 약90%의 교원이 (한국교원노동조합원)이었다.

 

쿠데타가 터질 때까지 우리는 순조로운 출발을 계속하고 있었지만 역시 탄압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기존의 (대한교련)은 다급했던 것 같다.




4-19

일부의 평가대로 4. 19학생혁명을 결정적으로 잉태키켰다는 사상계(思想界) 를 통해 그 이름이 널리 알려진 함석헌(咸錫憲)선생님이 개천절인 그해 10월3일 서울고등학교에서 강연이 있었다.

 

(대한교련)이 주최한 4. 19 혁명완수교육자대회(革命完遂敎育者大會)에 시민대표로 나오신 것이다.

 

한번 읽어보려던 '뜻으로 본 한국역사(韓國歷史)'의 저자라는, 정도로만 알고 있던 나는 처음으로 그 분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우리 모두는 그 분이 (대한교련)을 지지하는 발언을 하는 줄로 알았다.

 

그런데 첫 말씀이 "나같은 엉터리 없는 사람 때문에 뭐 어쩐다"로 시작하였다.

 

즉 "시민대표가 (한국교원노동조합)이 어떤지 상황을 알고서 말하는 것을 승락하든지 그래야 하는데

잘 모르면서 끌려오다시피한 멍청이 같은 사람이다"라면서,우리를 반대하는 말씀일 것이라고 짐작했던 우리는 뜻밖에 그런 이야기를 듣고 기분이 좋았다.

 

들리는 이야기로는 함 선생님의 따님이 '교육회'에 근무하는 인연으로 그렇게 되었다는 것이다.

 

(뻔뻔한 4.19혁명완수 교육자대회)

 

그 '革命完遂敎育者大會'는 결국 우리를 제압하려는 보이지 않는 의도에서 실현된 것이다.

 

자유당 독재정권에 머리를 조아리며 심부름 노릇을 하던(대한교련)이 과연 4. 19학생혁명을 완수할 자격이 있었다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그 약삭빠른 처신술로 인하여 그들은 사상계(思想界)에다 '혁명완수'를 부르짖던 咸錫憲 선생님을 거기에 이용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선생님의 불확실한 태도 때문에 그들의 목적은 오히려 수포로 돌아갔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밖의 발언자들은 모두(한국교원노동조합)을 비난하는 내용 뿐이었다.

 

그러자 앞에서 말한 것처럼, 조합원들 이면서 동시에 (대한교련)회원으로 참석했던 우리 동지들이 분노로 본부석이 습격당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 바람에 대회장은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지만 그런 뒤에도 계획에 따라 각급 학교의 교장들은 전체 직원의 앞장을 서서 시가 행진을 하는 것이었다.

 

'혁명완수'를 위해서 하는 행위치고는 매우 뻔뻔한 짓이 아닐 수 없었다.

 

우리(소의학교)에서는 대회 하루 전에 그 준비모임에 다녀 온 학교의 서무주임이 직원종례 때 발표를 하였다.

 

교원들은 될 수 있는 대로 많이 참여하라는 권고와 함께, 나는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교사가 아닌 서무가 발표하는 것 자체도 못마땅한 나는 그가 발표한 뒤에 일어나서 말했다.

 

"내일 모임에, 4. 19이전의 3. 15 부정선거 때 '이승만 박사가 금덩어리가 되어서 온세상에 빛난다'는 발언을 한 사람도 참석합니까?"

 

   (우측에서 3번째 김남식,4번째 함석헌선생님.)


4-20

물론 그 자리에 교장도 있었다.

 

다음 날, 서울고등학교에서 대회가 끝난 뒤에 우리 학교의 교장 정창흠은 '4. 19혁명완수'를 하자고 다른 직원들에 앞장서서 가두행진을 하였다.

 

4.19가 난 뒤에 그 교장이 우리를 보면 무서워한다고 하면 과장이겠지만 좀 경계하고 그런 것은 사실이었다.

 

뿐만 아니라 내게는 "선생님이 원하면 지금 전근할 시기는 아니지만 가깝고 좋은 데를 보내줄 수 있다"고 제의하길래 나는 "원하지 않는다"고 잘라 말 한 적이 있다.

 

그러니까 그 날 대회는 우리(교원노동조합)을 누르려고 한 짓임에 틀림없는 일이었지만 또한 정말 후안무치한 자들의 행위가 아닐 수 없었다.

 

교장 정창흠은 5. 16이 나자 교육감을 하던 박현식(朴賢植) 대령(大領)이란 사람을 초청하기도 하였다.

 

박 대령은 우리 집에서 몇집 건너서 살고 있었는데 평상시 하는 짓으로 보아 '아마 이런 교원도 있었다'고 말했을 것이라는 짐작이 들었다.

 

우리는 비난하는 자들은 또 있었다.

 

지방 자치제로 뽑힌 일부 시의원들이다.

 

그들도 역시 4. 19이전 자유당 독재정권에서 당선된 자들이다.

 

그들은 학부모들을 상대로 그런 행위를 하였다.

 

교장과 똑같은 입장에 있던 그들을 하루는 내가 교장실로 찾아가 정식으로 항의한 일도 있었다.

 

해방 직후의 교원의 태도와 본질적으로는 비슷한 모습으로 느꼈다.

 

그렇지만 학부모들은 반드시 그들에게 동조한 것 같지는 않았다.

 

내가 두 달간의 교원강습을 마치고 난 뒤에, 어느 날 일과를 마치고 집에 가는데 누군가 인사를 하는 사람이 있었다.

 

인사를 하고 보니까 우리 학교의 사친회장이었다.

 

그는 우리 반의 유무향이라는 아이의 아버지였지만 나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는 내가 시의원에 항의하러 교장실에 들어갔을 때 다른 학부모들과 거기에 있다가 나를 본 뒤에 '저 사람이 저런 일로 전근당했나보다!'하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강습 받던 동안 보이지 않아 그런 생각을 했다면서 "좋다고 생각하는 일을 소신껏 하라'고 격려하는 것이었다.

 

그 때까지 학부모들로부터 격려 받았건 일은 별로 없었는데.....

 

(단식투쟁을 하면서)


우리는 그 해 여름방학 동안에 경복궁 옆에 있는 사직공원에서 집회를 가졌고 이어 문교부에 항의 방문하였다.

