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에 따르면, 앞으로 무슨 '교원단체'의 등장을 막기 위해서라도 그 뿌리를 뽑아야 한다고주장한 자가 그였으며, 대구 지역 사회주의운동 사건으로 10년 옥고를 치렀던 '경상북도 위원장' 金汶? 선생을 "시범케이스로 죽여야 한다"고 주장한 자도 바로 그였다는 것이다.
나도 옥중에서 "공산당과 연계된 것이 확인되면 처형될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서울에 있는 교원인가, 지방에 있는 교원인가'를 생각해 본 적이 있었다.
사실 우리 조합원 가운데는 사형당한 사람은 없으나 군사쿠테타 세력에 당한 고문 후유증으로 출옥 후에 자살한 교원 가운데는 '인천지부장'이었던 李東杰선생이 있다.
또 당시 약 8만 명의 교원 가운데서 정확한 것은 아니지만 약 1500여명이 쭃겨났는데, 최근의 (전교조)사건 발생과 관련해서 당시의 해직자의 수와 비교된 적이 있는 줄 안다.
그리고 1998년도에 해직된(전교조)의 1500여명 보다는 비율로 보아 상대적으로 적어도 약 2~3배가 되는 숫자였던 것이다.
더구나 당시 쿠데타 세력이 정한 '政治淨化法'에는 우리 교원이 70여명이나 올라 있었는데 그것은 다른 어느 집단보다 많은 인원이었다.
정치나 경제를 비롯해서 지금과는 엄청난 차이가 나던 30년 전에 우리가 겪은 일은 정신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최근까지 연장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政治淨化法'에 묶였던 박웅철 선생은 사건 10년이 넘어서 어느 날 갑자기 중앙정보부장 金炯旭이름으로 사면장을 받았는가 하면, 내 아들이 직장을 옮긴 직후인 1987년 1월 15일 자로 '公安事犯家族'이라고 하여 '身元特異者名簿'가 소속 직장에 전달되기도 하였다.
우리는 야당 국회의원이 지적한대로 우리들에 대한 '만행'을 저질렀던 그 주역 김종필 등을 30년이 지난 지금도 결코 잊을 수가 없을 것이다.
그 정권이 우리에게 조작해서 씌우려고 했던 것이 바로 '容共'이었기 때문이다.
1987년까지 27년간 공민권이 박탈된 채, 옥고와 연금 등을 겪은 강기철선생이 그 상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거기서 김종필의 역사적 책임을 제외시킨다는 것은 어떠한 경우에도 있을 수 없는 일 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비록 우리 자신이 반성할 부분이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용공'으로 조작되어 완전히 박살이 난 우리 단체는 당시의 '反共을 國是'로 삼는 박정희 정권 시절에 지금처럼 지속적인 운동을 할 어떠한 공간도 없었다.
그러므로 우리가 복직을 하는 것은 아주 어려운 형편이었다고 할 수 있다.
우리가 복직을 하는 데는 세 사람의 보증인이 필요했다.
보증인은 현직 교장, 국회문공위원회 의원, 그리고 교육위원 각각 한 사람씩 모두 세 사람이 서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