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레기를 주우며시대의 넝마를 주우

4-28

광래 2012. 8. 6. 17:18

지금 학생들은 이만큼 일을 했으니까 돌아가서 공부를 하고 우리는 우리 할 일을 해야 되겠다고 생각해서 이런 활동을 한 것이다.

 

"그럼 어떤 활동을 했느냐?"

 

"내가 한 활동이란 것은 학교에서 부독본을 강매하는 폐단이 있었는데,그것을 못하게 한 일이 있다.

 

또 내 직장에서 인사이동 때 금품수수 등 옳지못한 일이 있는데, 어떻게 하면 고칠 수 있을까 생각해서 항의도 하고 그랬다."

 

그들은 "대구대회에 갔느냐?"고도 추궁했지만 그 때 나는 거기 가지 않았다.

 

나는 내가 한 일이 잘못한 일이기는 커녕 본 받을 만한 일이었기 때문에 감방 안에서나 나와서나 교조활동으로 투옥된 것에 대해 지금도 억울하다는 것은 잊지 못한다.

 

그래서 유성우 선생처럼 학교부조리가 고쳐진다면 참 바람직한 일이라는 점이 주로 내 대답이었다.

 

(어느 땐스범의 예언......)

 

나올 때까지 몇 차례 혁명검찰부에 10회 정도 불려가서 심문을 당했다.

 

박웅철 선생은 더 많이 취조를 당했다.

 

아마 위원장이라 그랬던 것 같다.

 

그는 많이 맞았지만 6.25 때 봉화전투 등지에서 많은 사선을 넘은 체험 때문인지 맞으면서도 얼굴색을 변해본 적이 없다고 했다.

 

나는 한 번인가 주먹으로 맞았던 것 같다.

 

그런 날은 교도소에서 차를 태워 을지로 3가 근처에 이름도 모르는 곳으로 데려갔다.

 

거기가 혁명감찰부였고, 담당은 동대문서의 김주성이었다.

 

여러 차례를 들락겨렸지만 직접 심문을 받은 것은 두 번 정도였다.

 

내용도 앞에서와 비슷했다.

 

담당 검사는 윤영학이었다.

 

한 번은 윤영학 앞에서 심문을 받는데 나중에 보니 강기철 선생이 뒤에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아마 강기철 선생에 대한 보충 심문을 위해서 나를 불렀던 것 같은데 그 때 내 대답이 강기철 선생한테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지금도 궁금한 생각이 난다.

 

그는 나보다 젊었는데 강기철 선생은 출옥한 뒤에 한 두번 만났다고 들었다.

 

차에 실려서 밖에 나올 때 가족들이 보이기도 했지만 밖의 소식은 들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다시 돌아온 감방은 언제나 비좁았는데, 정치범보다는 잡범이 많았다.

 

혁명검찰부에 갔다온 어느 날, 댄스홀에서 댄스를 하다가 붙잡혀온 사람이 있었다.

 

그는 며칠 동안 함께 있었는데 "지금 이렇게 잡혀왔지만 10년이나 20년이 지나면 여기 갔다가 온 이야기가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고 한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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