 

밤 12시까지 노래도 부르고 이야기도 하면서 항의를 계속하자 경찰이 정문으로 들어오면서 해산을 요구했다.

다음날 국회 앞에서 다시 모이기로 하고 그날은 헤어져 돌아갔다.




4-21

다음 날은 바로 국회에서 노동조합 금지규정에 교원을 넣느냐 빼느냐 하는 안건을 다루기로 한 날이었다.

 

우리는 "곽태진(郭太振)물러나라!"고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한 덕분인지 몰라도 최종적으로는 우리의 의견이 관철되어 금지규정에 교원은 넣지못했다.

 

그런 후에 우리는 초등 조직을 정비하려고 서울역 부근에 사무실이 있던 대한생명 빌딩까지 행진해 갔다.

 

그 때 모임의 진행은 건국대학교 교수였던 조일문(趙一文)선생이 하였다.

 

조일문 선생은 위원장 이기는 하였지만 잘 나오지 않았다가 그 날 나왔던 것이다.

 

이어서 겨울에 우리는 '악법반대'를 위한 단식투쟁을 하였다.

 

당시에 '데모규제법'과 반공감시특별법안(反共監時特別法案=현재 國家保安法의 前身)'을 우리는 일반 사회단체와 마찬가지 입장에서 '2대악법'으로 규정하고 있었다.

 

그 때 우리가 생각하기로 민주당 정권은 매우 보수적이었고, 실제로 4. 19정신을 제대로 살려내기는 커녕 신구파로 갈려서 싸움이나 하여 민심을 배신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자유당 독재정권이 1958년 12월24일 변칙 통과시키는 과정에서 그토록 결사반대하여 이른바

'24파동'을 일으킨 '국가보안법'을 민주당 정권은 과거의 자유당 정권처럼 이름만 '반공법'으로 바꾸어 다시 통과시키려고 준비하고 있었다.

 

모든 사회단체가 반대하던 이 악법에 우리도 무관심 할 수는 없었다.

 

그런 저항에 부딪혀서 유보되었던 '반공법'은 그 후에 박정희가 얼마나 많이 악용했던가.....

 

이틀로 정한 기한부 단식투쟁에 참여하연서 우리는 몇몇 부서를 정했다.

 

각기 부서를 정한 것이 나중에 5. 16으로 구속되었을 때 무슨 무슨 부에 누가 책임자다 하는 식으로 사진도 찍히게 되었다.

 

그런데 나는 단식을 하면서 '2대악법'이 무엇인지 옆 사람에게 묻던 생각이 난다.

 

다음 해 내가 5.16으로 구속되었을 때 나를 취조하던 형사가 '2대악법'이 무엇인지 몰라서 묻던것처럼.

 

그 단식투쟁을 위해서 강기철 선생은 담요 등을 준비하였다.

 

나는 '내가 너무 소홀히 해 왔구나!'하는 생각도 들었다.

 

참여자는 많지 않았다.

 

대학의 강기철, 신동영 두사람을 포함해서 박웅철, 이행의, 조일남, 이세령, 김영백선생 등 초등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의식적으로 안나오던 최준문 선생이 계란등을 가져온 끝나던 날, 우리는 신동영 씨 댁에 가서 아침을 먹고 헤어졌다.

 

지금 생각하면 여러가지가 허술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가령 회비도 없었는데 총무를 보던 내가 내자고 해서 얼마인지 모르지만 회비를 정식으로 내게 된 일도 있었다.

 



4-22

그래도 우리는 1961년 5월 20일에 좀 더 강력한 조직이 되도록 하는 회의를 예정하고 있었다.

 

그런 모습이 벌써 33년이나 흘렀다.


(4. 19직후 민주당 정권에서 지속된 교육계의 자유당시대)

 

그런데 1961년 4월1일자로 나는 예정에 없던 전근을 다시 하였다.

 

자유당시절의 행태는 민주당 정권 때도 똑같이 자행되고 있었다.

 

(무학학교)로 쫓아내고는 오히려 영전이라고 태연히 말하는 버릇도 똑같았다.

 

그동안 (소의학교)로 출퇴근하면서 나는 각기병에 걸려 있었다.

 

몇 차를 놓치고서야 잡아타고 가는 만원 버스 때문에 여간 힘들지 않았는데 그 때문인지 영양 때문인지 신경통인줄 알고 병원에 가서 진단을 받아보니 각기병이라고 그러는 것이었다.

 

여하간 나는 조금 가까운 곳으로 옮겨 갔고 교장 윤기복씨는 그래도 괜찮은 분으로 아주 짧은기간 함께 근무하게 되었다.

 

마침내 5월20일 내가 5. 16으로 구속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분도 "이렇게 하는 것이 좋지 않느냐?"고 해보았지만 잘못이 고쳐지는 것을 보진 못하였다.

 

그 때 교감이 具완회 라는 분이었는데 더러 교무실에 남아서 책이라도 들쳐보고하는 나를 기특하게 보았는지 연구주임으로 나를 발표하는 것이었다.

 

그 때까지 나는 교무주임이란 직책은 보았지만 연구주임이라는 직책은 들어보지 못했다.

 

(소의학교)나 (청량학교)에서 연구주임이란 자리는 없었다.

 

연구수업이란 것도(청량학교)에서 교무주임이 맡고 있었다.

 

나는 연구주임이 무엇을 하는지 전연 모르고 있었는데 연구발표회를 계획하고 주관해야 하는 그런 어마어마한 일이라는 것을 듣고는 내가 그런 사건이 없었다면 연구주임을 맡아 하다가 아마 실력부족으로 창피를 당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나는 그 해 3학년을 담임하고 있었다.

 

5월5일 어린이날 모범어린이를 표창 하는데 내가 추천한 아버지도 어머니도 안계신 우리반의 어린이가 선정되는 기쁜 일도 있었다.

 

그러나 소풍을 간다면서 실제 비용보다 많이 걷는 좋지않은 일은 여전했던 기억이 난다.

 

말하자면 자유당 때나 민주당 때나 학교의 부조리는 아직도 고쳐지지 않았던 것이다.

 

단지 교육관료들은 다소 변모를 보이고 있었다.

