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고개만 넘어가면 일선이니까 땡크를 많이 보았다.
그래서 마산도 떠나야 했다.
우리집 큰 아이는 그 때 네 살이었는데. '룩작' 짐 위에 그 아이를 태우기도 하면서 우리는 (진영)이라는 데를 지나가게 되었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서로 떨어져서 걸어가던 일행에 뜻밖에 미군 지프가 다가들었다.
그들은 나한테 무슨 말을 하다가 다시 뒤에 따라오는 처남과 같이오던 사람에게 가더니 다짜고짜 칼을 꺼내서 등을 찌르는 것이 아닌가.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들이 지나간 뒤 등을 찔린 처남은 길 옆의 어느 집에 들어가 된장을 달래서 칼 맞은 곳에 붙었다.
이어 가까운 병원에 가서 응급치료를 받았는데 다행히 상처는 깊지 않았다.
그 미군병사들은 처음에 성냥을 달라고 그랬다는데 잘 듣지 않는다고 두 사람을 찌른 것이다.
그들은 전쟁 기분을 냈는지 모르지만 우리 심정은 무어라고 해야 할 것인가?
부상자가 생겼으므로 우리는 (한얼중학교)라는 아직 완성되지 않은 학교에 수용되어 더 가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8월 15일이 되었다.
(피난 중에 전투경찰대원이 되고)
1950년 8월 15일,
읍인지 면인지 모르지만 사무소 직원이 나와서 오늘 몇 시까지 모든 피난민은 떠나라, 여기도 위험하니까 철수하라, 낙동강을 건너가야 된다, 그러면서 직원 중 한사람이 가는 길을 안내하는 것이었다.
환자도 웬만큼 무리해서 걸을 수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일주일 쯤 지난 그날 거기를 떠나게 되었다.
그렇게 낙동강 가에 왔지만 철교를 앞에 두고 우리는 건널 수가 없었다.
철교는 군용차가 가끔씩 오가기도 했고 또 철도 경비원이 있어서 건너고 싶어도 마음대로 들어설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할 수 없이 우리는 한 사흘 후에 건널 때까지 그곳 경비원들과 이야기도 하고 잠도 자면서 기다려야 했다.
우리가 사흘 후 경비원에게 허락을 받고 건너보니 철교는 꽤 길었다.
건너가서는 낙동강의 제방 옆에서 여러 날을 묵었다.
거기는 밤에는 그런대로 견딜 수 있었지만, 낮에는 태양열로 데워진 땅이 발도 대지 못할 만큼 뜨거운 곳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