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2 함석헌 선생은 정치한다는 자들을 (정치업자)라고 했던가...... 그런 인물들이 지금도 아마 있을 것이다. 어쨌든 우리집 식구의 경우는 평택 가까이 가다가 더 이상 남하하지 못하게 해서 다시 돌아와 있던 곳에 있기도 하고 집에 있을 수 없어서 피난 다닌다고 어려운 경우도 많았다고 했.. 쓰레기를 주우며시대의 넝마를 주우 2012.07.27
3-31 그런데 우리들의 모습은 말이 아닐 정도였다. 1950년 여름의 거지 행렬과 비슷했기 때문이다. 입고 간 옷이 그런데다가 인원은 많고 먹고 자는 것도 형편이 없어서 대원 가운데는 몸이 쇠약해지거나 더러 죽어 상여가 나간 경우도 몇이 있었다. 군대가 부패했기 때문에 희생당한 것이다. .. 쓰레기를 주우며시대의 넝마를 주우 2012.06.27
3-30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두 개를 갖고 있었는데, 지휘관들의 지시는 "가지고 있는 증명들 일체를 다 내놓으라"는 것이었다. 증명들을 갖고 도중에 빠져서 어떻게 할 생각을 할까봐 누구든 대열에서 이탈하는 것을 방지하려는 이유였다. 그것을 알고 있던 사람들은 증명을 내놓는 척 하면서 .. 쓰레기를 주우며시대의 넝마를 주우 2012.06.27
3-29 1.4후퇴 때는 그 동안의 경험으로 전지역의 적령이 된 사람들이 영장을 받았다. 내가 겪은 이리의 경우엔 갑자기 당한 일이니까 명부를 만들 수 있는대로 만들고 소집할 수 있는대로 소집해서 남하시키던 일이 이번에는 참고가 되었던 모양이다. 군자학교 교사들은 거의 모두가 영장을 받.. 쓰레기를 주우며시대의 넝마를 주우 2012.06.27
3-28 우리가 나가 있는 동안에 인민군들은 군자학교에 들어왔다고 한다. 그 때 학교 직원들과 동네 청년들이 그들을 환영하는 만세를 불렀다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는 우리보다 나중에 떠나 온 사람한테 들었던 것인데 경찰학교에 가서 훈련을 마친 다음 일선에도 간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는 .. 쓰레기를 주우며시대의 넝마를 주우 2012.06.27
3-27 (갈등을 일으켰던 어떤 상상) 수용소에서 그냥 지낼 수 없었던 나는 미군부대의 일을 찾아 나섰다. 거기서 노무자 모집을 한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항공 관계 부대의 노동일이었다. 다음날부터 아침에 집합장소에 가면 트럭에 실려서 부대에 가고 저녁에는 다시 집이 있는 곳으로 실려 왔.. 쓰레기를 주우며시대의 넝마를 주우 2012.06.27
3-26 그렇게 지내면서 "무궁화 아름다운 삼천리 강산...." 하는 경찰가를 불렀던것이 지금도 새삼스럽다. 그렇지만 그 모습은 참 거지행렬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러길 한 달, 훈련이 끝나면 일선근처로 배치되어 작전을 돕는 일을 하게 된다고 들었다. 군인처럼 실전은 아니고 주변에서 도와 주.. 쓰레기를 주우며시대의 넝마를 주우 2012.06.27
3-25 그 때 정부는 대구를 떠나 부산에 간 뒤였다. 내무장관 조병욱이 대구를 지킨다고 할 무렵에는 우리가 삼랑진에서 얼마간 머무르고 있을 때였다. 인민군이 가까이 왔다는 소리도 들리므로 우리는 다시 부산까지는 가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운명을 생각했는지 안했는지 나는 모른다. 거.. 쓰레기를 주우며시대의 넝마를 주우 2012.06.27
3-24 한 고개만 넘어가면 일선이니까 땡크를 많이 보았다. 그래서 마산도 떠나야 했다. 우리집 큰 아이는 그 때 네 살이었는데. '룩작' 짐 위에 그 아이를 태우기도 하면서 우리는 (진영)이라는 데를 지나가게 되었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서로 떨어져서 걸어가던 일행에 뜻밖에 미군 지프가 다.. 쓰레기를 주우며시대의 넝마를 주우 2012.06.27
3-23 제각기 조심을 해야 했으므로 떨어질 염려는 없었지만 터널을 지날 때 연기는 우리를 몹시 괴롭혔었다. 그렇게 해서 내린 곳이 순천이다. 아무래도 전주보다 평화스럽게 느껴졌다. 순천서도 우리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무작정 걷는 중에도 농민들의 따뜻한 대접은 정말 고마운 것이었다.. 쓰레기를 주우며시대의 넝마를 주우 2012.06.25