 

예전 같으면 장학사가 전직원을 교무실에 모아 놓고 교감 의자에 앉아서 훈시를 했을 텐데, 4. 19혁명이 난 후에 학교를 방문한 장학사는 학년별로 모인 교실에서 우리들처럼 아이들 걸상에 앉아서 함께 이야기하자는 것이 달랐다.




4-23

그런 모임에서 내가 "지금까지 전근을 간다거나 담임을 맡는다거나 할 때, 서로간에 금품이 왔다갔다하는 일이 있었는데 앞으로는 그런 일들이 고쳐질 것 같습니까?" 하고 질문을 하자 장학사는 "이제부터는 잘 되지 않겠어요?"라고 대답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나는 정년퇴임 할 때까지 그것이 고쳐진 것을 본 적이 없다.

 

그 때 그 장학사는 나중에(창신학교)에서 교감으로 함께 근무한 적이 있었다.

 

좌우간 '혁명완수교육자대회'를 했다는 사람들은 과거에 '우리가 가지고 있던 그 무엇을 되찾아서 그대로 누려보자'는 생각 뿐이었지, '4.19 사태 때 학생들이 많이 죽고 희생 당하고 부정선거가 참 잘못이니 이제부터는 올바로 해 봐야되겠다'는 그런 생각은 거의 없는 것 같았다.

 

그 때 내 생활은 다소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다.

 

특히 집에서 구독하고 있던 동아일보가 계속 (한국교원노동조합)에 대해 일관되게 비난하는 논조가 그것을 더해 주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신문을 바꾸기도 하였다.

 

사실 우리들 기사는 경향신문, 한국일보, 조선일보에서 많이 다뤘고 또 호의적이었다.

 

당시 동아일보는 민주당 정권과 내면으로 깊은 관련을 맺어오고 있었던 까닭이라고 생각한다.

 

그 때 동아일보는 매우 보수적인 성격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도 그런 기사들은 당시 상황에서(한국교원노동조합)의 입장을 상당히 불리하게 만들었던게 분명하다.

 

그런 점에서 지금도 언론에 대해서는 많은 관심이 가는 만큼 비판적인 태도를 떨칠 수가 없다.

 

그런 시간을 보내면서 내게는 강기철, 박웅철 선생들을 알게 된 것이 내인생에서 큰 이득이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성격이 수줍어서 잘 아는 사람도 없는데 지금 생각하면 그런 분들을 알게 된 일이 매우 고맙다고 느낀다.

 

나는 1961년 5월 20일 城東署에 수감 되었다.

 

그리고 7월 17일에 함성광이가 동대문서에서 석방되던 다음 다음날, 동지들과 함께 우리는 西大門矯導所로 이감 되었다.

 

서대문 교도소로 옮겨갈 때, 함성광은 확실한 기억은 없고, 단지 7월17일 자로 '그 직을 면함'이라는 내각수반 宋堯瓚 이름의 발령을 받았다 고 한 것 같다.

 

그 때 교원은 대통령 발령이었다.

 

엄호진, 최준문 선생도 그랬고 다른 사람들은 아마 서울시 교육감으로 되었던 것 같다.

 

한 마디로 우리는 쫓겨난 것이다.

 

시간상으로는 약 1년 동안에 불과하지만 나는 박정희와 김종필 일당이 일으킨 5. 16 군사쿠데타 덕분에 삶에 대한 태도를 공부하는 한 순간을 갖게 되었다.

 

일찌기 함석헌 선생님은 감옥을 인생대학이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내게는 적어도 그 말씀이 진실하다고 느낀다.

 

지금과는 판이하게 그 때 분위기는 매우 살벌한 상황이었다.




4-24

(한국교원노동조합에서 5.16 지지성명을 준비하다)

 

군사쿠테타 소식은 1961년 5월16일 아침에 라디오 방송을 들었다.

 

학교가는 도중에 우연히 들었던 것 같다.

 

그 날부터 오후 5시가 통행금지 시간이었다.

 

처음 며칠 간 그랬다.

 

그 5.16 (혹은 17일)이었던가 오후 5시 이전에 몇 사람이 신동영 선생 댁에 모였다.

 

5.16 지지성명을 내기 위해서였다.

 

세월이 흐른 뒤에도 우리가 늘 반성해야 한다고 내가 응암동 모임에서 몇 번이고 했던 말이다.

 

이것은 참고가 될 것이라는 생각에서 밝히기는 하지만 참 매우 부끄러운 이야기이다.

 

그 내용이 어떤 것인지 자세하게 기억나지는 않는다.

 

분명한 것은 '지지성명'을 냈다는 사실이다.

 

그 때 거기에 모인 사람들은 중등에 유성우, 대학에 신동영선생 등을 포합해서 10여명이 있었다.

 

지방에 계신 분들은 물론 참석할 수가 없었고 주로 서울에 있던 사람들이었다.

 

오후 4시 쯤 모여서 통행금지 시간 전까지 빨리 서둘러야 한다는 분위기였다.

 

누가 그런 성명을 내자고 한 지는 모른다.

 

성명을 내는데 이의가 없었던 것 만은 분명하다.

 

누가 성명서를 작성했는지 모르지만 확실히 '혁명을 지지한다'는 사실을 밝히고 언론기관에 누군가가 전달하기로 결정했었다.

 

나도 그 자리에 있었지만 반대하지는 않았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 성명은 신문에 보도되지 않았다.

 

아마 우리가 곧 체포되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어떠한 곳에서도 그런 사실에 대한 기록이나 증거는 없었을 것이다.

 

오직 내 양심으로만 하는 말이요 증거일 뿐이다.

 

한 마디로 우리가 경솔했다고나 할까....

 

그 '지지성명'을 내게 된 배경이랄까 하는 것은 지금까지 우리(한국교원노동조합)을 억누르고 있던 民主黨 政權에서 해방된다고 하는 점이었을 것이다.

 

일제 때 親日派 노릇을 한 국회의원이 自由黨 독재정권 시절보다 더 많았음은 물론 자유당의 행태와 똑같이 '반공법'을 제정한 민주당 정권에 대하여, 4.19革命 정신을 배반했다고 판단한 우리들 태도의 일부가 순간적이나마 거기에 담기게 되었다고 할 수는 있을 것이다.

 

어쨌든 그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검찰에서는 교조활동을 정당한 일이다고 주장했지만 이것도 빼놓을 수 없는 일임에 틀림없다고 믿는다.

