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레기를 주우며시대의 넝마를 주우

4-27

광래 2012. 8. 6. 16:59

(마땅히 받아야 할 벌을 받아야지만......)

 

나는 정말 초조하진 않았다.

 

지금도 그렇게 말하고 있지만 '내가 왜정 때 민족반역자 노릇을 했기 때문에 거기 대한 벌을 마땅히 받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교조활동을 한 것 때문에 잡혀간 것은 참 억울했다.

 

올바른 교육을 하자고 활동하다 잡혀 들어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쨌든 나는 초조한 마음이 들지 않았다.

 

서대문 교도소로 넘겨진 후, 우리는 간수들과 서로 친해지기도 하였다.

 

하루는 간수가 우리에게 "아, 무슨 걱정 할 일이 있느냐?고 그랬다.

 

"간수가 밥도 갖다주지, 옷도 갖다주지, 자지않고 지켜주지 뭐 걱정이 있겠느냐?

 

참 자유가 없는 게 문제는 문제지?"

 

한 번은 언제 여기를 나갈 지 기약도 없는데 고등학교에 다니던 내 큰아이가 옷을 넣은 일이 있었다.

 

식구들을 괴롭힌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큰 아이가 넣어준 옷을 보고 '참 고마운 일이구나!' 생각하면서 집안 형편을 마음 속에 그려보기도 하였다.

 

그래도 갇혀 있으니까 나가게 되는 것이 관심일 수 밖에 없었다.

 

그 때 우리 조합원들은 한 곳에 모였으므로 서로 지난 일도 이야기하면서 지냈다.

 

그 중 가장 인상 깊은 일은 지금은 돌아가신 柳聲虞 선생과의 대화였다.

 

"우리가 이렇게 잡혀왔더래도 밖에서 진정한 교육이 이루어진다면 얼마나 바람직한 교육과 정의로운 사회가 되면 그게 좋은 일이다.

 

특히 학교에서 부정이 많았는데 이제부터라도 진짜 교육자가 있어서 올바로 가르친다면 그것이야말로 참 좋은 일이다.

 

우리가 바랄 것은 그것 뿐이다."

 

그 밖에 80~90명 하던 학급인원을 줄여야 한다는 것들도 이야기 한 기억이 있다.

 

그런 말 하는 교원이 구속되어야 하는 현실이 5' 16쿠테타였다.

 

같은 감방에는 학생운동을 하던 사람도 있었다.

 

黃 建이란 젊은이는 서울대학생인데 나중에 문교장관이 되었던 黃山德 교수의 동생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 무렵 박웅철, 최준문선생이 같은 방에 있게 되었다.

 

정식 기소가 되기 전에 나는 다시 취조를 받았는데 대개 "교조활동을 어째서 했느냐?" 고 묻는 것이었다.

 

내 대답은 항상 똑같았다.

 

"부정선거를 한 정권을 학생들 힘으로 이렇게 무너뜨려줬는데, 이제 학생들은 그것을 무너뜨렸으니까 학교에 돌아가서 자기 할 공부를 해야 하지 않겠느냐?

 

'쓰레기를 주우며시대의 넝마를 주우' 카테고리의 다른 글

4-29  (0) 2012.08.06
4-28  (0) 2012.08.06
4-26  (0) 2012.08.06
4-25  (0) 2012.08.06
4-24  (0) 2012.08.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