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레기를 주우며시대의 넝마를 주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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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래 2012. 6. 27. 19:49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두 개를 갖고 있었는데, 지휘관들의 지시는 "가지고 있는 증명들 일체를 다 내놓으라"는 것이었다.

 

증명들을 갖고 도중에 빠져서 어떻게 할 생각을 할까봐 누구든 대열에서 이탈하는 것을 방지하려는 이유였다.

 

그것을 알고 있던  사람들은 증명을 내놓는 척 하면서 안 내놓기도 했지만 나는 내 놓으라는대로 정직하게 내놓았던 것이다.

 

'살았다! 하는 그순간, '내가 정직하게 내놓으라고 할 때, 내놓았으니까 마음이 개운해서 사고를 당하지 않았지, 감춰가지고 좀 꺼리낌 같은 것을 느꼈다면 사고를 당했을지 모를 거다'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우연히 살아난 것이 아니라는 어떤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나중에 수복되어서 군포에 있었을 때, 그곳을 다시 걸어갈 기회가 있었다.

 

가보니까 그렇게 긴 다리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내 마음이 굉장히 조급해서 걸어도 걸어도 끝이 나지 않는 그런 느낌이었지만 다시 보았을 때는 한30m 쯤 되는 길이였던것 같다.

 

좌우간 그 경험은 지금까지 정직해야 한다는 믿음을 흔들리지 않게 해주고 있다.

 

우리가 그렇게 17일간이나 걸어서 1951년 1월5일 쯤 도착한 곳은 경상남도 마산 근처의 함안이었다.

 

떠날 때 든든한 군화를 신었는데 거기에 닿고 보니 옆구리가 꿰지고 신지 못하게 될 형편이 되어있었다.

 

우리는 다른 신을 갈아 신을 수도 없어서  철사 등으로 꿰메어 신고 주먹밥을 먹으며  계속 훈련을 받았다.

 

장작을 베거나 나르는 일도 했다.

 

그 훈련병 속에는 북쪽에서 1.4후퇴로 거제도까지 왔다가 들어 온 사람도 있었다.

 

그런데 가끔 현역병을 보충하기 위해서 지원을 받던 일이 있었다.

 

한 번은 일선에 나가야 되겠다고 지원을 했지만 역시 치질이 문제가 되어서 그만 못가게 되었다.

 

그것은 전투에 참가라도 해 보자는 호기심이 아니라 그 만큼 거기 생활이 하도 지겨웠기 때문이었다.

 

우리 두 소대는 어느 국민학교에 머물렀는데 저녀 때가 되면 본부에 가서 하기식을 하였다.

 

얼마 후, 근무 중대원이 필요하다면서 중졸 이상 되는 사람들을 형식적으로 시험을 보아서 뽑았고,

나도 그렇게 되어 한 달 쯤 보초를 서는 등의 일을 한 적이 있다.

 

 

 

 

1.4후퇴6.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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