 

흔히 부끄러운 일은 숨겨두고 잘 한 것만 이야기 하는 것은 진실을 혼란시키는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서 이 사실을 밝혀두고자 한다.

 




4-25

한편, 수석부위원장하던 강기철 선생을 비롯해서 주요 간부가 5월 17일과 18일에 검거 되었다.

 

기억나는 일 중에서 우리 초등에 崔濬文 선생의 平壤師範 동창에 관한 일화가 하나 있다.

 

그는 치안본부 간부로 있었는데 최준문선생에게 비밀리에 "어서 도피하라"며 알려주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5.16 군사쿠데타가 나기 며칠 전이었으며, 내용은(한국교원노동조합)간부들에 대한 체포 계획이었다.

 

짐작이긴 하나, 쿠테타 세력이 우리를 체포할 수 있었던 것은 이처럼 민주당 정권이 사전에 준비한 체포 계획 덕분이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최준문 선생은 도피하지 않고 체포되었다.

 

5월20일, 3학년을 맡고 있던 나는 6학년 선생들과 운동장에서 학년 대항 배구시합을 하고 있는 중에 찝차가 들어온 것을 보았다.

 

시합은 3학년 팀이 이겼다.

 

그 순간 나는 찝차에 태워졌고, 수사관 두 명에게 호위되어 성동서 유치장에 수감되고 말았다.

 

(경찰조사를 받던 중 '인민'이란 말을 하다)

 

(금오학교)에 있던 김영백 선생은 옆 방에 있었다.

 

진보적 정치운동가였던 統社黨의 尹吉重씨도 그 옆방에 들어왔다.

 

윤길중씨를 숨겨 준 혐의로 잡혀온 그의 처남은 나와 같이 있으면서 윤길중씨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하였다.

 

그 밖에 절도 등을 저지른 잡범들과 함께 6월3일까지 한 방에 모두 15~6명씩 섞여있다가 통사당원 따로 교원노조원 따로 묶여서 우리는 동대문서로 이감 되었다.

 

내가 유치장에 들어온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지만 이감되면서 북쪽에서 보지 못했던 수갑이 채워진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성동서 유치장에 들어가기 전에 갖가지를 물어보는 것도 달랐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북쪽에서는 석방될 때까지 불러내서 심문을 한 적이 없었다.

 

또 무슨 얘기를 하는 도중에 내가 '인민'이란 말을 한 일이 었었다.

 

그 때 취조하던 형사의 눈이 순간 번쩍하던 모습도 생각이 난다.

 

뭐 좋은 꼬투리라도 잡은 것처럼 그러다가 식사시간이 되어서 자리를 뜨고 말았다.

 

사실 더 이상 문제가 될 일도 없었다.

 

문제라면 고향이 북쪽이기 때문일까.

 

하지만 그 형사가 듣기에 좋지 않은 대답을 하거나 또는 지나다니다가도 툭하면 아주 주먹으로 때릴 듯이 그랬는데, 나는 특히 그 때 자주 쓰고 있던 철필 같은 것으로 '나를 찌르면 어떻게 하나?' 걱정을 많이 하였다.

 

그러면서도 4.19革命 때, 나는 술주정꾼이 파출소에서 행패를 부려도 감히 말리지도 못하던 경찰의 모습과 대학생들이 지역책임을 맡아서 질서를 잡던 일이 눈에 선했다.

 

내게 이런 경찰서 안의 광경은 정말 낯선 모습들이었다.


그 때 대학 졸업생을 순경으로 채용한 일이 있었다.

 

이른바 학사순경이라고 했는데 성동서에도 윤 모라는 순경이 그런 사람이었다.

 

그는 유치장을 지키고 있으면서 윤길중씨에게 매우 친절했던 것 같다.

 

한편 피의자를 앉혀놓고 자기들끼리 화투를치는 광경도 나는 처음 보았고, 자기가 아는 절도범을 찾아서 형사가 새벽에 감방 안에 들어와 "내가 조금만 더 주의하라고 하지 않았느냐?"면서 속삭이던 일도 있었다.

 

그런 성동서를 떠나 내가 동대문서로 넘겨질 때 상투적으로 하는 말인지 모르지만 나를 취조하던 형사는 내게다 "그동안 미안했다"고 하였다.

 

나는 성동서에서 가족면회를 전혀 하지 못했다.

 

가족은 성동서에 내가 있는 줄 알고는 있었지만 교조 관계자들에 대해서 일체 면회를 금지시켰기 때문이다.

 

동대문서에 와서도 처음 얼마 동안 나는 가족면회를 하지 못했다.

 

다른 사람들은 면회온 가족으로부터 옷도 받아 갈아 입고 그랬지만 나는 처음 들어갈 때 그대로였다.

 

그래 간수들도 "저 사람은 어떻게 찾아오는 사람이 없는가?"그랬다.

 

물론 학교 교장 등이 면회를 온 경우는 전혀 없었다.

 

1961년 6월3일, 내가 박정희의 '혁명공약'이란 것을 처음 듣던 동대문서에는 전국의 (한국교원노동조합)의 간부들이 모두 모였다.

 

대구에서 '2대악법' 반대시위를 주동하여 사회주의 운동관계로 처리된 경북교원노조 위원장 김문심 선생만 다른 서로 넘어갔고 대부분의 교원노조활동을 한 분들의 얼굴이 거기에 보였다.

 

부산의 김종원, 강기철, 신동영 선생 등등......

 

동대문서 에서도 경찰은 매우 거칠게 우리를 대했다.

 

"나쁜놈들!" 이라고 하면서 무슨 악질들을 체포한 것처럼 그랬으나 차츰 뭘 알아서 그런지 오래지 않아서 조금 달라진 것 같기도 했다.

 

(소의학교)의 함성광을 비롯해서 기소하지 않을 사람들은 서대문서로 넘겨질 때 석방되었다.

 

우리는 7월19일에 서대문서로 넘겨졌다.

 

엊그제 꼭 1년 전에는(한국교원노동조합)의 조직을 정비하던 교원들이었다.

 

(한국교원노동조합)위원장인 건국대 교수 조일문씨는 도피 중 썩 나중인 11월에 수감되었다가 우리보다 먼저 나왔다.

