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레기를 주우며시대의 넝마를 주우

4-23

광래 2012. 8. 4. 16:55

그런 모임에서 내가 "지금까지 전근을 간다거나 담임을 맡는다거나 할 때, 서로간에 금품이 왔다갔다하는 일이 있었는데 앞으로는 그런 일들이 고쳐질 것 같습니까?" 하고 질문을 하자 장학사는 "이제부터는 잘 되지 않겠어요?"라고 대답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나는 정년퇴임 할 때까지 그것이 고쳐진 것을 본 적이 없다.

 

그 때 그 장학사는 나중에(창신학교)에서 교감으로 함께 근무한 적이 있었다.

 

좌우간 '혁명완수교육자대회'를 했다는 사람들은 과거에 '우리가 가지고 있던 그 무엇을 되찾아서 그대로 누려보자'는 생각 뿐이었지, '4.19 사태 때 학생들이 많이 죽고 희생 당하고 부정선거가 참 잘못이니 이제부터는 올바로 해 봐야되겠다'는 그런 생각은 거의 없는 것 같았다.

 

그 때 내 생활은 다소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다.

 

특히 집에서 구독하고 있던 동아일보가 계속 (한국교원노동조합)에 대해 일관되게 비난하는 논조가 그것을 더해 주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신문을 바꾸기도 하였다.

 

사실 우리들 기사는 경향신문, 한국일보, 조선일보에서 많이 다뤘고 또 호의적이었다.

 

당시 동아일보는 민주당 정권과 내면으로 깊은 관련을 맺어오고 있었던 까닭이라고 생각한다.

 

그 때 동아일보는 매우 보수적인 성격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도 그런 기사들은 당시 상황에서(한국교원노동조합)의 입장을 상당히 불리하게 만들었던게 분명하다.

 

그런 점에서 지금도 언론에 대해서는 많은 관심이 가는 만큼 비판적인 태도를 떨칠 수가 없다.

 

그런 시간을 보내면서 내게는 강기철, 박웅철 선생들을 알게 된 것이 내인생에서 큰 이득이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성격이 수줍어서 잘 아는 사람도 없는데 지금 생각하면 그런 분들을 알게 된 일이 매우 고맙다고 느낀다.

 

나는 1961년 5월 20일 城東署에 수감 되었다.

 

그리고 7월 17일에 함성광이가 동대문서에서 석방되던 다음 다음날, 동지들과 함께 우리는 西大門矯導所로 이감 되었다.

 

서대문 교도소로 옮겨갈 때, 함성광은 확실한 기억은 없고, 단지 7월17일 자로 '그 직을 면함'이라는 내각수반 宋堯瓚 이름의 발령을 받았다 고 한 것 같다.

 

그 때 교원은 대통령 발령이었다.

 

엄호진, 최준문 선생도 그랬고 다른 사람들은 아마 서울시 교육감으로 되었던 것 같다.

 

한 마디로 우리는 쫓겨난 것이다.

 

시간상으로는 약 1년 동안에 불과하지만 나는 박정희와 김종필 일당이 일으킨 5. 16 군사쿠데타 덕분에 삶에 대한 태도를 공부하는 한 순간을 갖게 되었다.

 

일찌기 함석헌 선생님은 감옥을 인생대학이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내게는 적어도 그 말씀이 진실하다고 느낀다.

 

지금과는 판이하게 그 때 분위기는 매우 살벌한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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