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레기를 주우며시대의 넝마를 주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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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래 2012. 6. 27. 19:58

그런데 우리들의 모습은 말이 아닐 정도였다.

 

1950년 여름의 거지 행렬과 비슷했기 때문이다.

 

입고 간 옷이 그런데다가 인원은 많고 먹고 자는 것도 형편이 없어서 대원 가운데는 몸이 쇠약해지거나

더러 죽어 상여가 나간 경우도 몇이 있었다.

 

군대가 부패했기 때문에 희생당한 것이다.

 

책임자로 김윤근이가 사형당했고 동시에 이어 4월에 그것은 해체되었다.

 

저 유명한 (국민방위병사건)이라고 알려진 현장이 바로 거기였다.

 

우리가 떠날 때는 제대라고 그러는 것인지 몰라도 현물로 쌀도 주고 돈도 주고 그랬다.

 

계급은 없었지만 좀 젊은 사람은 소대장이 된 적도 있었다.

 

(전쟁중에도 거짓말 하는 국회의원)

 

함안에서 제대가 된 나는 마산까지 걸어가고 거기서 부산까지는 배를 타고 갔다.

 

4월 봄날에 나는 부산의 어느 수용소를 찾아 가 거기서 하룻밤을 묶고 다시 군자로 오게 되었다.

 

물론 그 동안에 우리 가족과는 아무 연락이 없었다.

 

당시 형편으로는 중공군이 넘어와서 우리가족이 있는 곳까지 지났을 것 같은 생각이 들어 불안한 마음이었다.

 

우리가 부르던 군가에 "아내여, 이 세상 굳세게 사소서" 그런 것도 있었는데, 집에서 떠나온 사람이라 궁금했지만 별 도리가 없는 일이 아닐 수 없어서 아주 체념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런 현실에서도 정치한다는 사람은 역시 정직하지 못했다.

 

어느 날인가, 훈련 기간중인데 시흥군 국회의원을 하던 이재형이 왔었다.

 

세상에 잘 알려져 있다시피 그는 오랜 야당생활과 그 원로로 지내오다가 전두환 정권하에서 국회의장까지 했던 언물이다.

 

그 시절, (국민방위병)이 해체되기 직전 어느 날  국기 하기식 때였다.

 

그는 격려차 우리들에게 말하길 "군자면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가 전라도 어느쪽으로 피난 했으니까 안심하라"고 집걱정을 말라는 그의 말에 우리는 고마운 마음으로 그런가보다 하면서 그대로 믿고 있었다.

 

그러나 와서 보니까 계획적으로 안전하게 보낸게 아니고 그저 제각기 떠나간 것이었다.

 

피난민들의 생사가 걸린 문제를 그토록 가볍게 입발림을 할 수 있다는 심사는 도대체 무엇인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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