 

그 때까지 교조간부로는 강기철선생이 제일 우두머리인 셈이었다.

 

그래 강 선생이 취조를 받으면서 우리들 이름을 임시로 조직의 빈 자리에 앉혀놓았기 때문에 우리가 사회부장이라든가 무슨 직책의 무슨 부장이 아니라고 했지만 그대로 거기 올라 있기 때문에 가게 된 것이었다.

 

우리는 그 사실을 나중에 출옥해서 강기철 선생으로부터 그이야기를 듣고 알게 되었다.


(마땅히 받아야 할 벌을 받아야지만......)

 

 


4-27

나는 정말 초조하진 않았다.

 

지금도 그렇게 말하고 있지만 '내가 왜정 때 민족반역자 노릇을 했기 때문에 거기 대한 벌을 마땅히 받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교조활동을 한 것 때문에 잡혀간 것은 참 억울했다.

 

올바른 교육을 하자고 활동하다 잡혀 들어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쨌든 나는 초조한 마음이 들지 않았다.

 

서대문 교도소로 넘겨진 후, 우리는 간수들과 서로 친해지기도 하였다.

 

하루는 간수가 우리에게 "아, 무슨 걱정 할 일이 있느냐?고 그랬다.

 

"간수가 밥도 갖다주지, 옷도 갖다주지, 자지않고 지켜주지 뭐 걱정이 있겠느냐?

 

참 자유가 없는 게 문제는 문제지?"

 

한 번은 언제 여기를 나갈 지 기약도 없는데 고등학교에 다니던 내 큰아이가 옷을 넣은 일이 있었다.

 

식구들을 괴롭힌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큰 아이가 넣어준 옷을 보고 '참 고마운 일이구나!' 생각하면서 집안 형편을 마음 속에 그려보기도 하였다.

 

그래도 갇혀 있으니까 나가게 되는 것이 관심일 수 밖에 없었다.

 

그 때 우리 조합원들은 한 곳에 모였으므로 서로 지난 일도 이야기하면서 지냈다.

 

그 중 가장 인상 깊은 일은 지금은 돌아가신 柳聲虞 선생과의 대화였다.

 

"우리가 이렇게 잡혀왔더래도 밖에서 진정한 교육이 이루어진다면 얼마나 바람직한 교육과 정의로운 사회가 되면 그게 좋은 일이다.

 

특히 학교에서 부정이 많았는데 이제부터라도 진짜 교육자가 있어서 올바로 가르친다면 그것이야말로 참 좋은 일이다.

 

우리가 바랄 것은 그것 뿐이다."

 

그 밖에 80~90명 하던 학급인원을 줄여야 한다는 것들도 이야기 한 기억이 있다.

 

그런 말 하는 교원이 구속되어야 하는 현실이 5' 16쿠테타였다.

 

같은 감방에는 학생운동을 하던 사람도 있었다.

 

黃 建이란 젊은이는 서울대학생인데 나중에 문교장관이 되었던 黃山德 교수의 동생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 무렵 박웅철, 최준문선생이 같은 방에 있게 되었다.

 

정식 기소가 되기 전에 나는 다시 취조를 받았는데 대개 "교조활동을 어째서 했느냐?" 고 묻는 것이었다.

 

내 대답은 항상 똑같았다.

 

"부정선거를 한 정권을 학생들 힘으로 이렇게 무너뜨려줬는데, 이제 학생들은 그것을 무너뜨렸으니까 학교에 돌아가서 자기 할 공부를 해야 하지 않겠느냐?




4-28

지금 학생들은 이만큼 일을 했으니까 돌아가서 공부를 하고 우리는 우리 할 일을 해야 되겠다고 생각해서 이런 활동을 한 것이다.

 

"그럼 어떤 활동을 했느냐?"

 

"내가 한 활동이란 것은 학교에서 부독본을 강매하는 폐단이 있었는데,그것을 못하게 한 일이 있다.

 

또 내 직장에서 인사이동 때 금품수수 등 옳지못한 일이 있는데, 어떻게 하면 고칠 수 있을까 생각해서 항의도 하고 그랬다."

 

그들은 "대구대회에 갔느냐?"고도 추궁했지만 그 때 나는 거기 가지 않았다.

 

나는 내가 한 일이 잘못한 일이기는 커녕 본 받을 만한 일이었기 때문에 감방 안에서나 나와서나 교조활동으로 투옥된 것에 대해 지금도 억울하다는 것은 잊지 못한다.

 

그래서 유성우 선생처럼 학교부조리가 고쳐진다면 참 바람직한 일이라는 점이 주로 내 대답이었다.

 

(어느 땐스범의 예언......)

 

나올 때까지 몇 차례 혁명검찰부에 10회 정도 불려가서 심문을 당했다.

 

박웅철 선생은 더 많이 취조를 당했다.

 

아마 위원장이라 그랬던 것 같다.

 

그는 많이 맞았지만 6.25 때 봉화전투 등지에서 많은 사선을 넘은 체험 때문인지 맞으면서도 얼굴색을 변해본 적이 없다고 했다.

 

나는 한 번인가 주먹으로 맞았던 것 같다.

 

그런 날은 교도소에서 차를 태워 을지로 3가 근처에 이름도 모르는 곳으로 데려갔다.

 

거기가 혁명감찰부였고, 담당은 동대문서의 김주성이었다.

 

여러 차례를 들락겨렸지만 직접 심문을 받은 것은 두 번 정도였다.

 

내용도 앞에서와 비슷했다.

 

담당 검사는 윤영학이었다.

 

한 번은 윤영학 앞에서 심문을 받는데 나중에 보니 강기철 선생이 뒤에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아마 강기철 선생에 대한 보충 심문을 위해서 나를 불렀던 것 같은데 그 때 내 대답이 강기철 선생한테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지금도 궁금한 생각이 난다.

 

그는 나보다 젊었는데 강기철 선생은 출옥한 뒤에 한 두번 만났다고 들었다.

 

차에 실려서 밖에 나올 때 가족들이 보이기도 했지만 밖의 소식은 들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다시 돌아온 감방은 언제나 비좁았는데, 정치범보다는 잡범이 많았다.

 

혁명검찰부에 갔다온 어느 날, 댄스홀에서 댄스를 하다가 붙잡혀온 사람이 있었다.

