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레기를 주우며시대의 넝마를 주우

3-32

광래 2012. 7. 27. 14:19

함석헌 선생은 정치한다는 자들을 (정치업자)라고 했던가......

 

그런 인물들이 지금도 아마 있을 것이다.

 

어쨌든 우리집 식구의 경우는 평택 가까이 가다가 더 이상 남하하지 못하게 해서 다시 돌아와 있던 곳에 있기도 하고 집에 있을 수 없어서 피난 다닌다고 어려운 경우도 많았다고 했다.

 

한편 나는 그렇게 떠돌아 다녔어도 많은 시체를 본 적이 거의 없었다.

 

그런데 그 때 가족들은 피난을 다니면서, 양쪽 비행기가 폭격하는 곳에서 사람이고 짐승이고 할 것 없이 길에 시체가 쫙 깔려 있는데를 지나간 경험이 있다고 했다.

 

나는 부산에서 처남이 있는 이리로 왔지만 아무 소식도 못듣고 말았다.

 

정말 생사를 모르는 것이다.

 

그런 때에도 자기가 득을 보려고 하는 그런 생각은 잘못이었을 것이다.

 

이리농업학교도 함안에서 경우처럼 학교는 대부분 난민수용소로 되어 있었다.

 

수용소 방들을 아침 먹고 한 바퀴 빙 돌아보니까 동료 노선생 이름이 세대주 난에 적혀 있는 것이 보였다.

 

글씨를 퍽 잘 쓰던 그 분을 여기서 만나는구나 생각하며 물어보니까 그는 거기 있다가 그 날 아침에 떠났다는 것이다.

 

우리는 교육대에 같이 있었는데 그는 조금 먼저 출발했고 우리는 끝까지 남아있다가 왔기 때문이다.

 

점심 때 쯤 출발해서 도중에 그를 만난 나는 천안과 수원을 지나서 점점 군자가 가까와지자 우리가족이 그냥 있을 지 점점 더 걱정이 되었다.

 

그러나 가족은 무사히 남아 있었다.

 

아직 4월이었다.

 

집에 와서 얼마가 지나지 못했을 때, 우리는 또 서둘러 떠나기로 하였다.

 

중공군 춘계공세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앞서 두 차례 놀랐고, 겨울에도 헤어졌고, 그래서 조금 일찍 가족을 데리고 떠났다.

 

너무 겁이 많아서 그랬던 것 같다.

 

그래서 나는 혼자 올라와 보니 나도 모르게 군포에 발령이 나 있었다.

 

가족은 나중에 힘겹게 따라왔고, 짐도 별 것이 없었지만 꾸려가지고 군포에 부임하게 되었다.

 

와보니 교실은 다 미군이 쓰고 있었다.

 

그래서 산에 다니면서 공부를 했다.

 

1951년 9월에 1학년 들어간 우리 아이는 다음해 4월에 1년도 못되어서 1학년을 마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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