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레기를 주우며시대의 넝마를 주우

3-28

광래 2012. 6. 27. 16:26

우리가 나가 있는 동안에 인민군들은 군자학교에 들어왔다고 한다.

 

그 때 학교 직원들과 동네 청년들이 그들을 환영하는 만세를 불렀다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는 우리보다 나중에 떠나 온 사람한테 들었던 것인데 경찰학교에 가서 훈련을 마친 다음 일선에도 간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는 '아! 이제 내가 이 훈련을 마치고 일선에 가면 군자학교 선생과도 마주서서 총을 쏘고, 그렇게 되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도 났었다.

 

여하간 과열하게 협조하며 근무한 사람은 직장에 나오기 미안해서 자중하고  있는 그런 형편이었다.

 

교책을 한 사람과 부교책을 한 사람은 나중에 북쪽에 갔다는 소리도 들었지만 만날 수는 없게 종적을 감추고 말았다.

 

그리고 8.15 뒤에 교직원의 인사이동이 있었던 것처럼, 9. 28 수복 뒤에도 인사조치가 학교간에 대규모로 있었다.

 

교사간의 인화를 위해서라든가.

 

(야간열차가 주고 간 생과 사의 열쇠)

 

하여간 우리학교는 직원 18명 가운데 피난을 떠났던 사람들은 넷이었다.

 

나를 포함해서 장선생, 피난을 다니다가 현역에 입대한 교감 고창균씨 그리고 중학교에 다니는 딸을 둔 여선생 이순난씨였다.

 

나머지 14명은 인민군에게 협조한 셈이 되었다.

 

적극적으로 활동한 교책과 부교책을 제외한 12명도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지만 이른바 시키는대로는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남아 있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서울 수복이 되자마자 즉시 인사이동을 시켰던 것이다.

 

물론 그 전쟁 중에도 수업은 계속되었다.

 

이어서 나는 다시 떠나지 않으면 안되었다.

 

1.4후퇴가 시작된 것이다.

 

사실 우리가족은 내가 먼저 떠난 후 썩 늦게야 만날 수 있었는데, 둘째아이가 올라오면서 병을 얻은 상태라 치료를 받아야 했고, 나는 혼자  자취하는 형편이어서 안정도  안된 생활을 하다가 또 그 일을 당한 것이다.

 

그런데 나는 이 때 내 일생에서 가장 뜻 깊은 경험을 하였다.

 

고난이 내게 준 선물이라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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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28 수복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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