 

그는 며칠 동안 함께 있었는데 "지금 이렇게 잡혀왔지만 10년이나 20년이 지나면 여기 갔다가 온 이야기가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고 한 적이 있다.




4-29

그 말을 들었던 것은 살벌한 군사쿠테타 분위기 속에서 정치한다는 사람들 누구도 입을 다물고 있던 시절이다.

 

당시에 겪은 이런 일이 지금은 그 댄스범의 말대로 '웃음거리'밖에 안될 지 모른다.

 

또 누군가가 춤을 추었기 때문에 지금 서대문 교도소까지 갔다면, 과연 누가 그것을 믿을 것인가?

 

세월에 대한 무슨 진리(?)의 말씀인지 모르지만, 그러나 당대를 사는 인간은 역시 그 나름대로의 현실이 있을 수 밖에 없다.

 

더구나(한국교원노동조합사건)은 결코 '웃음거리'가 될 수 없는 일이요, 내게도 잊을 수 없는 인생의 한 순간이었다.

 

그래도 4.19와 5.16시절의 풍경은 벌써 30년이나 지난 일임에 틀림없는 것 같다.

 

여하간 그 때 여자들은 댄스홀에 가서 잠깐 춤을 추다가 급습당해서 경찰서로 간 경우가 많았던 것 같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 내 방엔 홀로 남게 되었다.

 

잡범들이 모두 이감한 것이다.

 

이어서 정치범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화여대 법학교수였던 李建鎬씨가 '民族日報'사설 때문에 잡혀왔다.

 

그는 "자기 의사가 전적으로 반영된 것도 아니고, 편집하는 사람들이 맘대로 고치기도 하는 실정이었다고 검사 앞에서 그런 얘기를 하였다"고 그랬지만 결국 실형을 선고받았다.

 

그리고 나는 '민족일보'사장 趙鏞洙씨가 처형되었다고 들었다.

 

또 '永世中立統一論'을 주장하는 무슨 위원회에서 활동을 하다가 역시 형을 받은 김진정씨가 있었다.

 

그는 무학고등학교 교사를 하다가 마산에서 잡혀왔다.

 

그 때 나는 '영세중립통일'하자는 것이 얼마나 좋은 생각인가' 하고 생각해 본 적이 있다.

 

또 '大邱遺族會'관계로 李福寧이라고 하는 사람이 들어왔다.

 

'居昌良民虐殺事件'으로 억울하게 죽음을 당한 유족들이 4.19 뒤에 모임을 하다가 잡혀 온 것이다.

 

그 분도 불기소가 되지 않고 형을 받았다.

 

그리고 한치환이란 젊은이가 있었다.

 

통사당 관계자였다.

 

우리 교조 관계자로는 부산에서 잡혀 온 김창범선생이 우리가 나가 무렵 들어와서 얼마 동안 같이 있었다.

 

혁명에 협조하지 않았다고 잡혀 온 군인들도 있었다.

 

살찐 정도를 보고 그 군인의 계급을 점쳐보기도 하였다.

 

우리는 계급이 높았던 사람을 보면서 호의호식을 얼마나 했으면 저렇게 뚱뚱해지는가 하는 얘기를 주고 받기도 하였다.

 

감방 벽에는 '有錢無罪'라는 낙서도 선명했다.

 

(정치범들이 처신하는 태도)

 

그 감방에서 넣어 준 성경을 세 번을 통독했는데 그 이상은 머리가 아파서 보지를 못했다.

 



4-30

기독교 계통의 중학교를 다녔기 때문에 학교를 다니면서 예배도 보고 성경공부도 한 적은 있었다.

 

이제 감방에 들어와서 다시 성경을 보니까 새삼스러웠다.

 

가령 요한복음의 이야기가 마태복음에도 있고 마가복음에도 있다는 것을 나는 그 때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읽을 책을 차입시킨 이건호 교수의 것을 더러 보았다.

 

가만히 앉아있어도 머리가 아픈 상태라 책이 있어도 읽을 수 없는 형편이었다.

 

왜 그런지 알 수 없었다.

 

그 때부터 머리가 빠지기 시작해서 손에 긁혀 나올 정도로 많이 빠져서 지금처럼 되었다.

 

그러다가 우리는 서대문에서 기소유예로 석방되었다.

 

강기철 선생은 안양교도소로가고 우리는 나오게 되었다.

 

1961년 12월7일, 박웅철, 이세령, 최준문, 조일남, 이행의, 김영백, 엄호진, 그리고 나였다.

 

그 감방을 나오던 12월 7일에는 눈이 내렸다.

 

그것을 어떤 사람들은 기쁜눈 이라는 뜻으로 笑雪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같이 감방에 있던 사람보다 먼저 나온다는 것은 안됐다는 생각도 들었다.

 

우리가 나온 그 날은 무슨 특별한 의미는 없는 것 같다.

 

단지 쿠데타 세력의 프로그램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나올 때 어느 할머니가 두부를 입에다 넣어주었다.

 

그 분이 이세령 선생의 모친이란 것은 나중에 알았지 그 때는 누군지 몰랐다.

 

우리는 거리가 가까운 그 분 댁으로 갔고, 거기서 나는 버스를 타고 집에 돌아오니까 가족이 모두 깜짝 놀라는 것이었다.

 

나는 서대문서에 있으면서 통방이라고 하여 이쪽 감방과 저쪽 감방 간에 연락도 하고 말도 하는데 간수는 그것과 함께 틈틈히 잠을 자는 것도 못하게 하였다.

 

나는 낮에는 앉아있다가 전등도 끄지 않는 방에서 밤에 눕는대로 곧 잠이 들곤 했다.

 

그런 생활 중에 잡혀 온 정치범 하나는 박정희를 칭찬하는 사람도 있었다.

 

나이가 70이 넘은 成 모라는 통사당 관계자는 박정희 장군이라고 호칭하면서 혁명을 찬양하였다.

 

그는 자기가 계획한대로 박정희가 잘 진행시킨다는 것이었다.

 

그래서인지 그들은 남모르게 대우도 받는다는 이야기와 함께 박정희가 통사당을 좀 어떻게 자기 편으로 할까 한다는 이야기도 들렸다.

 

박웅철 선생은 나온 뒤에도 정치범들의 행태에 대해서 크게 분노하곤 하였다.

