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편, 수석부위원장하던 강기철 선생을 비롯해서 주요 간부가 5월 17일과 18일에 검거 되었다.
기억나는 일 중에서 우리 초등에 崔濬文 선생의 平壤師範 동창에 관한 일화가 하나 있다.
그는 치안본부 간부로 있었는데 최준문선생에게 비밀리에 "어서 도피하라"며 알려주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5.16 군사쿠데타가 나기 며칠 전이었으며, 내용은(한국교원노동조합)간부들에 대한 체포 계획이었다.
짐작이긴 하나, 쿠테타 세력이 우리를 체포할 수 있었던 것은 이처럼 민주당 정권이 사전에 준비한 체포 계획 덕분이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최준문 선생은 도피하지 않고 체포되었다.
5월20일, 3학년을 맡고 있던 나는 6학년 선생들과 운동장에서 학년 대항 배구시합을 하고 있는 중에 찝차가 들어온 것을 보았다.
시합은 3학년 팀이 이겼다.
그 순간 나는 찝차에 태워졌고, 수사관 두 명에게 호위되어 성동서 유치장에 수감되고 말았다.
(경찰조사를 받던 중 '인민'이란 말을 하다)
(금오학교)에 있던 김영백 선생은 옆 방에 있었다.
진보적 정치운동가였던 統社黨의 尹吉重씨도 그 옆방에 들어왔다.
윤길중씨를 숨겨 준 혐의로 잡혀온 그의 처남은 나와 같이 있으면서 윤길중씨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하였다.
그 밖에 절도 등을 저지른 잡범들과 함께 6월3일까지 한 방에 모두 15~6명씩 섞여있다가 통사당원 따로 교원노조원 따로 묶여서 우리는 동대문서로 이감 되었다.
내가 유치장에 들어온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지만 이감되면서 북쪽에서 보지 못했던 수갑이 채워진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성동서 유치장에 들어가기 전에 갖가지를 물어보는 것도 달랐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북쪽에서는 석방될 때까지 불러내서 심문을 한 적이 없었다.
또 무슨 얘기를 하는 도중에 내가 '인민'이란 말을 한 일이 었었다.
그 때 취조하던 형사의 눈이 순간 번쩍하던 모습도 생각이 난다.
뭐 좋은 꼬투리라도 잡은 것처럼 그러다가 식사시간이 되어서 자리를 뜨고 말았다.
사실 더 이상 문제가 될 일도 없었다.
문제라면 고향이 북쪽이기 때문일까.
하지만 그 형사가 듣기에 좋지 않은 대답을 하거나 또는 지나다니다가도 툭하면 아주 주먹으로 때릴 듯이 그랬는데, 나는 특히 그 때 자주 쓰고 있던 철필 같은 것으로 '나를 찌르면 어떻게 하나?' 걱정을 많이 하였다.
그러면서도 4.19革命 때, 나는 술주정꾼이 파출소에서 행패를 부려도 감히 말리지도 못하던 경찰의 모습과 대학생들이 지역책임을 맡아서 질서를 잡던 일이 눈에 선했다.
내게 이런 경찰서 안의 광경은 정말 낯선 모습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