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등을 일으켰던 어떤 상상)
수용소에서 그냥 지낼 수 없었던 나는 미군부대의 일을 찾아 나섰다.
거기서 노무자 모집을 한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항공 관계 부대의 노동일이었다.
다음날부터 아침에 집합장소에 가면 트럭에 실려서 부대에 가고 저녁에는 다시 집이 있는 곳으로 실려 왔다.
그런 중에 9.28 서울 수복이 이루어졌지만 피난민은 아직 들어 오지 못하고 있었다.
얼마 후 한강 이남의 경기도 공무원은 임시열차를 탈 수 있어서 나는 아무 계획도 없이 경기도 공무원이
간다고 하니까 지원해서 타고 서울로 향했다.
차만 타면 바로 올 줄 알았는데 역마다 쉬기 때문에 영등포까지 오는 동안에 차에서 이틀 밤을 자며 왔다.
영등표까지 오기로 했으나 더 못 간다고 해서 시흥역에 내린 다음, 한강 다리 밑에 설치된 부교를 건너서 당시 경기도청이 있는 지금의 중앙청 앞에 왔다.
나는 거기서 경기도 학무과 직원을 만나게 되었다.
그는 내가 집에 갈 여비도 없고 하니 좀 마련해 주어야겠다고 하자 주저없이 내게 여비를 주었다.
아마 다음에 봉급에서 떼는 모양이지만 어쨌든 그것을 주었기 때문에 나는 군자에 갈 수 있었다.
얼마 뒤에 우리 가족은 부산서 인천까지 수송하는 큰 배를 타고 와서 만나게 되었다.
그런데 나는 뒤에 잔류파니 도강파니 하는 문제가 생긴 것을 보고 안타까왔다.
우린 부산까지 갔다 오는데 그런 일을 겪었지만 남아 있던 사람들은 얼마나 괴로왔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돌아온 학교에는 직원들이 그대로 있었다.
교장은 그 후에도 얼마가 지날 때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그런데 직원 가운데 (교책)이란 이름으로 근무한 사람이 있었다.
교책이란 공산군편의 학교 책임자를 말하는 것이다.
교장하던 사람이 교책이 된 경우도 있었고, 군자국민학교처럼 직원 중의 하나가 교책이 되어 그 동안에 활동을 했던 모양이다.
내가 갔을 때는 교책을 한 사람이 이제는 숨어서 다니고 그랬다.
주민들 중에도 협조한 사람은 국군이 들어온 뒤로 즉결처분 당하기도 하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