 

그들은 취조를 받으면서도 책임은 항상 남에게 뒤집어 씌우기 일쑤였다고 했다.

 

혁명검찰도 우리 조합원들의 태도와 비교하고는 그것을 비웃었다는 것이다.

 

한 번은 朝鮮日報의 宋志英씨가 묶여나가면서 농담 비슷하게 "내가 사형수야!" 그러는 것이었다.

 

이미 사형선고를 받고 있었는데 그도 몇 해 있다가 풀려나왔다.

 

나와선 또 그렇게......

 

민주당정권의 각료를 지낸 조재천, 주요한씨 등도 그 때 보았다.





4-31

우리는 이미 파면된 상태였다.

 

함성광 선생은 동대문서에서 서대문으로 옮겨가던 날 우리가 파면된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것을 일러 줄 수가 없어서 나오면 알 것이라고 했던 것이다.

 

그 분과 같이 나온 선생들도 거의가 파면된 상태였지만 그들은 곧 복직이 되었다.

 

그 때 교육감이 앞서 말한 朴賢植대령으로 우리 집 근처에 살았기 때문에 그들은 내 집에 모였다가 거기를 찾아가기도 하였다.

 

아마 다음 해인 1962년 1월에 그들은 복직이 되었던 것 같다.

 

나는 이웃이라 교육감하는 박현식씨와는 안면도 있는 사이였다.

 

그래서 한 두번 만난 적도 있는데 해가 바뀌자 그는 "이제 다시 오지 말라"고 하였다.

 

그래서 우리는 힘을 써보려고 상부에다 이야기를 한 모양인데 가망이 없으므로 그랬던 것 같다.

 

우리가 복직발령이 난 것은 1965년 3월 19일 이었다.

 

그 때까지 민정이후에 국회에다 청원을 냈고, 교육위원회에는 진정서를 낸 적이 있다.

 

((한국교원노동조합원에 대한 징계면직 처리는 만행이었다))

 

국회에 낸 청원서는 문공위원회에서 다루어졌다.

 

너무 생활이 어려워서 시간을 낼 사람이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조일남 선생과 내가 국회 방청을 갔다.

 

그 자리에서 야당의 高興門의원(?)이 '한국교원노동조합사건'과 관련해서 "그징계면직 처리는 만행이었다"고 발언했는데, 방청을 하면서도 '아 참 고맙게 얘기해주는구나!하고 느꼈다.

 

특히 본회의 때, 錢鎭漢의원의 발언은 정말 도움이 되었다.

 

우리의 청원이 정식으로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것은 1963년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곧 처리되지 않았다.

 

한편, '한국교원노동조합사건' 때문에 朴雄澈 선생이 당시의 실력자였던 金種泌을 만나려고 한 일도 있었다.

 

(壯忠학교) 근무 때 그의 큰 딸을 담임하면서, 사례를 사양한 적도 있었다고 했다.

 

그러나 끝내 그 만남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미 한 약속을 번번히 깨뜨리는 그를 박 선생이 일찌감치 단념했기 때문이다.

 

설사 김종필을 만났다 하더라도 그의 인생 경험으로나 그 덩치와 성격으로 보아 구차스런 도움을 요구했을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그 반대로 한번....

 

솔직히 김종필은 '한국교원노동조합사건'과 전혀 관계가 없다고 할 수는 없었다.

 

박 선생은 5. 16군사쿠테타 당시 박정희 다음의 제 2인자였던 김종필 때문에 우리나라의 교원단체가 그 후 합법화되지 못했다고 늘 분통을 터뜨리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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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 따르면, 앞으로 무슨 '교원단체'의 등장을 막기 위해서라도 그 뿌리를 뽑아야 한다고주장한 자가 그였으며, 대구 지역 사회주의운동 사건으로 10년 옥고를 치렀던 '경상북도 위원장' 金汶? 선생을 "시범케이스로 죽여야 한다"고 주장한 자도 바로 그였다는 것이다.

 

나도 옥중에서 "공산당과 연계된 것이 확인되면 처형될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서울에 있는 교원인가, 지방에 있는 교원인가'를 생각해 본 적이 있었다.

 

사실 우리 조합원 가운데는 사형당한 사람은 없으나 군사쿠테타 세력에 당한 고문 후유증으로 출옥 후에 자살한 교원 가운데는 '인천지부장'이었던 李東杰선생이 있다.

 

또 당시 약 8만 명의 교원 가운데서 정확한 것은 아니지만 약 1500여명이 쭃겨났는데, 최근의 (전교조)사건 발생과 관련해서 당시의 해직자의 수와 비교된 적이 있는 줄 안다.

 

그리고 1998년도에 해직된(전교조)의 1500여명 보다는 비율로 보아 상대적으로 적어도 약 2~3배가 되는 숫자였던 것이다.

 

더구나 당시 쿠데타 세력이 정한 '政治淨化法'에는 우리 교원이 70여명이나 올라 있었는데 그것은 다른 어느 집단보다 많은 인원이었다.

 

정치나 경제를 비롯해서 지금과는 엄청난 차이가 나던 30년 전에 우리가 겪은 일은 정신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최근까지 연장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政治淨化法'에 묶였던 박웅철 선생은 사건 10년이 넘어서 어느 날 갑자기 중앙정보부장 金炯旭이름으로 사면장을 받았는가 하면, 내 아들이 직장을 옮긴 직후인 1987년 1월 15일 자로 '公安事犯家族'이라고 하여 '身元特異者名簿'가 소속 직장에 전달되기도 하였다.

 

우리는 야당 국회의원이 지적한대로 우리들에 대한 '만행'을 저질렀던 그 주역 김종필 등을 30년이 지난 지금도 결코 잊을 수가 없을 것이다.

 

그 정권이 우리에게 조작해서 씌우려고 했던 것이 바로 '容共'이었기 때문이다.

 

1987년까지 27년간 공민권이 박탈된 채, 옥고와 연금 등을 겪은 강기철선생이 그 상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거기서 김종필의 역사적 책임을 제외시킨다는 것은 어떠한 경우에도 있을 수 없는 일 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비록 우리 자신이 반성할 부분이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용공'으로 조작되어 완전히 박살이 난 우리 단체는  당시의 '反共을 國是'로 삼는 박정희 정권 시절에 지금처럼 지속적인 운동을 할 어떠한 공간도 없었다.

