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이미 파면된 상태였다.
함성광 선생은 동대문서에서 서대문으로 옮겨가던 날 우리가 파면된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것을 일러 줄 수가 없어서 나오면 알 것이라고 했던 것이다.
그 분과 같이 나온 선생들도 거의가 파면된 상태였지만 그들은 곧 복직이 되었다.
그 때 교육감이 앞서 말한 朴賢植대령으로 우리 집 근처에 살았기 때문에 그들은 내 집에 모였다가 거기를 찾아가기도 하였다.
아마 다음 해인 1962년 1월에 그들은 복직이 되었던 것 같다.
나는 이웃이라 교육감하는 박현식씨와는 안면도 있는 사이였다.
그래서 한 두번 만난 적도 있는데 해가 바뀌자 그는 "이제 다시 오지 말라"고 하였다.
그래서 우리는 힘을 써보려고 상부에다 이야기를 한 모양인데 가망이 없으므로 그랬던 것 같다.
우리가 복직발령이 난 것은 1965년 3월 19일 이었다.
그 때까지 민정이후에 국회에다 청원을 냈고, 교육위원회에는 진정서를 낸 적이 있다.
((한국교원노동조합원에 대한 징계면직 처리는 만행이었다))
국회에 낸 청원서는 문공위원회에서 다루어졌다.
너무 생활이 어려워서 시간을 낼 사람이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조일남 선생과 내가 국회 방청을 갔다.
그 자리에서 야당의 高興門의원(?)이 '한국교원노동조합사건'과 관련해서 "그징계면직 처리는 만행이었다"고 발언했는데, 방청을 하면서도 '아 참 고맙게 얘기해주는구나!하고 느꼈다.
특히 본회의 때, 錢鎭漢의원의 발언은 정말 도움이 되었다.
우리의 청원이 정식으로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것은 1963년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곧 처리되지 않았다.
한편, '한국교원노동조합사건' 때문에 朴雄澈 선생이 당시의 실력자였던 金種泌을 만나려고 한 일도 있었다.
(壯忠학교) 근무 때 그의 큰 딸을 담임하면서, 사례를 사양한 적도 있었다고 했다.
그러나 끝내 그 만남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미 한 약속을 번번히 깨뜨리는 그를 박 선생이 일찌감치 단념했기 때문이다.
설사 김종필을 만났다 하더라도 그의 인생 경험으로나 그 덩치와 성격으로 보아 구차스런 도움을 요구했을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그 반대로 한번....
솔직히 김종필은 '한국교원노동조합사건'과 전혀 관계가 없다고 할 수는 없었다.
박 선생은 5. 16군사쿠테타 당시 박정희 다음의 제 2인자였던 김종필 때문에 우리나라의 교원단체가 그 후 합법화되지 못했다고 늘 분통을 터뜨리곤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