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레기를 주우며시대의 넝마를 주우

4-30

광래 2012. 8. 8. 15:18

기독교 계통의 중학교를 다녔기 때문에 학교를 다니면서 예배도 보고 성경공부도 한 적은 있었다.

 

이제 감방에 들어와서 다시 성경을 보니까 새삼스러웠다.

 

가령 요한복음의 이야기가 마태복음에도 있고 마가복음에도 있다는 것을 나는 그 때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읽을 책을 차입시킨 이건호 교수의 것을 더러 보았다.

 

가만히 앉아있어도 머리가 아픈 상태라 책이 있어도 읽을 수 없는 형편이었다.

 

왜 그런지 알 수 없었다.

 

그 때부터 머리가 빠지기 시작해서 손에 긁혀 나올 정도로 많이 빠져서 지금처럼 되었다.

 

그러다가 우리는 서대문에서 기소유예로 석방되었다.

 

강기철 선생은 안양교도소로가고 우리는 나오게 되었다.

 

1961년 12월7일, 박웅철, 이세령, 최준문, 조일남, 이행의, 김영백, 엄호진, 그리고 나였다.

 

그 감방을 나오던 12월 7일에는 눈이 내렸다.

 

그것을 어떤 사람들은 기쁜눈 이라는 뜻으로 笑雪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같이 감방에 있던 사람보다 먼저 나온다는 것은 안됐다는 생각도 들었다.

 

우리가 나온 그 날은 무슨 특별한 의미는 없는 것 같다.

 

단지 쿠데타 세력의 프로그램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나올 때 어느 할머니가 두부를 입에다 넣어주었다.

 

그 분이 이세령 선생의 모친이란 것은 나중에 알았지 그 때는 누군지 몰랐다.

 

우리는 거리가 가까운 그 분 댁으로 갔고, 거기서 나는 버스를 타고 집에 돌아오니까 가족이 모두 깜짝 놀라는 것이었다.

 

나는 서대문서에 있으면서 통방이라고 하여 이쪽 감방과 저쪽 감방 간에 연락도 하고 말도 하는데 간수는 그것과 함께 틈틈히 잠을 자는 것도 못하게 하였다.

 

나는 낮에는 앉아있다가 전등도 끄지 않는 방에서 밤에 눕는대로 곧 잠이 들곤 했다.

 

그런 생활 중에 잡혀 온 정치범 하나는 박정희를 칭찬하는 사람도 있었다.

 

나이가 70이 넘은 成 모라는 통사당 관계자는 박정희 장군이라고 호칭하면서 혁명을 찬양하였다.

 

그는 자기가 계획한대로 박정희가 잘 진행시킨다는 것이었다.

 

그래서인지 그들은 남모르게 대우도 받는다는 이야기와 함께 박정희가 통사당을 좀 어떻게 자기 편으로 할까 한다는 이야기도 들렸다.

 

박웅철 선생은 나온 뒤에도 정치범들의 행태에 대해서 크게 분노하곤 하였다.

 

그들은 취조를 받으면서도 책임은 항상 남에게 뒤집어 씌우기 일쑤였다고 했다.

 

혁명검찰도 우리 조합원들의 태도와 비교하고는 그것을 비웃었다는 것이다.

 

한 번은 朝鮮日報의 宋志英씨가 묶여나가면서 농담 비슷하게 "내가 사형수야!" 그러는 것이었다.

 

이미 사형선고를 받고 있었는데 그도 몇 해 있다가 풀려나왔다.

 

나와선 또 그렇게......

 

민주당정권의 각료를 지낸 조재천, 주요한씨 등도 그 때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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