 

그러므로 우리가 복직을 하는 것은 아주 어려운 형편이었다고 할 수 있다.

 

우리가 복직을 하는 데는 세 사람의 보증인이 필요했다.

 

보증인은 현직 교장, 국회문공위원회 의원, 그리고 교육위원 각각 한 사람씩 모두 세 사람이 서야 했다.


4-33

결국 崔永朱 의원, (미동학교)의 韓興洙교장, 그리고 金鍈? 위원의 보증을 얻어낼 수 있었다.

 

한 교장은 최준문 선생과 잘 알고 있었고, 김 위원은 朴正熙의 대구사범 스승이자 중등에서 활약한 조영진 선생의 스승이기도 했다.

 

조 선생이 그를 삼선교 자택으로 찾아가서 '무조건 보증을 서야 합니다'고 하여 우리들 모두의 보증을 승락한 것이다.

 

다음 해인 1964년 10월 쯤에야 서울시교육위원회에서 통지가 왔다.

 

모두 출두하라는 것이었다.

 

초등과장 김명보는 우리에게 무엇인가 써내라고 그랬고, 우리는 그렇게 했지만 써서 낸 것이 자기들 마음에 맞지 않는다고 다시 쓰라고 해서 또 다시 썼으나 역시 처리되지 않았다.

 

단지 엄호진 선생만은 그 해 복직이 되었다.

 

그는 (한국교원조합)의 준비와 창립 때까지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가 단지 5월 22일 자기 학교의 참석자가 많은 관계로 초등위원장에 선출되었을 뿐,그 이후에도 거의 회의에 나타나지 않았던 사람이다.

 

내가 알기로는 자기생각을 활동한 것이아니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끌려서 그렇게 되었다는 것을 당국에 얘기했기 때문에 그게 결국 참작되어 먼저 발령이 난 것이다.

 

그 바람에 그는 몇 달 먼저 발령을 받았을 뿐이다.

 

발령이 지체된 또 한 가지 이유가 있다면 그 해 중학교 입학시험 문제 중에 자연과의 '무우즙사건' 때문이었다.

 

그 문제로 교육위원회가 아주 복잡해져서 우리 일이 미루어진 것이다.

 

발령이 날 때까지 나는 생활이 어려워서 고등학생이던 큰 아이를 일년간 휴학을 시켰고 나와 함께 그 아이도 가정교사를 하며 겨우 겨우 지내고 있었다.

 

물론 현직에 있을 때는 한 적이 없었다.

 

장사도 밑천은 물론 있어야 되지만 재주도 없었고, 삼육학교 근처에서 리어카를 끌었지만 몸이 약해서 한 달 쯤 하다가 그만 두기도 하였다.

 

그러나 나는 단 한 번도 교조활동을 후회해 본 적이 없다.

 

마찬가지로 나는 그 과정에서 교단을 떠날 생각을 해 본 적은 없었다.

 

과거에도 교장이 학교운영 관계로 내게 나갈 것인가 말것인가 물었던 경우가 있어서 더 생각을 해봤다가 그만 계속하기로 한 경우가 있었다고말 한 바가 있다.

 

이번에도 나는 나중에 하거나 말거나 간에 우선은 명예회복이라고 할까 그런 억울하게 빼앗겼던 것을 우선은 찾아야 한다는데 힘써야겠다는 것 뿐이었다.

 

따라서 '내가 일생에서 한 번은 북쪽에서, 그리고 한 번은 남쪽에서 징계면직을 당하는구나' 그랬으면서도 나는 다른 재주가 없기 때문에 그저 복직 해야 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4-34

(쓰레기를 줍기로 결심한 학교에 가다)

 

1965년 3월 19일 나는 다른 7명 (박웅철, 이세령, 조일남, 김영백, 이행의, 최준문, 김종길) 동지와 함께 대통령 발령으로(금호학교)에 부임했다.

 

금호학교는 당시에 특A, A, B, C, D로 등급을 나눌 때 D급이었다.

 

(무학학교)에서 근무하던 선생이 반겨주었다.

 

그는 내 중학 후배였다.

 

이질감도 없었다.

 

그 때 복직은 대통령 발령이었다.

 

최준문, 엄호진 선생도 그랬다.

 

그 때는 지금과 달리 어디까지나 대통령, 그 다음은 문교부 장관 발령이었다.

 

1961년 군사쿠데타 이후에 학년 시작이 3월로 바뀌었다.

 

그러므로 우리 복직자들은 모두 증치였던 셈이다.

 

얼마 후에 6학년 담임이 이동하면서 3학년 담임이 그 자리에 가는 바람에 내가 3학년 담임으로 가게 되었다.

 

당시 교장 金齊辰씨는 청렴한분으로 경력으로나 나이로나 교장을 할 만한 사람으로 여겨졌다.

 

그런데 나는 엄호진, 최준문 선생과 함께 파면에 따른 퇴직금을 다른 사람들 보다 좀 늦게 받게 되었다.

 

파면을 당한 사람에게 무슨 명목인지 모르지만 퇴직금처럼 지급하는 규칙이 있었는데 마지막으로 근무하던 달의 2배를 주게 되어 있었다.

 

그것을 박웅철, 이세령 선생 등 다른 사람들은 다 탔는데 우리 세 사람은 받지 못했다.

 

까닭은 61년 7월 20일 까지 어떤 사건으로 면직된 사람은 그렇게 지급하기로 되어 있었지만 우리가 내각수반인 송요찬의 이름으로 면직발령이 난 날짜는 7월21일이기 때문에 해당이 안된다는 것이 교육관료의 설명이었다.

 

우리는 문교부를 비롯해서 여기저기로 찾아다녔다.

 

똑같은 사건인데 대통령 발령이기 때문에 내신 할 때 소급할 수 없어서 21일로 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우리는 그 사정을 따졌다.

 

그랬더니 해당된다고 해서 썩 뒤에 그것을 받았다.

 

이 (금오학교)에서 나는 내 양심상 가장 중요한 결심을 하게 되었다.

 

그것은 내가 '민족반역자'의 행위를 속죄하기 위해서 지금까지 지속해 온 종이줍기를 결심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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